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UA - 293화 공유되지 않는 비밀 (1)
◈ 293화 공유되지 않는 비밀 (1)
세간에 알려진 세계수는 엘프들이 섬기는 나무라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오래된 구닥다리 전설이었다.
학계에서는 세계수를 아주 먼 시대부터 이 땅에 존재하던 고대종의 묘목이 살아남은 것이라고 결론을 내린 지 오래였다.
물론 그렇다 해도 세계수의 존재가 예전에 비해서 낮아진 것은 아니었다.
한 그루의 나무가 숲 하나를 뒤덮을 정도로 거대하게 자라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 경이로운 일이니까.
하물며 일반적인 나무와 다르게 지력을 거의 소모하지 않으며 오히려 생명력을 부여하고, 평범한 나무와 달리 불에 타지도 않는다면 더더욱.
그래서 엘프들은 여전히 이런 세계수를 신성시했고, 인간들은 그런 세계수를 연구하고자 했다.
그런데 세계수가 죽어 있다고 해도 하필 제국의 지하에 존재하다니.
모두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아일린 1황녀를 향했다.
마치 이게 어찌 된 일인지 어서 말해 주길 바라는 반응에 아일린은 즐겁다는 듯 웃었다.
“다들 나에게 대답을 바라는 눈치다만, 애석하게도 내가 아는 바는 그렇게 많지 않다. 나 또한 조금 전에 소식을 접했을 뿐이니까.”
“그렇다 해도 이상합니다.”
그렇게 말하며 나선 것은 얼굴에 철가면을 쓰고 있는 6위계 마법사, 철가면 로테론이었다.
“본디 세계수라는 것이 그렇게 쉽게 존재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물며 지하에서 자라는 것이라야 더더욱.”
“세계수라 한들 그저 나무일 뿐이다.”
“고대종 나무이지요. 세계수는 단순히 묘목을 땅에 심는다고 자라지 않습니다. 그에 걸맞은 환경과 까다로운 조건이 있어야 하죠. 그런데 지하에 세계수가 있다니, 어불성설입니다.”
“하, 하지만 또 마냥 불가능한 것은 아니에요.”
로테론의 말을 받은 것은 로이나였다.
그녀는 꽤 마력을 회복했는지 이전보다 한층 나은 혈색이었다.
“바, 바꿔 말하면 조건만 맞추면 재배가 가능하다는 소리니까요.”
“하지만 그게 지하에, 그것도 바로 수도의 아래에 있다는 것이 이상하다는 겁니다. 보통 나무가 자라면 땅을 뚫고 하늘을 향하는데, 그것은…….”
“그러니 죽어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나? 파시우스 경.”
아일린이 파시우스를 돌아보며 그렇게 물었다.
파시우스는 속으로 ‘저한테 떠넘기는 겁니까’라고 씁쓸하게 한탄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이런 역할을 맡기 위해 그가 이 자리에 있는 것이니까.
“예, 맞습니다. 적어도 제가 알기론 죽은 세계수가 분명했습니다.”
모두가 파시우스의 말에 탄성을 흘렸다.
로열가드인 그가 거짓말을 할 일은 없으니, 그 말은 분명 진실일 것이다.
실제로 파시우스의 말은 진실이었다.
다만, 숨겨진 내막이 있다는 것을 저 사람들은 모를 뿐이었다.
일련의 사태를 지켜보는 루드거는 내심 만족했다.
‘한스가 제대로 정보를 전달해 줬나 보군.’
루드거가 사람들을 구하러 가기 전.
그는 파시우스와 헤어지기 전에 한 가지 전달 사항을 말했다.
-파시우스 경.
-예. 말씀하시죠, 루드거 씨.
-사태가 끝나면 이 상황을 정리하기 위해 사람들이 많이 모일 겁니다. 그리고 지하 수로 안쪽에서 해방군 놈들이 무슨 짓을 하는지 알아내고자 하겠죠.
-그렇겠죠?
-지하에 제 부하를 보냈습니다. 언행은 믿음직스럽지 않지만, 실력은 믿을 수 있으니 아마 곧 소식을 물고 올 겁니다.
-호오. 그렇군요. 어디서 누구를 만나면 되죠?
-중앙광장 근처의 거주 구역 3번가. 남자 1명에 여자 1명입니다.
