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UA - 292화 제국의 황제 (2)
◈ 292화 제국의 황제 (2)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루드거는 황제를 향해 올바른 예법을 보였다.
에렌디르는 루드거가 저렇게 극진히 행동하는 것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적어도 그녀가 아는 루드거 첼리시는 황제를 넘어 신이 강림한다 해도 고개를 숙이지 않을 사내였다.
반대로 아일린은 조금 기분이 상한 눈빛으로 루드거를 못마땅하게 응시했다.
이 남자가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에게 무릎을 꿇는다는 것이 적잖게 기분이 나빴다.
그 상대가 설사 자신의 아버지라 하더라도 말이다.
한쪽은 경악, 한쪽은 짜증.
두 딸이 그러거나 말거나 황제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곳은 황실이 아니네. 그러니 그런 과한 예법은 오히려 나를 곤란케 만드는군.”
“알겠습니다.”
루드거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신을 향하는 무표정한 얼굴에 황제는 화를 내기는커녕 오히려 흥미를 품었다.
행동은 극진하되, 그 눈빛에는 어떠한 복종의 의지도 깃들지 않았다.
‘실로 굳건한 사내로다. 게다가 루드거를 향하는 두 딸의 상반된 반응이 궁금하기도 하고.’
“이런. 내가 영웅을 너무 오랫동안 붙잡아 뒀군. 고생도 많이 했을 텐데 휴식이라도 취해야 하지 않겠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만,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그건 힘들 것 같습니다.”
키메라들은 물러났으나 아직 수도에서 벌어진 테러 사태는 끝나지 않았다.
이 자리의 모두가 느끼고 있던 바이기도 했다.
사람들은 다시금 지휘 막사 안으로 돌아왔다.
이번에는 루드거도 함께였다.
루드거는 막사 내부를 둘러보았다.
그를 알아본 베로니카가 눈인사를 건네 왔고, 그 옆에 서 있는 테리나는 루드거를 의문스러운 시선으로 응시했다.
다른 곳에는 멘토와 마법사들이 더러 모여 있었다.
그들은 루드거가 멀쩡히 살아서 돌아오다 못해 수많은 시민을 구출했다는 사실에 꽤 놀란 눈치였다.
놀란 사람 중에는 황실에 있어야 할 인솔 교사들도 더러 있었다.
1학년 인솔 교사들은 아직 황실에 있었으니, 이 자리에 있는 것은 2학년 교사.
의외로 루드거에게 익숙한 얼굴인 크리스 베니모어가 있었다.
‘사람이 많군.’
하나같이 전부 쟁쟁한 자들로만 모여 있었다.
특히 가장 시선을 잡아끄는 것은 황제의 곁을 지키듯 서 있는 거구의 남성이었다.
‘기도는 야수 같은데, 첫인상은 그야말로 한 자루의 검이로군.’
얼굴은 처음 보지만, 저 정도로 특색이 있는 사람이라면 떠오르는 자는 오직 하나다.
로열가드의 수장 루터스 워도트다.
그는 다른 강자처럼 기운을 대놓고 드러내지 않았다.
오히려 기세를 놀라울 정도로 깔끔하게 갈무리해서, 모르는 사람이 보았더라면 그저 덩치만 크고 인상이 험악한 아저씨라고 착각할 정도였다.
하지만 아는 사람의 입장에선 그렇기에 굉장한 것이었다.
이 자리에 모인 자 중에 실력에 하자가 있는 사람은 없다.
최소한 당장에 모일 수 있는 최고의 전력이 온 것이니까.
그 자리에서 아무런 기세도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은, 오히려 실력이 너무 뛰어나 기운을 완벽히 갈무리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덩치는 판토스에 비해 조금 작지만, 오히려 더 압축된 느낌이라 우열을 가리기 힘들군.’
루드거는 레더벨크에 남아 있는 판토스를 떠올리며 루터스와 비교를 해 보았다.
현 제국 최강의 검과 비교하자면 판토스는 아직도 많이 부족했다.
하지만 판토스는 실전을 겪으며 꾸준히 강해지는, 종자부터가 수인족의 대영웅이라 불릴 만한 존재.
‘지금은 무리겠지만, 아마 경험이 더 쌓인다면…… 이런.’
거기까지 생각하던 루드거는 루터스가 자신을 바라보는 걸 깨닫고 자연스럽게 시선을 돌렸다.
