PUA - 285화 강철 속의 자비 (2)
◈ 285화 강철 속의 자비 (2)
레오는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루드거는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처음에는 레오가 해방군 소속이라는 말에 루드거도 내심 큰 충격을 받았다.
그날 레오에게 쪽지를 보내 정보를 흘렸던 일이 떠올랐다.
능력도 뛰어나고, 성격도 신중해서 앞으로도 잘 활용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해방군 소속이었을 줄이야.
세상에 이런 우연이 있을까.
진실을 알게 된 루드거는 고민했다.
당장 레오를 붙잡아서 경찰들에게 넘기는 것이 이성적으로는 맞았다.
하지만 레오가 가족이 인질로 잡혀 있다는 말과 레오의 표정을 보는 순간.
그럴 생각은 뜨거운 열사 위의 얼음처럼 삽시간이 녹아내리고 말았다.
‘평민으로 태어나 하나뿐인 어머니와 여동생을 먹여 살리기 위해 노력했다고 했던가.’
레오에서 문득 루드거는 과거의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다.
가족을 위해 홀로 모든 것을 감내하려는 레오의 모습이.
그저 겹쳐 보였던 것이다.
저 나이에, 웃으면서 행복한 청춘을 보내도 부족할 판에 레오는 해방군의 노예가 되었다.
누구도 믿지 못하고.
누구도 도와주지 못하고.
매일매일 지옥 같은 현실 속에서 살아야 했을 것이다.
이렇게 다가와 모든 진실을 꺼냈다는 것은, 그만큼 절박하고 옳은 방향으로 가겠다는 다짐도 있겠지만.
사실은 이제 이 힘든 선택을 끝내고자 하는 포기하는 마음이 더 컸을 것이다.
그 마음을 어찌 이해하지 못할까.
“레오.”
루드거의 부름에 레오가 숙였던 고개를 들어 올렸다.
눈물은 다 닦았지만, 그의 눈시울은 아직도 붉어져 있었다.
“나는 교사로서, 그리고 너보다 인생의 선배로서 너를 도와줄 생각이다. 이 말에 거짓은 없다.”
“…….”
“하지만 단 하나. 확인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게, 뭐죠?”
“너는 정말 너 자신의 의지로 싸울 각오가 됐나?”
다른 것도 아니고, 갑자기 각오가 됐냐니.
옆에 있던 에이단도, 그 말을 직접 들은 레오도 당황해했다.
하지만 루드거의 표정은 진지했다. 평소에도 그랬지만, 지금 대답을 듣길 바라는 그의 눈빛은 유독 진중했다.
“누군가 돕더라도 네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없다.”
루드거도 도움을 바랐던 적은 있다.
실제로 도움을 받은 적도 많았다. 전생에서도 현생에서도.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본인이 싸울 의지가 있냐는 것이었다.
언제까지고 누군가 손을 내밀어 주길 기다릴 수 없다.
결국, 싸우는 것은 자신이어야 했다.
“너는 정말로 모든 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됐냐고 묻는 거다.”
“……저는 제 삶의 반평생을 놈들에게 지독할 정도로 시달렸어요.”
레오는 루드거의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눈빛을 빛냈다.
“적어도 놈들에게 한 방 먹여 주지 않으면 속이 풀리지 않을 거 같아요.”
그 말에 루드거의 눈매가 부드럽게 변했다.
“훌륭하다.”
에이단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칭찬에 인색한 루드거가 이 정도까지 말했다면 정말로 최고의 칭찬이나 다름없어서였다.
루드거는 뒤를 돌아보았다.
파시우스가 복잡한 얼굴로 이쪽을 지켜보고 있었다.
“파시우스 경. 그렇게 됐습니다.”
“……예? 그렇게 됐다뇨.”
“이번에 제 고집에 어울려 주셔야겠습니다.”
“아니, 그…… 하아.”
파시우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서 루드거에게 왜 멋대로 했냐고 따지기도 뭐했다.
마스터급 기사인 그는 당연히 레오가 한 말을 멀리 떨어져도 다 엿들을 수 있었다.