-그거로는 특징이 안 잡히는데요.
-워낙 특이한 조합이라 눈에 띌 겁니다. 특히 여성 쪽이요.
루드거는 그렇게 말하면서 뒷말을 덧붙였다.
-게다가 그쪽의 실력이라면, 굳이 제가 말하지 않아도 잘 알아낼 거라 믿습니다.
루드거의 말은 과연 사실이었다.
거주 구역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자니, 두 남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남자 쪽은 어딜 가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인상이었다.
하지만 마스터급 기사인 파시우스의 예리한 감각은 그 남자로부터 풍겨 오는 묘한 짐승의 체취를 감지했다.
그리고 반대로 여성은 사람의 시선을 확 잡아끌었다.
미인도 미인이지만, 특유의 분위기가 있는 엘프였던 탓이다.
루드거가 호언장담한 대로 보자마자 알 거라는 말이 사실이었다.
파시우스는 곧바로 두 사람과 접촉을 하고, 루드거의 이야기를 하며 그들로부터 알아 온 정보를 대신 받아 왔다.
전부 서로 간에 합의된 것을 전제하에 이뤄진 일이었다.
루드거로서는 자신이 정보를 알아내는 것보다는, 로열가드인 파시우스가 알아냈다고 하는 쪽이 훨씬 편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는 일개 교사의 신분이었으니까.
즉, 루드거가 시켜서 한스와 벨라루나가 알아낸 정보를 파시우스가 대신 받아 아일린이 설명한다는.
그야말로 족보가 이상할 정도로 꼬인 정보 전달 방식이었지만, 루드거는 결과만 좋으면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실제로도 잘 먹혔고.
“파시우스 경. 그게 정말입니까?”
“죽은 세계수라니.”
파시우스는 자신에게 향하는 의문 가득한 시선에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예. 일반적인 세계수가 아니었습니다. 말 그대로 죽어서 색이 상아색으로 변색되었고, 기둥은 없고 거의 뿌리와 밑동밖에 남지 않았죠. 물론 추측에 불과합니다.”
다만, 지하 수로 벽을 부수고 튀어나와 있는 세계수는 분명 진짜였다.
파시우스는 자신이 전해 들은 이야기를 마치 본인이 직접 본 것처럼 실감 나게 설명했다.
명예와 진실을 숭고하게 여기는 기사, 그것도 로열가드로서 보일 수 없는 행동이었지만.
그렇기에 사람들은 파시우스의 말을 진심으로 믿었다.
“죽은 세계수라. 하지만 아무리 죽었다 해도 세계수라면 그 내부에 막대한 생명력을 품고 있을 테니.”
“배양 시설만 있다면, 그 정도로 막대한 물량의 키메라를 만드는 것은 마냥 불가능한 것도 아니로군요.”
“그렇다면 큰일입니다. 놈들이 그 세계수로 또 무슨 짓을 할 줄 알고요.”
이제 해방군이 이쪽을 위협할 수 없다가 아니라, 그들이 또 무슨 일을 꾸미고 있을지를 걱정해야 했다.
“파시우스. 그 밖에 알아낸 다른 사실은 있나?”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던 루터스 단장이 물었다.
“예, 단장님. 현재 지하 수로는 놈들이 장악한 터라 그야말로 키메라의 밭입니다. 그 밖에도 온갖 트랩과 요새화가 진행되었죠.”
“흐음. 함부로 들어갔다간 뼈도 못 추리겠군.”
“예. 하지만 가만히 놔두자니 놈들은 다시금 키메라의 물량을 보충해서 또 같은 일을 벌일 것입니다. 대체가 가능하다지만, 이쪽으로서도 썩 피곤한 일이죠.”
모두가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파시우스가 쐐기를 박았다.
“그 밖에도 흑마법사들의 존재 또한 위협적입니다. 그 정도의 키메라라면 흑마법사들의 숫자도 숫자지만 실력도 만만치 않을 겁니다.”
“으음. 해방군은 어느 정도 전력이지?”
“간부가 있을 겁니다.”
“해방군의 간부인가.”
고작 해방군의 간부라 해서 우습게 보일지도 모르지만, 또 그런 것은 아니었다.