아무래도 생각이 깊어지다 보니 너무 뚫어지게 바라본 것 같았다.
아니면, 이쪽의 노골적인 시선에 무언가를 느낀 것일지도 모르고.
이럴 때는 뻔뻔하게 잡아떼는 것이 최선이기에 루드거는 루터스의 시선을 최대한 무시했다.
막사에 모인 수뇌부들은 앞으로 어떻게 할지에 대해서 토론했다.
“우선, 이대로 방어선을 구축해서 피해 확산을 막아야 합니다.”
“그러면 너무 늦습니다. 지금 놈들이 지하에서 무슨 짓을 또 벌이려는지 모르지 않습니까.”
“그러면 어떻게 하자는 겁니까?”
“이쪽이 먼저 쳐들어가야 합니다. 반격하는 거죠. 지하에 있는 놈들을 모두 소탕하는 겁니다.”
“지하에 대체 뭘 어떻게 해 놨는지 모르는데, 무턱대고 가자는 겁니까? 함정이라면요?”
“이 자리에 모인 자들은 제국에서 어딜 가도 꿀리지 않는 실력자들입니다. 고작 해방군 따위가 파 놓은 함정 따위에 걸릴 것 같습니까?”
신중을 기하자는 쪽은 마법사들이었고, 반대로 공격적으로 밀고 나가자고 하는 쪽은 기사들이었다.
물론, 기사들의 우두머리라 할 수 있는 베로니카와 테리나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마법사와 기사들 사이에서도 의견은 갈렸으니까.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내가 한마디 해도 되겠는가?”
그때 입을 연 것은 지금까지 가만히 있던 아일린 1황녀였다.
가만히 지켜만 볼 줄 알았던 아일린이 입을 열자 사람들은 꽤 당황한 눈치였다.
반대로 아일린의 성격에 대해서 알고 있는 테리나는 눈을 슬며시 감으며 ‘슬슬 시작이군’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방금 고작 해방군 따위라 말했던 그대의 이름이 무엇이지?”
“……나이트크롤러 기사단의 에릭이라고 합니다.”
“그래, 에릭. 경의 의견은 충분히 공감한다. 하지만 아직 부족하다.”
소문의 1황녀가 직접 나서자 에릭은 입을 다물었다.
아일린은 자연스럽게 발언권을 손에 쥐고 휘둘렀다.
“모두가 알다시피 해방군 놈들은 예전과 다르게 자신들만의 무기를 준비했다. 가장 대표적으로 마력에 영향을 받지 않는 화약이 그러하지.”
그 말에 세오른의 멘토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해방군과 가장 먼저 충돌한 것이 그들이기에 화약의 효과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 대응법을 알았으니 상관없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바꿔 말하면 놈들이 그것 말고도 또 얼마나 많은 수단을 준비했는지 모른다는 거다. 당장 키메라만 해도 그렇다. 수도의 지하에 그 정도의 키메라들을 증식시키고 있었지.”
“하지만 막아 내지 않았습니까?”
그 말에 대답한 것은 수도의 방위를 책임지는 위병대장이었다.
“물론이다. 위병들은 제 역할을 다했고, 기사단과 여기 있는 마법사들도 최선을 다해 싸웠지. 벌어진 일의 규모를 감안하면 피해는 기적적으로 적다. 기록으로 남겨야 할 정도야.”
모두가 그 말에 조금 들뜬 마음을 품은 순간.
아일린이 찬물을 끼얹었다.
“하지만 적들의 수단이 여기서 끝이라고 어떻게 확신하지?”
“그것은…….”
“놈들이 사용한 그 특이한 화약조차도 이 자리의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다.”
이번 결과를 좋게 말을 하는 듯하면서도 중요한 순간 분위기를 전환한다.
아일린의 말은 신묘했다.
상대방의 반발을 생각해서 그들의 역할과 입장을 존중하면서도 자신의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그러면서 단순히 권위로 찍어 누르는 것이 아니라 그 말에는 나름의 합리성까지 담겨 있었다.
“경들도 생각을 해 보도록. 만일 그대들이 해방군, 혹은 그들과 손을 잡은 흑마법사라라면 고작 키메라를 이용하는 거로 모든 일을 끝냈다고 할 것인가?”
그 말에 누구도 함부로 대답하지 않았다.
