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UA - 316화 어둠 속의 길 (3)

 ◈ 316화 어둠 속의 길 (3)




루드거는 감았던 눈을 떴다.




고개를 드니 주변 풍경이 보였다.




참고서와 서적들, 펼쳐 놓은 문제집과 연필까지.




‘이곳은.’




어딘가 익숙한 풍경에 루드거가 무언가 이상함을 느끼려는 순간이었다.




“일어났니? 피곤했나 보구나.”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소년은 고개를 돌렸다.




자신의 좁은 방.




그곳의 침대에 누군가 앉아 있었다.




심약한 인상이면서도 인자한 분위기가 느껴지는 30대 중반의 남성.




소년은 그의 모습을 보자마자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아버지.”




“아버지? 어이구, 우리 아들이 다 컸네. 이제 아빠라고도 안 부르고. 그래서 공부는 잘되니?”




소년은 자신의 책상 위에 펼쳐진 참고서를 보고 뒤늦게 이게 무슨 상황인지 떠올릴 수 있었다.




공부하다가 깜빡 잠이 들었구나.




“네, 뭐. 그냥 열심히 하고 있어요.”




“그래. 아들이 의사나 과학자가 되겠다는데, 가족으로서 응원해 줘야지. 그래도 조금은 쉬엄쉬엄하렴. 지나치게 혹사해서 네 건강을 해칠까 걱정이구나.”




“아니에요. 그냥 깜빡 졸았을 뿐이에요.”




그렇게 변명 아닌 변명을 하며 연필을 다시금 손에 쥐었다.




곧 있을 시험에서도 1등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주말에도 쉴 생각 없었다.




그렇게 문제집에 시선을 고정한 채 풀이에 들어가려던 소년은 무언가 이상함을 깨달았다.




내가 왜 공부하려 했더라.




갑자기 떠오르는 사소한 의문.




굳이 생각할 필요도 없던 것이었지만, 소년은 이상하게 그 정답을 애타게 찾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래. 이루고 싶은 것이 있었다.




자신이 이렇게까지 열심히 공부하는 이유는 꿈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꿈을 갖게 된 계기는…….’




툭.




소년의 손에서 연필이 떨어지며 책상 위를 또르륵 굴렀다.




그것이 바닥에 굴러떨어지는데도 소년은 미처 잡을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렇구나.”




소년은 의자에서 일어나 아버지를 돌아봤다.




“이건 꿈이었어.”




“…….”




아버지는 인자한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소년은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무언가 말을 하려고 입술을 달싹였다.




하지만 끝내 그것은 언어로 화하지 못한 채 입 안에서 연기처럼 흩어졌다.




소년은 입술을 깨문 뒤 천천히 방문 앞으로 향했다.




그리고 문고리에 손을 얹는 순간, 아버지가 물었다.




“가는 거니?”




“예.”




소년은 문고리에 시선을 고정한 채 답했다.




“도와줘야 할 녀석이 있거든요. 그래서 가 봐야 해요.”




“그렇구나.”




소년은 말은 그렇게 했지만, 차마 문을 열지 못했다.




어쩌면.




여기서 아버지가 자신에게 조금 더 같이 있어 달라고 말해 주길 바라는 걸지도 몰랐다.




조금이라도 좋으니, 이야기를 나누자고.




꿈이니까 그 정도는 해도 괜찮지 않냐고.




문고리를 쥔 손에 힘이 풀렸다.




“아버지, 저…….”




“가렴.”




소년은 그 말에 눈을 크게 떴다.




떨리는 동공으로 아버지를 돌아보았다.




아버지는 이쪽을 대견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 광경에, 소년은 깨닫고 말았다.




못다 한 이야기는.




처음부터 할 필요가 없었다.




문고리를 쥔 손에 다시금 힘이 들어갔다.




“예. 가 보겠습니다.”




소년은 방문을 활짝 열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새하얀 공간이 펼쳐졌지만, 망설이지 않고 발걸음을 내디뎠다.




잘 가라는 인사는 필요 없었다.




이미 충분히 들었다.




어린 시절의 모습은 어느덧 루드거 첼리시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 * *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새까만 어둠 속.




끝없는 무의식의 심연.




그 까마득한 공허의 바닥은 새빨간 꽃으로 가득했다.




붉은 꽃은 아름답지만, 핏물을 머금은 것처럼 섬뜩함을 풍겼다.




플로라는 그 꽃밭에 다소곳이 누워 있었다.




“으음.”




플로라는 눈을 떴다.




상반신을 일으킨 그녀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기는……?”




몽롱한 눈동자는 이윽고 빛을 되찾았다.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깨달은 플로라는 한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그래. 나는 분명 그때…….’