해방군의 간부 중에는 6위계 마법사도 있었으니까.
“루이폴트겠군. 제국의 종군 마법사였다가 탈영을 했던 남자.”
해방군 간부 루이폴트.
성이 없는 부분에서 알 수 있듯 평민임에도 뛰어난 재능을 지녀 렉서러 등급에 오른 마법사였다.
보통 6위계 정도라면 어딜 가서도 대접을 받지만, 루이폴트는 자신의 상관을 살해하고 탈영했다.
그리고 그는 해방군에 투신해, 세계 곳곳에서 테러를 일삼아 왔다.
언제부터인가 소식이 뚝 끊겼다 싶었는데, 설마하니 수도의 지하에 숨어 있었을 줄이야.
그래서 이제 어쩌면 좋을지 방안을 떠올리려는 순간이었다.
“잠시만요.”
케이시 셀모어가 아직 할 말이 끝나지 않았다는 듯 그 푸른 눈동자로 한쪽을 응시했다.
자신과 마주 보고 선 아일린 1황녀가 아닌, 한쪽에 가만히 서 있는 루드거 첼리시를.
“루드거 첼리시 선생님에게 궁금한 것이 하나 있어요.”
이쪽을 빤히 바라보며 묻는 말에 루드거는 침묵으로 응대할 수 없었기에 입을 열었다.
“말씀하십시오.”
“제가 멘토 활동을 할 때, 루드거 첼리시 선생님께서는 저와 마주치셨죠. 옆에 로열가드 파시우스 경을 데리고요. 맞죠?”
케이시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루드거를 향했다.
마치 그 말이 진실이냐고 묻는 시선에 루드거는 속으로 혀를 찼다.
‘그때 마주한 일이 이렇게 돌아오는군.’
게다가 이쪽은 별일 없다고 일부러 넘기기까지 했다.
그러다 사건이 터졌으니 케이시 입장에서 따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예. 그렇습니다.”
루드거의 대답이 쐐기를 박았다.
주변 사람들은 루드거가 어째서 파시우스와 함께 움직였는지 의아한 눈치였다.
눈치가 빠른 사람들은 단순히 루드거가 파시우스뿐만이 아니라, 1황녀와 모종의 연관이 있다는 것까지 생각이 미쳤다.
“그렇다면 둘이 같이 움직였을 텐데, 왜 파시우스 경만이 정보를 가져온 거죠?”
케이시의 의문은 그거였다.
파시우스가 정보를 캐는 동안 그쪽도 뭔가 한 것이 있는 게 아니냐.
그런데 왜 그쪽은 가만히 있고, 파시우스만 떠드는 거냐.
그 말에 케이시 근처에 있던 멘토들도 의아해했다.
루드거는 그들에게 해방군의 테러 경고를 보냈다.
그들이 무슨 짓을 하려는지, 그리고 어떤 화약을 쓰는지도 전부 알아냈었다.
그렇다는 것은 사태가 벌어지기 전, 루드거는 파시우스와 함께 해방군의 잔당을 쫓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하지만 지금.
루드거는 침묵하고 있고, 모든 이야기는 파시우스의 입에서만 나오고 있었다.
그건 꽤 부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어느 한쪽이 공을 강제로 빼앗았다기보다는 다른 한쪽이 일부러 자신을 숨기려는 것이 아닌 이상에야.
“…….”
루드거는 말없이 케이시를 응시했다.
그녀는 이전과는 다르게 단호한 의지가 가득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정말 제대로 된 대답을 듣길 바라는 눈치였다.
굳이 이 자리에서 이 말을 꺼낸 것은, 개인적으로 따로 물어보면 루드거가 절대로 입을 열지 않으리라는 걸 알고 있어서이리라.
‘자리의 힘을 빌려서 내 입을 열게 하겠다 이건가. 흠, 어떻게 대답한다.’
루드거로서는 여기서 크게 관심을 받게 될 줄은 몰랐기에 조금 난처한 감이 없잖아 있었다.
하지만 변명을 할 거리는 넘쳤다.
이런 상황을 전혀 상정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니까.
루드거가 그 부분에서 잠시 시간을 두고 고민에 빠져 있을 때였다.
대신해서 입을 연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아일린 1황녀였다.
“내가 시켰느니라.”
“예?”
