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UA - 298화 세컨드 (1)
◈ 298화 세컨드 (1)
할 말을 잃은 채 벨라루나를 빤히 응시하는 루드거.
‘왜 그런 중요한 사실을 숨기고 있었지?’
벨라루나는 면목이 없다는 듯 루드거의 시선을 피했다.
그녀 스스로 생각해도 지금까지 이런 걸 숨기고 있었으니, 보통 잘못한 게 아니라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루드거의 시선이 피부를 뚫어 버릴 정도로 더욱 강렬해질 때쯤, 벨라루나는 문득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곧바로 지지 않고 루드거를 쏘아보았다.
‘아니, 그런데 저한테 그렇게 말할 처지가 아니잖아요.’
벨라루나도 엘프의 왕국에서 죄를 범하고 도망치듯 쫓겨났지만.
따지고 보면 루드거도 전적이 만만치 않지 않던가?
1황녀의 그림자이자 사람을 찢어 죽인다고 알려진 ‘잭 더 리퍼’.
세기의 사냥꾼이자 악몽의 밤을 종식시킨 ‘아브라함 반 헬싱’.
한 국가를 떠들썩하게 만든 범죄경 ‘제임스 모리아티’.
북부 왕국 내전을 종식시킨 전설의 용병 ‘마키아벨리’.
그 외에도 기타 등등.
이 중에서 사냥꾼과 용병의 신분은 나쁜 짓은 저지르지 않았다지만.
그러면 나머지 신분은?
심지어 지금 지닌 루드거 첼리시라는 신분도 거짓 신분에, 제국의 법을 어기는 위장취업의 당사자가 아닌가.
벨라루나가 한 짓은 분명 죄가 맞지만 루드거가 더하면 더했지 절대로 덜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걸 알기에 루드거 또한 자기도 모르게 움찔했다.
그러나 그는 더욱 부리부리한 눈매로 벨라루나를 쏘아봤다.
‘난 적어도 숨기지는 않았다.’
‘힉!’
적어도 이쪽은 동료들에게 자신의 패는 모두 공개했다는 것에 대해 면죄부를 주장하는 상황.
벨라루나도 그 부분에 대해서는 차마 할 말이 없었다. 겨우 긁어모은 용기가 다시금 산산이 흩어졌다.
‘자세한 이야기는 모든 일이 끝나고 다 해야 할 거다.’
‘……네.’
결국, 상황이 그렇게 정리되나 싶었는데 의외의 방해가 들어왔다.
“잠시.”
크리스가 날카로운 시선으로 루드거와 벨라루나를 한 번씩 훑어보았다.
“둘이서 지금 뭔가 서로 눈빛을 주고받는군. 혹시 예전부터 아는 사이였습니까?”
루드거를 향한 반말과 벨라루나를 향한 존대가 뒤섞인 말투.
특히 루드거를 노려보는 크리스의 눈빛이 어딘가 심상치 않았다.
루드거는 이 인간이 왜 이러나 싶다가도 당장에 무언가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위기감이 들었다.
“아는 사이는 아닙니다. 다만 이런 중요한 사실을 감추고 있었다는 사실에 어처구니가 없었을 뿐이죠.”
“루드거 첼리시 선생. 자네는 조금 더 타인의 입장을 헤아릴 필요가 있어 보이는군. 그런 눈빛으로 본다면 누구나 당신을 어려워할 테니.”
그게 댁이 할 말인가?
평소에 크리스가 무슨 말을 해도 태연하게 받아넘기던 루드거였지만, 이번만큼은 그러기 힘들었다.
크리스가 벨라루나와 연관된 이후로 묘하게 넘어가기 힘든 짜증이 묻어나고 있었다.
“무엇보다 황녀님께서 직접 추천해 준 엘프이시니, 별다른 문제는 없을 텐데?”
“…….”
생각해 보니 벨라루나를 소개할 때 그런 말을 했다.
그야말로 자승자박이 따로 없었다.
물론, 이건 전부 다 이런 일이 있었다는 걸 숨긴 벨라루나의 잘못이었지만.
“알겠습니다. 지금 중요한 건 아무래도 벨라루나 씨의 과거가 아니라 당장 눈앞에 있는 세계수의 뿌리니까요.”
벨라루나는 이 상황을 벗어날 수 있다는 생각에 기꺼워하며 입을 열었다.