검은 안개 같은 것이 땅의 틈새를 비집고 흘러나왔다.




그것이 의지를 품고서 리네를 노리려고 할 때, 그녀가 대신 앞에 나서며 공격을 막아 주었다.




그리고 안개에 집어삼켜진 뒤 시야가 암전되고.




눈을 떠 보니 여기였다.




“누구 없어요!”




플로라가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쳤다.




하지만 돌아오는 목소리는 없었다.




플로라는 걷기 시작했다.




어두운 세상 속 붉은 꽃밭.




적색과 흑색으로만 이루어진 이 단조롭고 소름 끼치는 세상에서 한시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아무도 없냐고요!”




더 큰 목소리로 소리쳐 보지만, 끝없는 어둠 속에 집어삼켜질 뿐이었다.




메아리조차 울리지 않는다.




플로라는 이곳이 대체 얼마나 넓은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넓다. 어쩌면 이곳은 끝이 존재하지 않는 무한한 공간일지도 몰랐다.




문득 그런 불안감이 플로라의 뇌리에 스치듯 지나갔다.




여기서 평생 못 나가면 어쩌지?




타닥!




다급해진 플로라는 꽃밭 위를 달렸다.




발목을 사락사락 스치는 붉은 꽃잎의 감촉이 기분 나빴다.




마치 보이지 않는 손이 계속해서 그녀의 발목을 희롱하는 기분이었다.




플로라가 지나가는 자리마다 붉은 꽃잎이 나풀대며 허공을 비산했다.




플로라는 달리면서 외쳤다.




누구 없냐고. 누가 좀 도와달라고.




그렇게 계속 달리길 얼마나 지속했을까.




숨을 헐떡이던 플로라는 결국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제발, 누가 좀…….”




울먹이는 목소리로 그렇게 애원해 보지만, 여전히 이 세상은 고요하기만 했다.




사실은 알고 있다.




그 누구도 자신을 도우러 오지 않을 거라는 걸.




왜냐하면, 자신은 처음부터 외톨이었으니까.




지금껏 부정해 왔던 사실을 받아들이는 순간 플로라는 모든 의욕이 사라지고 말았다.




플로라는 실이 끊어진 마리오네트 인형처럼 자리에 주저앉은 채 고개를 푹 숙였다.




아무도 구하러 오지 않는다.




가족도, 친구도, 그 누구도 말이다.




그래. 차라리 잘된 걸지도 몰랐다.




나 같은 게 있어 봤자 도움도 되지 않을 테니까.




그러니 그냥 사라지는 것이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에 머무는 것도 나쁘진 않아 보였다.




이곳에선 사람을 만날 수 없지만.




그렇기에 상처받을 일도 없으니까.




플로라의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턱 끝에 맺힌 눈물 한 방울이 붉은 꽃잎에 툭 떨어졌다.




그렇게 서서히.




플로라의 의식은 꽃밭에 잠겨 희미해져 가기 시작했다.




플로라의 몸도 점점 투명해졌다.




상실된 의욕. 소실되어 가는 의식.




플로라라는 확고한 자아가 스위치가 내려가듯 꺼지려던 그 순간.




붉은 꽃밭밖에 존재하지 않은 세상에 작은 변화가 일어났다.




콰직!




단단한 무언가를 주먹으로 때리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한 줄기 빛이 비스듬하게 반투명한 플로라를 비추었다.




플로라는 숙였던 고개를 들어 올렸다. 공허한 그녀의 눈동자가 정면을 향했다.




새까만 허공에 아주 작지만 미세한 금이 가 있었다.




플로라를 비추는 빛은 그 깨진 틈새에서 새어 나오고 있었다.




콰직! 콰지직!




둔탁한 소리가 계속 이어졌다.




금은 그물처럼 넓게 퍼지기 시작했다.




틈새가 커질수록 흘러나오는 빛이 점차 선명해졌다.




그리고.




허공이 깨졌다.




검은 파편들이 불씨처럼 흩날렸다.




완전히 부서진 공간 너머는 빛으로 이루어진 새하얀 세상이었다.




눈 부신 빛을 등지며 한 남자가 꽃밭 위에 모습을 드러냈다.




“아…….”




플로라의 동공이 크게 확장됐다.




그녀의 붉은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플로라가 그 이름을 입에 담았다.




“루드거, 선생님?”




“플로라 루모스.”




루드거는 자리에 서서 플로라를 마주 보았다.




안색은 창백하고, 눈동자에는 빛이 없다.




무엇보다 몸이 반투명하게 변하고 있었다.




하지만 플로라는 살아 있었다.




늦지 않은 것이었다.




“왜, 왜 선생님이 여기에…….”




“도우러 왔다.”