당연히 레오가 지금 무슨 처지인지도 알게 됐고, 그 부분은 파시우스 또한 동정하는 바였다.
하지만 공과 사는 분명히 구분해야 했다.
문제는 공을 뒤덮는 사가 이 자리에 떡하니 있다는 점이었다.
“잊으셨습니까? 저는 로열가드입니다. 황실 수호를 넘어 엑실리온 제국의 수호를 맡은 기사란 말입니다.”
“지금은 로열가드가 아니지요. 제복과 검은 어디로 갔습니까?”
공적으로 나온 일이 아니니 로열가드를 들먹이지 말라는 소리였다.
“……정작 루드거 선생님께서도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은 표면뿐인 교사라고 하셨으면서?”
“그러니 표면적으로 도와주고자 합니다.”
“한 마디도 지지 않으시군요.”
“그래서 황녀님이 절 찾으셨나 봅니다.”
파시우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지만 루드거가 저렇게 강하게 나오니 파시우스는 차리라 잘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 레오를 체포해서 끌고 가는 것도 그에게는 별로 마음이 편한 일이 아니었으니까.
정말로 악한 자를 눈감아 주는 것은 그로서도 참고 넘길 수 없지만.
레오 또한 결국 한 명의 피해자라는 사실이 크게 작용했다.
‘마냥 냉혈한일 줄 알았는데.’
파시우스는 루드거의 의외의 면모에 감탄하면서도 불현듯 과거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그가 1황녀의 그림자가 되며 그녀에게서 많은 정보를 전해 들었을 때, 당연히 전대 그림자인 잭 더 리퍼에 대해서도 듣게 됐다.
-황녀님. 제 전대 그림자는 어떤 분이었습니까?
약간의 궁금증, 그 이상의 호승심.
파시우스로서는 아일린 1황녀에게 루드거의 존재를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일 처리가 깔끔한 남자였다. 냉혹하고, 냉정하며, 이성적이고, 차분했지. 머리도 빠르게 굴러갔고, 시류를 보는 눈이 뛰어났다.
-대단한 칭찬이시군요.
-나는 인정할 것은 인정하자는 주의다.
-평소에도 그렇게 칭찬을 자주 하셨으면 평가가 더욱 올라가셨을 겁니다.
-남들이 멋대로 내리는 평가 따위, 내가 신경이라도 쓸 것 같으냐? 정 억울하면 본인들이 걸맞은 평가를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하라지. 그 남자가 그랬던 것처럼.
-그래서 전대 그림자 잭 더 리퍼 경의 이야기는 그게 끝입니까? 이야기만 들으면 피도 눈물도 없는 살인 기계 같네요.
-아니. 꼭 그렇지만도 않다.
-그렇지 않다고요?
-그래. 오히려 그 남자는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무르다. 겉으로는 냉정함을 둘러대면서도 정에 약하고, 딱딱하게 말해도 타인의 입장을 깊게 생각하지.
-전에 하셨던 말씀과는 앞뒤가 안 맞는 거 같습니다만.
-그렇기에 그 남자는 살인 기계가 아니라 사람이다. 사람은 누구나 저마다의 모순과 이면을 안고 살기 때문이지. 내가 너를 뽑은 것도 그런 이유고.
-절 말입니까?
-기사로서 뛰어난 실력을 지녔음에도 기사도는 눈곱만큼도 없고, 정의를 실현하고자 하면서도 손에 다른 자의 피를 묻혀야 한다면 그리하지 않느냐.
아일린은 그렇게 말하며 자신을 떨떠름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파시우스를 향해 씨익 웃었다.
-그래서 후임으로 너를 뽑은 것이다. 아주 제격이었거든. 감사하도록.
-……전혀 칭찬 같지 않은데요.
과거의 회상을 끝낸 파시우스는 루드거의 모습과 1황녀의 말을 떠올리며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날 그는 아일린 1황녀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루드거 ‘선생님’.”
“유독 선생님이라는 부분에 힘을 주시는군요.”
“제가 그랬나요?”