“우선 정리하자면 이런 거예요. 저 죽어 있는 세계수의 뿌리 안에는 악마의 힘이 잠들어 있어요. 대체 누가 언제 어디서 저런 걸 집어넣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악마의 힘이 당장이라도 뿌리에서 튀어나오기 위해 발악하고 있다는 말이군요.”
“네. 그리고 아무래도 이곳에서 흑마법사들이 세계수를 연구하는 것도 아마 그 때문일 가능성이 커요. 저 힘을 이용하려고 하는 거겠죠.”
악마의 힘을 이용하려 하다니.
세 사람은 이 사안이 보통 심각한 일이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됐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단순한 추측에 불과하다.
뭔가 명확한 증거가 없다면, 이걸 다른 사람에게 말해도 믿지 않을 터.
그 순간 루드거는 팔랑이며 날아오는 자그마한 나비를 발견했다.
‘저건.’
루드거가 가볍게 손을 내밀자 나비가 그 위에 올라탔다.
이윽고 나비는 서서히 풀어지더니 자그마한 쪽지로 변했다.
‘세디나로군.’
그리고 세디나 혼자서 이 쪽지를 이곳까지 보낼 방법은 없을 테니, 필시 한스가 도와줬음이 분명했다.
루드거는 곧바로 쪽지의 내용을 빠르게 눈으로 훑었다.
한스가 말했던, 키메라를 통해 상황을 지켜본다는 말은 사실임이 밝혀졌다.
안쪽의 내용에는 키메라들을 통해서 무엇을 보았는지가 적혀 있었으니까.
‘키메라를 생산하는 배양 시설. 그곳에 존재하는 흑마법사들이 무언가를 연구하고 있다고 했지.’
이미 키메라를 대량으로 생산하는 흑마법사들이 또 무엇을 연구하려고 하는 걸까?
답은 이미 나와 있었다.
‘놈들은 정말로 악마의 힘을 이용해서 무언가를 해 볼 속셈이로군.’
악마의 힘이라 하니, 머릿속에 생겼던 의문이 한꺼번에 풀리는 느낌이었다.
어째서 해방군과 흑마법사들이 가망 없는 싸움을 걸었는지.
어째서 특제 화약과 키메라의 군단이라는 패를 들고도 그저 시간벌기에 들어간 것인지.
“……아무래도 저희는 빨리 복귀해서 이 사실을 알려야 할 거 같습니다.”
루드거의 의견에 크리스와 벨라루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사태의 심각성은 이 두 사람 또한 충분히 인지하고 있을 정도였다.
우선 막사로 돌아가서 그들이 무엇을 보았는지, 그리고 안쪽에서 흑마법사들이 무슨 일을 꾸미는지 알려야 했다.
시간은 꽤 걸릴지도 몰랐다.
하지만 적어도 당장에 개인이 판단하고 멋대로 일을 처리하기보다는, 최대한 다수가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는 것이 훨씬 더 나을 것이다.
“우선, 증거로 세계수의 샘플을 가져간다면 다들 믿어 줄…….”
루드거가 그렇게 말을 꺼내는 순간이었다.
쿠구궁───!!!
지하 공동 전체를 아우르는 거대한 진동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마치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흔들리는 지하 유적지에 루드거와 크리스, 벨라루나 모두가 당황하는 순간.
그들에게 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쿠웅!
세 사람이 왔던 통로 뒤편의 격벽이 내려가더니 돌아갈 길이 막히고 만 것이다.
단순히 길만 막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이 서 있는 주변 풍경도 바뀌고 있었다.
루드거는 그 변화하는 광경 속에서 비슷한 것을 떠올렸다.
‘이건, 미로?’
이 지하 시설 구조 자체가, 누군가에 의해 움직이는 미로였던 것이다.
이윽고 진동이 잦아들며 다시 안정이 찾아왔을 때, 세 사람이 서 있는 자리는 전혀 다른 곳으로 바뀌어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이 지하 공간 자체가 평범한 시설은 아니었나 봅니다. 원래도 미로처럼 복잡한 구조였지만, 설마하니 이렇게 움직이는 것이 가능할 줄이야.”
“그렇다면 이곳 자체가 말 그대로 구조가 바뀌는 시설이라는 건가?”
“그런 셈이죠. 그리고 이런 짓을 할 수 있는 놈들은 정해졌고요.”