“돕는, 다고요? 저를 말인가요?”




플로라의 멍한 물음에 루드거가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다는 말을 하려 했지만, 플로라는 자신의 처지를 떠올리고는 입술을 깨물었다.




슬픔과 기쁨, 상반되는 감정으로 요동치는 그녀는 루드거를 강하게 쏘아보았다.




“왜요. 이제 와서 걱정하는 척이라도 하시게요?”




“…….”




“다 알아요. 어차피 선생님은 저한테 관심도 없잖아요? 그냥 재능이 뛰어난 학생,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니까.”




“플로라.”




“대체 왜 온 거예요? 왜! 차라리 절 버리시지 그랬어요! 저희 가족이 제게 했던 것처럼! 그러면. 그랬더라면…… 이렇게 괴롭지도 않았을 텐데.”




플로라는 가시가 잔뜩 돋친 고슴도치처럼 날을 세우며 소리쳤다.




루드거는 플로라의 말을 잠자코 들어 주었다.




그리고 플로라가 언성을 낮췄을 때, 조심히 입을 열었다.




“플로라. 내가 교사로서 너를 구하러 온 거라는 사실은 부정하지 않겠다.”




“……그거 봐요.”




“하지만 교사라는 입장은 단지 부차적인 이유일 뿐이다. 내가 여기까지 온 진짜 이유는 너다. 나는 그저 순수하게 네가 걱정돼서 온 거다.”




“……제가, 걱정된다고요? 하!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네가 힘들어한다는 것은 안다. 네 입장은 이해한다. 나 또한 너와 비슷한 일을 겪어 봤으니까. 그래서 내버려 둘 수 없었다.”




“거짓말 마요!”




플로라는 루드거가 자신을 설득하기 위해 일부러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자신을 이해한다는 말을 할 리가 없지 않은가.




가족들에게 버림받고.




종교적인 이유로 어린 나이에 낙인이 새겨질 뻔했다.




그것이 무산되었다 해도, 그날의 기억은 씻을 수 없는 상처로 남았다.




그런데 그걸 이해한다고?




비슷한 일을 겪어 봤다고?




당신이 뭔데!




“선생님이 대체 저에 대해서 뭘 안다고 그러시는 거예요! 이해한다고요? 그럴 리가 없잖아요! 제가 얼마나 힘들었는데! 얼마나 괴로웠는데!”




플로라는 내면의 어둠을 토해 냈다.




평소였다면 절대로 보이지 않을 행동이었지만, 플로라는 그런 자각조차 없었다.




“선생님은, 가족에게 버림받은 사람의 기분을 알기나 해요?”




“……플로라.”




“그런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지 마요!”




플로라의 외침과 동시에 세상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직후 플로라의 등 뒤에서, 새까만 그림자가 스르륵 일어났다.




[그래. 플로라가 싫어하잖아.]




상반신이 길게 늘어진 종이 인형 같은 형상.




아지랑이처럼 일렁이는 그림자의 얼굴에 새하얀 눈과 입이 나타났다.




녀석의 정체를 알아차린 루드거가 눈을 가늘게 떴다.




“바사라.”




[놀랐어. 설마하니 무의식의 심연까지 들어오는 마법이 있었을 줄이야. 하지만 애석해서 어쩌나. 플로라가 나가기 싫어하는걸.]




루드거는 바사라의 말에 반응하지 않았다.




그 대신 플로라를 향해 물었다.




“플로라. 정말로 나가지 않을 생각이냐?”




“제가 나간다고 한다면, 뭐가 달라지나요? 어차피 다 똑같아요. 질투 어린 시기. 경멸 어린 시선. 인정해 주지 않는 가족들까지……. 달라지는 건, 없어요.”




“있다.”




“뭐라고요?”




“달라지는 건 있다고 말했다.”




단언에 가까운 루드거의 말에 플로라는 말없이 입술을 벙긋거렸다.




“대, 대체 그게 무슨 소리예요.”




“그걸 정하는 건 너다.”




“정하는 게 나라니…….”




플로라의 목소리에 힘이 빠졌다.




플로라는 누군가의 구원을 애타게 원했다.




내심 기대했던 걸지도 몰랐다.




루드거가 대신해서 자신을 도와주겠다고, 바깥에 나가서도 지켜 주겠다고 말해 주기를.




그러나 루드거는 자신을 구원해 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플로라. 너는 구원을 바랐지. 누군가 다가와서 손을 내밀어 주기를, 너를 잡아 일으켜 세워 주기를. 나 또한 그 마음을 충분히 이해한다.”




“그걸 알면서 대체 왜…….”




“왜냐하면 플로라. 결국, 바뀌어야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기 때문이다.”




“…….”