아일린이 대신 말하자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놀라서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이미 수도 내부에서 수상한 자들의 움직임을 읽어 냈다. 그렇기에 기사단을 불러서 도시를 순찰하게 했지.”
그 말에 베로니카와 테리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부족했다. 그래서 나는 다른 사람을 더 보내기로 했다. 그중 하나가 나의 충성스러운 기사 파시우스 경이었고, 나머지 하나가 루드거 첼리시 선생이었다.”
“어째서죠?”
케이시가 뾰족한 음성으로 물었다.
뭔가 따지는 것 같은 말투에 사람들이 당황했다.
아무리 명망 높은 마법사라 하지만, 제국의 황녀님에게 좀 많이 무엄하지 않나?
하지만 정작 아일린은 오히려 이런 상황이 흥미로워 죽겠다는 듯 입가에 미소마저 머금고 있었다.
“그가 가장 적임자였기 때문이다.”
“그는 일개 교사일 뿐입니다.”
“앞에 수식어들이 많이 빠졌구나. 너무 길어지니 따로 붙이지는 않겠지만 ‘능력 있는’ 교사라면 충분히 내가 제안을 할 만하지. 무엇보다 학생들이 위험할지도 모를 일이니, 최소한 세오른과 관련된 사람에게도 소식을 전할 필요가 있지 않은가.”
그 대상이 바로 루드거 첼리시였다.
그것도 일반적인 1, 2학년 담당 교사가 아니라 세오른의 기획처장의 자리까지 오른 남자.
일반 교사들에 비해 급이 훨씬 높으니, 아일린이 그에게 개인적으로 명령을 내렸다 해도 이상할 건 없었다.
다만, 케이시는 아일린이 말한 것이 이유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뭔가 있어. 두 사람 사이에 무언가가.’
케이시의 날카로운 직감이 루드거와 아일린 사이의 관계에 미약하게 이어진 실을 잡아냈다.
그러지 않고서야 로열가드를 옆에 붙여 줬을 리가 없다.
하지만 증거가 부족했다.
결정적인 단서라고 할 만한 것이 전혀 없었다.
저 두 사람은 철저하게 서로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었다.
여기서 더 캐묻는 것도 불가능한 일.
케이시는 괜히 억울해져서 루드거를 찌릿 노려보았다.
‘내가 뭘.’
루드거는 괜히 자신에게 돌아온 화살에 난처해했다.
정작 아일린은 그 행동에 그저 웃기만 했다.
아마 아일린은 이걸 알면서도 이쪽을 골탕 먹이기 위해 나선 것일 것이다.
겉으로 보면 루드거를 비호해 주며 자신이 시킨 일이라 말했지만, 그것은 계약에 따른 행동일 뿐.
이후 아일린이 진심으로 보인 행동은 케이시를 마주 보며 그녀의 속을 은근히 긁는 것이었다.
케이시가 루드거와 아일린의 사이를 의심하듯, 아일린 또한 케이시와 루드거 사이를 의심한 것이다.
‘정말 한순간도 방심을 못 하게 만드는군.’
과거의 신분으로 지녔던 인연이 이렇게 한자리에 모이니 골이 아파 오는 기분이었다.
그나마 둘뿐이라서 다행이려나.
‘생각해 보니 한 명 더 있었군.’
루드거의 시선이 테리나 라이언하울을 향했다.
자신이 괴도로 활동하던 시절, 이쪽을 죽이겠다고 아득바득 쫓아오던 기사.
그때는 단장도, 마스터급 기사도 아니었는데, 몇 년 사이에 실력이 일취월장해서는 매우 강해져 있었다.
이렇게 놓고 보니 참 불편한 자리구나 싶었다.
‘잠깐.’
루드거는 불현듯 한 가지 가능성에 생각이 미쳤다.
‘케이시 셀모어와 테리나 라이언하울은 서로 친구인 걸로 아는데.’
케이시 셀모어가 자신의 정체를 알아도 그것을 아직까진 바깥에 드러내거나 하지는 않았다.
아마 본인의 고집, 혹은 다른 모종의 이유 때문이리라.
하지만 친구인 테리나에게까지 과연 그 비밀을 숨기려 할까?
‘설마?’
루드거는 불현듯 등골이 오싹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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