“해방군과 흑마법사 놈들이군.”
“놈들도 바보가 아닌 이상 침입자가 들어왔다는 걸 알고 있을 겁니다. 그리고 고작 키메라 따위로는 처리할 수 없다는 것도요.”
“이렇게 우리의 탈출로를 막고 고립시켜서 상대할 생각인가?”
“최소한 제 생각으로는 그렇습니다.”
크리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분석조로 들어온 입장에서 이런 상황에 처하리라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탈출구는 없나?”
“지리도 모르는 이상 찾는 것조차 힘들겠죠. 아니면 놈들이 탈출구를 막았을 가능성도 있고요.”
“……빠져나갈 생각은 사실상 버려야 한다는 거로군.”
루드거는 가볍게 자신의 상태를 점검했다.
“이러면 차라리 잘됐습니다.”
“뭐가 말이지?”
“저쪽에서 알아서 이쪽이 취해야 할 수단을 막아 버렸으니, 이제 남은 방법은 하나 아닙니까.”
바깥에 나갈 수도 없고 통신도 먹통인 상황.
그리고 적들은 언제 갑자기 악마의 힘을 사용할지 모른다.
수도의 전력이 한곳에 모이는 걸 알면서도 저런 일을 저질렀다는 것은, 최소 악마의 힘이 수도 전체에 영향을 줄 정도는 된다는 뜻이리라.
“……미쳤군.”
크리스는 루드거가 무슨 말을 한 건지 알아들었기에 안경을 고쳐 쓰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 말에 자신은 하지 않겠다고 거절의 빛을 내비치지는 않았다.
그도 알았다.
어차피 여기서 물러설 길 따위는 없다는 것을.
상대방이 악마의 힘을 다루기 위해 무언가 꾸미고 있다는 걸 알았으니, 더더욱 이쪽도 적극적으로 나서서 막아야 했다.
“싸움이 자신이 없으시다면, 그건 저에게 맡기셔도 됩니다.”
루드거가 평소와 같은 어조로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크리스는 그 말뜻에 미묘하게 자신을 향한 질책과 비웃음이 섞여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날 우습게 보지 마라. 약제학이 전문일 뿐이지, 실전 전투를 못한다는 것은 아니니까.”
“그런 것치고는 마법제전에서 대련에 출전하지 않으셨던데 말이죠.”
“그건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서다. 이렇게 보여도 나는 어린 시절부터 혹독한 훈련을 받아 왔다. 다른 사람과 똑같이 평가하지 마.”
흔들림 없는 시선으로 루드거를 노려보는 크리스.
그 기세만큼은 당장에 싸움에 들어가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날카로웠기에 루드거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그쪽의 엘프 아가씨는 크리스 선생님이 최대한 열심히 지키십시오.”
“뭐?”
“싫으십니까?”
“……그럴 리가. 네가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레이디 벨라루나는 내가 지킬 거다.”
“크리스 씨……!”
벨라루나가 감동했다는 듯 크리스의 이름을 불렀다.
물론 벨라루나의 실력을 생각하면 크리스가 굳이 나서서 지켜 줄 필요는 없지만, 일단 명목상 그녀는 비전투원이기에 어쩔 수 없었다.
“그보다 괜찮나?”
“무엇이 말입니까.”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지 정했다 해도, 이곳은 놈들의 본거지다. 함부로 움직일 수 없어. 애초에 지형이 이렇게 바뀌는 곳이어서는 적들의 위치를 특정하는 것도 힘들고.”
무턱대고 이동했다가 또다시 지형이 바뀐다면 다시 길을 잃게 된다.
지나온 그 모든 과정이 물거품이 된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어쩌면 평생 같은 공간만 돌아야 할지도 몰랐다.
그러나 크리스의 걱정은 루드거가 가볍게 일축했다.
“크리스 선생님. 저기 있는 뿌리 보이십니까?”
“……나와 레이디 벨라루나가 연구하던 세계수의 뿌리가 왜?”
“방금 전 지형의 구조가 바뀔 때 없던 길이 생기고, 기존의 길이 사라졌습니다. 아마 이곳은 3차원적인 구조로 지형이 움직이는 시설일 겁니다.”
“그게 어떻다는 거지?”
“하지만 저기 있는 뿌리의 위치는 방금 그대로입니다. 그러니, 뿌리가 튀어나온 블록은 움직이지 못한다는 말이겠죠.”