권위의 앞에 무릎을 꿇은 것이 아니다.
그들 또한 비슷한 생각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다만, 적들의 수준이 자신들을 위협할 수 있을 리가 없다고 애써 외면했을 뿐.
아일린은 그런 환상을 정면에서 깨부쉈다.
“고작 키메라 군세로 수도를 위협에 빠뜨렸다고 생각하는 적들이라면 상종조차 할 필요가 없는 머저리들이겠군. 하지만 내가 보기엔 놈들은 머저리가 아닌 것 같단 말이지.”
키메라들을 무턱대고 쏟아붓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다시금 지하로 후퇴시킨 것만 봐도 그렇다.
놈들에겐 계획이 있다.
그리고 제국에 타격을 줄 또 다른 수단을 지닌 것이 분명했다.
“때마침 이 자리에는 당장 기용할 수 있는 제국의 최고 전력들이 있다. 수도의 위병들, 경찰, 고위계 마법사, 3대 기사단, 로열가드까지.”
그러고는 루드거를 힐끔 바라보며 말했다.
“그리고 세오른의 교사들도 있지.”
보통 이 정도의 명단에서 세오른의 교사는 아무리 명성이 높다 해도 그들에 비할 바는 아니다.
하지만 아일린이 루드거를 인정해 주었고, 루드거 또한 생환자들을 대거 살려서 왔다는 점에서 충분히 대접을 받을 만했다.
덕분에 약간 불안한 표정으로 한쪽 자리를 차지하던 세오른의 2학년 교사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황녀님께서는 생각하시는 바가 있습니까?”
그때 가만히 듣고 있던 테리나가 질문을 던졌다.
“테리나 라이언하울 단장. 그건 무슨 의미이지?”
“말 그대로입니다. 보아하니 황녀님께서는 아직 적들의 공세가 끝나지 않았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군요.”
테리나가 갑자기 황녀의 말에 저렇게 나서는 것은 얼핏 불경하게 비쳤다.
실제로 다른 사람들은 조마조마한 시선으로 둘 사이를 응시했지만 루드거는 다르게 봤다.
‘아닌 척하면서 훌륭한 지원이로군.’
테리나는 아일린의 의견에 힘을 주기 위해 일부러 본인이 나서서 대신 부정적인 질문을 던진 것이었다.
사전에 합의가 된 행동은 아니었지만, 합이 잘 맞는 걸 보면 전부터 자주 이런 식으로 담화를 나눴음이 분명했다.
루드거의 추측대로 아일린은 만족스럽게 눈을 빛내며 입을 열었다.
“좋은 질문이다. 경들이 생각하기에 과연 키메라 정도로 이 자리에 있는 자들을 어떻게 해 볼 수 있다고 생각하나? 제국의 자랑이라 할 수 있는 그대들이, 고작 키메라에 무너질 것 같은가?”
그 말에 모두가 고개를 저었다.
키메라는 분명 위협적이었고 숫자도 많았지만, 이 자리의 전력에는 발끝에도 못 미쳤다.
“그럼에도 놈들은 자신들의 전력을 희생시키고, 심지어 키메라를 투입했다. 그 의도가 뭐라고 생각하나?”
“이쪽을 일거에 쓸어버릴 수 있는 수단이 있군요.”
그 말에 멘토들이 모인 자리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사람들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한곳으로 향했다.
대해양의 푸른 물결 같은 머리를 찰랑이며 케이시 셀모어가 앞으로 나왔다.
아일린의 눈동자에 흥미가 깃들었다.
“그대가 케이시 셀모어로군. 셀모어 가의 둘째 여식이라 했던가.”
“그리고 명탐정이죠.”
그 도전적인 말투에 아일린의 입가에 즐겁다는 듯 미소가 맺혔다.
자신의 앞에서 이렇게 당당하게 나서는 사람이 흔치 않아서였다.
케이시 또한 흔들림 없는 시선으로 아일린을 응시했다.
일순 그 눈동자가 루드거를 스치듯 지나갔지만, 워낙 찰나라 누구도 알아보지 못했다.
“그래 명탐정 케이시 셀모어 양. 혹시 생각하고 있는 것이 있나? 아니면 추리를 했다거나.”
“키메라는 전부 눈속임일 거예요. 해방군 잔당을 이용한 습격도요. 그들이 바보가 아닌 이상 이 자리에 모인 전력을 모를 리가 없죠. 고작 키메라로는 흠집조차 낼 수 없어요.”