“됐습니다. 지금은 서로 말씨름할 시간이 없으니까. 방금 어떻게 할 거냐고 물었죠? 우선 저 아이에게서 정보를 얻을 생각입니다.”
“얻으면?”
“움직여야죠. 한시가 바쁩니다.”
루드거는 파시우스와 함께 레오가 말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레오는 루드거와 함께 있는 처음 보는 금발 미남자를 경계했지만,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따지지 않고 자신이 아는 것을 모두 털어놓았다.
해방군은 간악하게도 레오에게도 모든 정보를 다 전해 주지는 않았다.
평소에 레오가 협조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았기에 그들도 일부 중요한 정보는 공유하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레오가 알고 있는 것이 마냥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었다.
지상에 있는 놈들의 아지트, 그리고 그곳을 중심으로 곧 벌어질 테러까지.
“하지만 조심하셔야 할 부분이 있어요.”
“뭐지?”
“분명 테러 대상자는 세오른 학생이 맞지만, 그들은 멘토들까지 노리는 것 같았어요. 멘토들의 실력을 생각하면 쉽게 당하지 않을 텐데도 자신 있다는 듯 구는 걸 보면 분명 무언가 있다고밖에…….”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놈들이 뭘 하려는 건지는 이쪽도 충분히 짐작이 가니까.”
아마 마력에 영향을 받지 않는 특제 화약을 활용할 생각이리라.
아무것도 몰랐다면 6위계 마법사라도 당할 수밖에 없지만.
알고 있다면 그때는 위험하지 않게 된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레오, 너의 가족은 지금 이 수도 어딘가에 있는 거겠지?”
“……네.”
레오는 침중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레오의 가족은 지금 수도 린데브루뉴에 있었다.
그들이 오고 싶어서 온 것이 아니라, 해방군이 일부러 레오의 가족을 이곳까지 데려온 것이다.
‘멀리 떨어진 시골 같은 곳에 있다면 해방군 측도 가족을 처리하라고 신호를 보내는 것이 오래 걸릴 테니, 일부러 가까운 곳에 두고서 협박해 장기 말로 부리려는 거로군.’
조금이라도 허튼짓을 한다면 가족의 안위는 보장할 수 없다는 사실을 계속 상기시키려고 한 셈이다.
“하지만 놈들의 그 행동이 오히려 이쪽에 도움이 되었군.”
“네?”
“가족이 멀리 있다면 그곳까지 가는 데 시간이 걸리겠지만, 오히려 수도 안쪽이라면 일 처리가 빨라지니 좋다는 소리다.”
루드거는 그렇게 답하며 파시우스를 바라보았다.
“대신 처리해 주셔야겠습니다.”
“저 말입니까?”
“예. 파시우스 경이 이 상황에서 가장 적임자일 테니까요.”
“루드거 선생님. 아시겠지만 저는…….”
“이 또한 업무의 연장선입니다. 그리고 들으셨다시피 지금 레오의 가족 옆에는 해방군이 붙어 있습니다. 어중간한 자라면 몰라도 상대는 상당한 실력자라고 하더군요.”
해방군도 레오를 견제하는 이상, 최소 수준급 마법사가 도우러 올지 모른다는 계산을 해 놓았을 것이다.
레오를 마냥 무시하기엔 그가 지닌 세오른 입학생이라는 자리는 크니까.
어떻게든 이 협박 가능한 상황을 이어 나가려 할 테고, 당연히 레오의 가족 곁에는 실력자가 붙어 있으리라.
“저는 가족을 보호하면서 싸울 수 없습니다. 하지만 파시우스 경은 다르죠. 대인전의 스페셜리스트 아닙니까.”
파시우스가 ‘그건 당신도 마찬가지 아닙니까?’라고 따지려 했지만, 에이단과 레오를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표면상 루드거는 세오른의 교사다.
그 사실을 파시우스가 까발리는 일은 있으면 안 됐다.
애초에 1황녀의 명령 중 하나가 혹시라도 루드거가 위험해지면 그를 도우라는 것이 아니었나.