“……!”
그 말에 크리스가 눈을 크게 떴다.
“과연. 세계수의 뿌리가 뚫고 나온 구간은 고정돼서 움직이지 못한다는 건가.”
“예. 그리고 이 뿌리를 방향을 추적한다면 놈들의 아지트를 찾아낼 수 있을 겁니다.”
이 지하 시설은 거대한 원판의 형태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 중심에 큰 공동이 있었는데, 추측건대 그곳이 아마 죽은 세계수의 핵심이 존재하는 곳으로 보였다.
중심에서부터 퍼져 나간 세계수의 뿌리가 곳곳까지 퍼지며 외벽을 부수며 시설을 장악했고, 그 때문에 시설은 일부만 움직일 수 있던 거겠지.
그러니 뿌리가 뚫고 나온 방향을 보고 따라간다면, 뿌리의 중앙에 닿을 테니 최소한 길을 잃을 일은 없다고 봐야 했다.
“하지만 우리가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 것처럼, 놈들도 우리가 뿌리를 통해 역으로 자신들을 찾아낼 수 있다는 걸 알 텐데.”
“예. 그 말 그대로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지형을 바꾸는 것은 사실상 무의미한 행동이 아닌 건가?”
“저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지만, 지금 보니 그런 것만은 아니로군요.”
“뭐?”
“앞을 보십시오.”
루드거가 말하자 벨라루나와 크리스도 뒤늦게 정면에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지하임에도 빛이 들어오는 긴 아치형 통로 너머에서 이쪽을 응시하고 있는 불청객의 모습을.
상대도 이쪽의 전력을 대략 짐작하고 있으니, 평범한 해방군을 보냈을 리가 없다.
그렇다면 해방군에서도 특히 실력이 있는 자들, 그 외에도 흑마법사들이 지원을 왔으리라.
뭐가 어찌 됐든 적은 절대 우습게 볼 상대가 아니었다.
“놈들도 위치를 바꾸는 것으로 막을 수 없다는 걸 알았기에 직접 찾아온 겁니다.”
루드거는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상태를 가볍게 점검했다.
몸 상태 양호.
마력 상태 양호.
그리고 컨디션 또한 양호.
“그러니 편하지 않겠습니까.”
루드거가 끝부분이 까마귀의 형태로 장식된 검은 긴 지팡이를 손에 쥐었다.
꿈틀대는 마력이 정갈하게 갈무리되며 지팡이에 담겼다.
“이쪽이 찾아갈 필요 없이, 알아서 찾아왔으니까요.”
서로 인사를 나눌 필요도 없이.
루드거는 곧바로 마법을 발현했다.
* * *
“이거 참.”
파시우스는 바뀌어 버린 내부 구조를 보며 허탈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길을 잃은 것은 아니었다.
지형이 바뀌었지만, 벽을 뚫고 나온 뿌리를 중심으로 한 지형은 고정되어 있다.
뿌리만 따라간다면 길을 잃을 일은 없었다.
다만, 지하 시설이 이런 식으로 움직인다고 하니 어이가 없던 것이었다.
이런 시설이 수도의 아래에 있다는 것도 놀라운데, 수백 년은 더 지났음에도 멀쩡하게 움직이다니.
‘대체 500년 전, 제국의 전대 왕국에서 무슨 짓을 한 거야?’
이게 그 말로만 듣던 고대인 어쩌고의 힘인가?
지금도 만들려고 시도한다면 가능하겠지만, 오래전 과학이 미처 발전하지 않은 시대에 이런 걸 만들었다고 하니 신기할 따름이었다.
파시우스가 그런 속 편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것과 다르게 함께 온 마법사인 철가면의 로테론은 그저 묵묵히 정면을 바라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이유는 별거 없었다.
지하 시설의 구조가 바뀐 뒤 정면에 적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로테론 경이라고 하셨죠?”
“편하게 그냥 로테론이라고 부르셔도 됩니다. 파시우스 씨.”
“그러면 그렇게 하죠. 그보다 저기 적들이 나타났는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선택권이라는 게 있겠습니까?”
로테론은 곧바로 전투 준비에 들어갔다.
“싸워야죠.”
그 호전적인 말에 파시우스는 피식 웃었다.
“그거 공감 가는 말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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