“그렇다면?”
“무언가 더 있는 거예요. 이 정도의 사람들을 상대로도 충분히 승리를 쟁취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단이. 단순한 추측이 아닌 확신에 가까울 정도로요.”
“그렇다면 놈들은 우리가 이렇게 모일 걸 알고 있다는 거로군.”
“오히려 그걸 바란 거죠. 그리고 그걸 노리고 지하에서 무언가 일을 꾸미고 있을 테고요.”
케이시의 말은 증거도 없고 비약이 심했지만, 심증으로는 그럴싸했다.
루드거 또한 그녀의 말에 내심 공감하고 있었다.
‘그 말대로야. 해방군 놈들은 지하에서 무언가를 꾸미고 있어. 특제 화약과 키메라 또한 눈속임과 시간 끌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거지.’
다만,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는 건데.
그건 루드거도 아직 자세히는 몰랐다.
지하에 보냈던 한스와 벨라루나가 정보를 가져와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터.
‘그 둘의 실력을 생각하면 슬슬 올 때가 됐는데.’
루드거가 시간을 계산하고 있을 그때였다.
막사의 문이 열리며 금발의 미청년이 안으로 들어왔다.
파시우스였다.
‘왔군.’
루드거는 드디어 기다리던 것이 도착했음을 직감했다.
모두의 시선이 파시우스를 향했다.
일부는 그를 알아보지 못했지만, 그보다 더 많은 사람이 파시우스를 알아보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 또한 로열가드의 자랑스러운 일원이자 마스터급 기사였으니까.
반면에 케이시는 다른 의미로 그를 알아봤다.
“이런, 제가 좀 늦었나요?”
파시우스는 자신에게 날아오는 무수한 시선을 마주하면서도 푼수처럼 미소 지었다.
그는 이윽고 황제를 보더니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다른 사람이라면 무릎을 꿇어야 하겠지만, 로열가드에겐 황제에게 약식으로 예우를 표현하는 것이 허락되어 있었다.
이윽고 파시우스는 아일린에게 가져온 종이를 하나 건넸다.
“황녀님.”
“수고했다.”
아일린은 파시우스가 건네준 종이를 쓰윽 읽더니, 그것을 곧바로 막사 중앙 테이블 위에 놓았다.
모두의 시선이 테이블 위로 모였다.
자연스럽게 현 상황을 아일린 1황녀가 주도하는 꼴이 됐다.
정작 황제인 아우비스타스는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수뇌부들은 거기서 황제가 1황녀를 밀어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놈들이 지하에 거대한 시설을 만들었다고 하는군.”
“시설 말입니까?”
베로니카 부단장이 물었다.
“그래. 그 정도의 키메라를 만들 정도라면 거대한 배양 시설이 필요하겠지. 만들었다 해도 이상할 건 없다.”
“하지만 지하에 그만한 공간이…….”
“있다. 제국의 역사는 길지. 오랫동안 지하에는 수로를 수리 보수하며 확장해 나가다 버려진 구역이 존재한다.”
아일린 1황녀는 지하 수로 아래에 있는 공간의 세세한 정보는 드러내지 않았다.
거기까지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어서였다.
“아마 그곳에서 시설을 만들어 오랫동안 준비해 온 거겠지.”
“하지만 그만한 키메라를 배양하려면 시설뿐만이 아니라 막대한 재료도 필요합니다. 그만한 재료를 오랫동안 수도에서 공수해 왔다는 것은…….”
경비대장이 말하려 하자 아일린이 손을 내밀어 그 말을 차단했다.
“이해한다. 수도의 경비대와 경찰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처럼 비칠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장담컨대 그대들은 자신의 책무를 다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예?”
“놈들은 애초에 키메라 배양의 재료를 바깥에서 공수하지 않았다. 아니, 그럴 필요가 없었지.”
“그렇다면…….”
“지하 시설 내에 놈들이 사용하고도 차고 남을 재료가 존재한다더군.”
“그게 대체 뭡니까?”
모두가 아일린의 다음 대답에 귀를 기울였다.
아일린은 그들을 향해 자신이 알아낸, 충격적인 진실을 알려 주었다.
“세계수다.”
“세계수, 말입니까?”
“그래. 지하 깊숙한 곳에 파묻힌,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죽은 세계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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