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UA - 319화 문헌 속의 사도 (1)

 ◈ 319화 문헌 속의 사도 (1)




루드거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가 지금 머무는 병실은 그 혼자만이 사용하는 일종의 특별실.




그런 곳에 제로 오더는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들어왔다.




입구를 지키는 사람은 없겠지만, 이 병원 자체는 철통과도 같은 보안을 유지하고 있을 터였다.




그것을 가볍게 뚫고 들어온 시점에서 제로 오더가 얼마나 신출귀몰한 존재인지 새삼 깨닫고 만다.




하지만 이전처럼 긴장하지는 않았다.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은 확신했다.




“그래서, 찾아온 이유는 뭐지?”




어차피 제로 오더는 자신을 쳐 낼 생각이 없다.




이쪽이 진짜 존 도우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다른 퍼스트 오더와의 반목을 지켜보았다.




여기서 루드거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하나였다.




─제로 오더는 이쪽에게 무언가 바라는 것이 있다.




이렇게 제로 오더가 따로 찾아올 정도라면 더더욱.




당장 이쪽에 뭘 바라는 건지는 모른다.




거기까지 유추하기에는 제로 오더가 보여 준 단서랄 것이 전혀 없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여기서, 그에 대한 단서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 다분히 도전적인 시선을 느낀 것일까.




제로 오더는 바뀐 루드거의 태도에 즐겁다는 듯 미소 지었다.




그는 자연스럽게 VIP실의 한쪽에 마련된 의자에 가서 앉았다.




특별실이라 그런지 적당히 다과를 먹을 수 있는 테이블도 있었다.




루드거도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입고 있는 옷이 그대로인 것을 보면, 병원 측에서 그의 몸에 크게 손을 댄 것 같지는 않았다.




기절하기 전에 보았던 사람이 만델리나였으니, 아일린 1황녀의 배려를 받은 것이리라.




루드거는 제로 오더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반쯤 친 커튼 너머로 푸르스름한 달빛이 방안에 드리워졌다.




“조용한 대화를 나누기에는 꽤나 좋은 분위기지?”




“…….”




“마음 같아서는 바깥바람을 쐬면서 별빛도 구경하고 싶지만, 아픈 사람을 강제로 끌고 갈 정도로 못돼 먹은 성격은 아니라서 말이야.”




“잡설은 그만하지.”




“음. 그래. 본인이 하기 싫다는데, 더 괜한 말을 하는 것도 예의는 아니겠지.”




제로 오더는 루드거가 자신에게 반말을 사용하는 것을 당연하다는 듯 여겼다.




마치 이쪽의 성격을 충분히 인지하며 감안하고 있다는 태도.




대화에 들어가기에 앞서, 제로 오더는 자신의 얼굴에 착용하고 있는 가면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리고는 딸칵, 소리와 함께 가면을 벗어 테이블 위에 조심히 놓았다.




“…….”




루드거는 의외라는 시선으로 그 일련의 행동을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가면으로 정체를 숨기던 제로 오더가, 갑자기 자신의 앞에서 맨얼굴을 드러낼 줄이야.




놀라는 것과 별개로 루드거는 제로 오더의 모습을 훑었다.




그의 진짜 얼굴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가면 안에 감춰진 제로 오더의 모습은 생각 이상으로 평범했다.




엄청나게 끔찍한 괴물이거나, 혹은 다른 뒤틀린 괴물이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실제 제로 오더의 모습은 일반적인 사람과 다르지 않았다.




그것도 상당한 미남.




피부는 하얗고, 머리카락은 어둠을 머금은 것처럼 검다.




달빛을 받고 있음에도 머리카락이 빛을 다 빨아들인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적당한 길이를 친 곱슬머리에 어딘가 부드러워 보이는 인상까지.




세상의 모든 사건을 배후에서 조종하는 검은 여명회의 수괴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수려한 외모였다.




“꽤 놀랐다는 눈치네. 제대로 된 대화를 하려면 이렇게 얼굴을 마주 봐야 하지 않겠어.”




제로 오더는 루드거를 향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렇게 마주 보니 또 속내를 알기 힘든 미소였다.




“고생 많았어.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나도 멀리서나마 지켜봤거든. 해방군에 흑마법사에, 게다가 악마까지.”




“전부 그쪽이 계획한 일 아니었나?”