“내가 널 돕는다고 하더라도 너 스스로 걷고자 하는 의지가 없다면, 내 도움은 아무런 소용이 없게 된다. 그것은 그저 순간만 너의 마음을 편하게 해 줄 뿐.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해.”




“…….”




“그럼에도 내가 널 바꾸려 한다면, 그것은 나의 의지이지 너의 의지가 아니다. 너는 결국 또다시 타인에 의해 존속되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너는 정말로 그런 삶을 원하나?”




루드거는 흔들리지 않는 시선으로 플로라를 응시했다.




한 치의 거짓도 없이.




상대방을 배려해 주는 말조차 없는, 냉철한 진실을 입에 담으며.




“구원은 누군가에게 바라는 것이 아니야. 스스로 쟁취해야 하는 것이지. 누구도 너의 삶을 대신 살아 줄 수는 없어. 누구도 너의 절망을 온전히 이해해 줄 수 없다. 당연하게도, 그 절망을 극복하게 만들어 주는 것 또한……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지.”




루드거는 함부로 타인을 구원하겠다는 말을 내뱉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것은 너무나도 오만한 행동이니까.




스스로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자신뿐이었으니까.




“그러니 묻겠다. 플로라. 너는 바뀌고 싶은가?”




구원이라니.




죽도록 노력해도 오지 않을 그것을, 타인으로부터 바란다는 것은 과분한 욕심이다.




적어도 루드거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기에 타인에게 베푸는 구원조차도, 루드거는 절대 허투루 하지 않았다.




누군가에 의해서 행해진 구원은 구원 따위가 아니다.




구원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또 하나의 속박일 뿐이다.




결국, 사람은 자신의 의지로 일어나지 않으면 안 됐다.




스스로 의지로 싸우지 않으면 안 됐다.




그가 해 줄 수 있는 건 그저 사소한 도움.




나아가고자 하는 사람의 등을, 아주 약간 떠밀어 주는 것뿐이었다.




“네가 바뀌고자 한다면, 나는 너를 도와줄 거다. 네가 스스로 포기하지 않는 한, 나는 널 응원해 줄 거다.”




그것은 루드거의 삶이었고.




그가 걸어온 길이며.




신념이었다.




“…….”




플로라는 무어라 대답을 해야 할지 망설였다.




솔직히 말해서 이곳을 나가 다시 바깥으로 돌아가고 싶다.




하지만 바깥은, 너무나도 무서웠다.




상처를 준 모든 것들은 여전히 바깥에 산재해 있었다.




그것을 다시 마주해야 하는 것은 끔찍한 처사다.




그래도.




단 한 명이라도 좋으니 누군가 도와준다면, 그때는 분명…….




[너무한데.]




그때 둘 사이를 끼어드는 목소리가 있었다.




[나를 빼 두고 그렇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다니 말이야.]




플로라의 등 뒤에서 넘실대던 바사라가 자신의 덩치를 서서히 키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3m 정도밖에 되지 않던 크기가 어느덧 고개를 꽤 크게 들어올려야 할 정도로 거대해졌다.




[플로라. 잊었어? 바깥은 상처만이 가득한 세계라는 걸. 반면에 여기는 다르지. 이곳에 있다면 너는 그 누구로부터도 상처받지 않아. 왜냐면 내가 그렇게 해 줄 테니까.]




바사라가 거대한 덩치를 숙여 플로라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나는 널 이해해 줄 수 있어. 우린 한 몸이니까. 오직 나만이 너의 아픔을 온전히 공감해 줄 수 있지.]




“아…….”




[저 남자의 말은 믿지 마. 너도 알잖아? 말로는 저렇게 해도 널 인정해 준 적 없다는 걸. 그는 거짓말쟁이야.]




바사라의 속삭임에 플로라는 혼란에 빠졌다.




그때 나선 것은 루드거였다.




“이전에 싸울 때도 느낀 거지만.”




바사라가 고개를 들어 루드거를 응시했다.




새까만 얼굴에 새하얀 눈동자는 너무 단조롭지만, 그렇기에 형용할 수 없는 무기질적인 공포가 느껴졌다.




“너는 말이 너무 많아.”




[오오. 이런 상황에서 나에게 그런 말을 하다니.]




바사라는 숙였던 몸을 완전히 폈다.




그러자 그 자체만으로 거대한 산이 우뚝 선 느낌이었다.




[이곳은 나의 세상이자 나의 권역이다. 바깥도 아니고, 한낱 인간의 나약한 정신 따위가 맞설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




“정신력 싸움이라 이건가.”




루드거는 주저앉은 플로라를 힐끔 본 뒤 바사라를 올려다보았다.




“뭐, 해 봐야지.”




그러기 위해서 왔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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