진퇴양난. 결국, 파시우스는 억울해도 루드거가 시킨 대로 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게다가 루드거의 말이 마냥 틀린 것도 아니었다.
인파 속에 숨어서 누군가를 기습하기에 적합한 것은 당연히 마법사보다는 기사다.
그 기사가 기습이라는 것을 기피하지 않으며, 심지어 초인급 육체 능력을 지닌 마스터급 기사라면 더더욱.
“저는 그렇다 쳐도, 루드거 선생님은 뭘 하실 생각입니까?”
“정해지지 않았습니까.”
루드거는 별거 아니라는 투로 답했다.
“지상에 있는 해방군을 소탕할 겁니다.”
* * *
“결국, 우려하던 일들이 벌어졌군.”
해방군들이 머무는 비밀 지부.
그곳에서 굳은 얼굴로 대기하고 있던 사람 중 누군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누구도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만큼 상황이 좋지 않아서였다.
“3번 지부가 걸렸다고 합니다.”
“5번 지부와 17번 지부도 마찬가지입니다.”
좋지 않은 소식들이 계속 들려왔다.
그것은 콜드스틸 기사단과 나이트크롤러 기사단이 본격적으로 활약을 하고 있으며, 언젠가 그들의 목줄을 좁혀 올지도 모른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아직 괜찮다. 지금 습격당한 지부도 전부 허수아비를 내세운 미끼에 지나지 않아.”
해당 지부 총괄 관리자이자 1급 요원인 칼이 그렇게 말했다.
그가 표정이 굳었을지언정 침착함을 잃지 않은 것이 바로 그런 이유였다.
해방군도 마냥 제국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리라는 희망적인 관측을 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분명 움직일 것이고, 실제로 제국의 3대 기사단 중에서 무려 둘이나 불러왔다.
저들 또한 해방군의 행적을 대략적이나마 알아차렸다는 뜻.
그렇기에 이쪽은 일부러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가짜 지부를 여럿 설립해서 저들의 시선을 교란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칼에게도 마냥 불안한 요소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어차피 이것은 시간 벌기에 불과해. 놈들은 분명히 눈치챘겠지. 증오스러운 적들이지만, 제국의 엘리트다. 곧바로 이쪽의 본체를 노리고 올 거야.’
그러기 위해서는 이제 이쪽도 결사 항전의 뜻을 비치기 위해서 준비해야 했다.
칼이 눈짓을 주자 대기하고 있던 부하들이 각자 무기를 점검했다.
자동 소총에 고폭탄. 화약 냄새가 물씬 나는 화기류들.
평범한 사람에겐 지나칠 정도의 무기들이지만, 상대가 기사나 마법사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하지만 해방군들은 전부 자신이 있었다.
그들이 사용하는 이 무기는, 절대 평범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런 무기이기에 상대방을 더욱 방심시키는 데 최적이었다.
“각 조는 지하 수도를 통해 주어진 장소로 이동한다. 만약에 문제가 생긴다면 최대한 1명이라도 더 데려갈 각오로 임해야 한다.”
칼의 명령에 해방군 요원들이 비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이었다.
아지트의 한쪽 벽이 폭발했다.
비산하는 나무판자와 벽돌 가루. 거기에 휩쓸린 일부 해방군들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대낮임에도 빛이 잘 들어오지 않아 어두웠던 실내에 갑자기 빛이 쏟아지듯 들어왔다.
그리고 무너진 벽, 대낮의 새하얀 빛을 등지고서 모습을 드러낸 남자가 있었다.
대부분 해방군은 갑작스러운 기습에 어리둥절해 할 때, 유일하게 칼만이 그 남자를 알아보고 눈을 부릅떴다.
“루, 루드거 첼리시!”
세오른의 교사가 대체 왜 여기에?
칼은 곧바로 레오의 얼굴을 떠올리고는 얼굴을 굳혔다.
그 순간 루드거의 시선이 칼에게 닿았다.
“너로군.”
그의 입가에서 나온 싸늘한 목소리가 칼의 몸을 뱀처럼 휘감았다.
“내 학생을 협박한 쓰레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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