루드거는 지하 시설의 존재를 흑마법사들에게 가르쳐 주고, 그들이 실험을 이어 나갈 수 있게 손을 쓴 것이 당신이 아니냐고 물었다.




실제로 제로 오더는 그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반응이었다.




제로 오더는 가볍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구나. 좀 억울한걸. 나는 그런 일을 시키지 않았어.”




“시키지 않았다?”




“물론, 수도의 저 아래에 죽어 있는 세계수가 잠들어 있으며 그 안에 악마가 봉인되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어.”




알고 있었다.




그 말에서 루드거는 무언가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을 느꼈다.




자신은 딱 거기까지라는 듯 제로 오더는 선을 확실히 그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단언컨대 정보를 흘린 것은 내가 아니야.”




“그러면 니콜라이의 짓이겠군.”




“그래. 니콜라이는 정보를 모으는 데 특화되어 있으니까. 내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몰래 일을 꾸미고 있었을 줄이야.”




“알면서도 놔뒀던 것이 아닌가?”




“그건 부정하지 않겠어. 다만 평소 니콜라이를 생각하면, 이번에는 조금 의례적인 일이기는 했지.”




“그 남자가 이렇게까지 일을 크게 벌일 성격은 아니라 이건가.”




제로 오더는 딱히 그 부분에 대해서는 반박하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개고생을 하고 있던 것을 지켜봤으니 나를 보자고 한 건가. 고생했으니 칭찬이라도 해 주려고?”




“고생했다고 말한다면 그건 오히려 놀리는 일이겠지. 내가 찾아온 것은 일이 얼마나 진행됐는지 확인을 할 겸 온 거야. 그리고 그쪽에 말해 줄 것도 있고.”




“일이라…….”




루드거는 제로 오더가 말한 일에 대해서 떠올렸다.




제로 오더는 누군가를 찾고 있다고 했다.




그것을 위해서 존 도우를 세오른에 보낸 것이고.




존 도우가 죽은 지금, 루드거가 그 뒤를 이어서 업무를 이행하게 된 상황이었다.




“찾는 사람은, 판정안의 소유자인가?”




루드거가 가장 먼저 운을 뗐다.




제로 오더는 그 말에 샛노란 눈동자를 슬쩍 휘었다.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 했지만, 그 반응 자체가 루드거의 추측에 확신을 더해 주었다.




“찾은 건가?”




“…….”




루드거는 기대 어린 얼굴로 이쪽을 향해 물어보는 제로 오더를 빤히 바라보다가 답했다.




“아니.”




“찾지 못했다면서 판정안의 소유자는 어떻게 알지?”




“문헌을 읽어 본 적이 있다. 세상이 큰 혼란에 빠질 때 성녀가 태어난다고 말이야. 판정안은 그런 성녀의 권한이고.”




“갑자기 그 문헌의 이야기가 왜 나오는지 모르겠는걸.”




“보통 그런 문헌에 함께 등재되어 있는 존재가 있기 때문이지.”




루드거는 바사라의 존재를 떠올렸다.




그리고 녀석이 했던 경고 또한 잊지 않았다.




대화를 나누면서도 루드거는 계속해서 정보를 떠올리고 정리하며 재조립했다.




제로 오더는 어떻게 지하 시설의 존재를 알았을까.




제로 오더는 죽은 세계수의 뿌리에 바사라가 봉인되어 있다는 걸 어디서 들었을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제로 오더는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다가 나섰다.




대화를 나누자는 빌미로 말이다.




“그렇지 않나? 문헌 속의 악마. 아니, 사도라 불러 줘야 하나.”




“…….”




처음으로 미소를 짓던 제로 오더의 얼굴에 무표정이라는 서리가 내려앉았다.




“……바사라가 말해 줬나?”




“그럴 리가. 녀석은 죽기 직전까지도 다른 사도의 정체를 말해 주지 않았다.”




“이쪽을 향한 동족 의식 때문은 아니겠고. 그냥 그쪽이 곤란하길 바랐나 보네. 하지만 존재한다고는 알려 줬군. 그것만으로도 그쪽에겐 충분한 단서가 된 거고.”




“부정하진 않겠다.”




“하하. 이거 참. 웬만해서는 정체를 감추고 싶었는데 말이지.”




제로 오더는 자신의 숨겨 놓은 패가 하나 까발려진 것을 퍽 아쉬워했다.




“그런데 이쪽의 정체를 추측한 것치고는 그렇게 놀라지 않네?”




“그게 놀라야 할 일인가?”




“뭐? 하하하! 역시 너는 재미있는 녀석이야. 내 눈은 틀리지 않았어.”




자신이 자연스럽게 악마라 밝힌 제로 오더.




그것을 당연하다는 듯 받아들이는 루드거.




이런 두 사람의 모습은 뭐라 말하기 힘든 기괴함이 느껴졌다.




“판정안도 내 정체를 알고 있으니, 추측한 거겠지?”




“그래. 문헌 속의 악마가 무언가를 찾는다면, 그것밖에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거 참. 보통 사람들은 그런 문헌은 신경도 쓰지 않을 텐데. 뭐, 여기까지 왔는데 더 숨길 필요도 없겠네. 맞아. 나는 판정안을 지닌 후보자를 찾고 있어.”




제로 오더는 소유자도 아닌 ‘후보자’라는 단어를 입에 담았다.




가볍게 넘길 정도로 별거 아닌 걸 수도 있겠지만, 루드거는 그런 사소한 것도 놓치지 않았다.




“왜 찾는 거지? 역시 제거하기 위해서인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내가 악마라서 그런 건가? 그 부분에 대해서는 대답하지 않기로 하지. 나한테도 이런저런 사정이 있거든.”




“뭐가 어찌 됐든 내 대답은 ‘아니오’다. 애초에 판정안을 지닌 사람을 찾는다는 것은 너무 허황된 이야기야.”




“그래, 뭐 그렇게 생각했어. 쉽게 찾을 수 있는 건 아니지. 당장에 각성하지 않았을 수도 있고, 언제 갑자기 나타날지 모르니까. 하지만 단 한 가지는 확실해. 판정안의 후보자는 분명 세오른에 있어.”




제로 오더의 목소리에는 확신이 담겨 있었다




평범한 정보책으로 판정안의 후보자가 세오른에 있다는 걸 알 수가 없었다.




그렇다는 것은 사도로서, 다른 모종의 힘을 통해 알아낸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다시 한번 더 확인 차 묻도록 할게. 정말 판정안의 후보자를 찾지 못했어?”




이쪽을 뚫어져라 응시하는 제로 오더의 시선은 항거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다.




피부 위로 스멀스멀 벌레가 기어 다니는 것 같은 소름.




제로 오더는 지금 루드거를 의심하고 있었다.




루드거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더라면, 아주 순간이지만 빈틈을 허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루드거는 산전수전을 다 겪어 본 입장이었다.




이런 비슷한 경우는 이미 지긋지긋할 정도였다.




“그래. 아직까지도 찾지 못했다. 애초에 판정안의 후보자라는 걸 지금에서야 알게 된 것도 있으니까.”




“흠, 그래. 우선 이 부분에 대해서는 넘어가도록 하지.”




다행히도 제로 오더는 그 이상 캐물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너도 궁금한 것이 있겠지. 바사라에게 들어서 알겠지만 가령, 사도에 대한 것이라거나?”




드디어 중요한 이야기가 나오는군.




루드거는 자세를 달리하며 제로 오더의 다음 말을 경청할 준비를 마쳤다.




“알다시피 우리는 너희 인간이 부르길 악마라는 존재야. 주신 루멘시스의 뜻에 반대하며, 세상을 혼란으로 몰고 가는 재앙의 총재지.”




“그렇게 말하는 것치고는 꽤 자랑스러워 보이는데.”




“그런 취급을 받을 만하니까. 하지만 알다시피 우리는 악마가 아니야. 우리는 서로를 사도라 부르지.”




“사도인가.”




사도(Apostle).




신이 보낸 전령이자 대행자의 존재라 할 수 있었다.




실제로 바사라도 죽기 전에 자신의 신을 애타게 찾았었다.




루드거는 제로 오더에게 섬기는 신이 따로 있었느냐는 둥, 루멘시스 말고 다른 신이 존재하냐는 질문은 하지 않았다.




그리고 제로 오더는 그런 루드거의 태도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피식 웃었다.




“역시. 너도 이 세상의 숨겨진 진실에 대해서 알고 있구나.”




“어느 정도는.”




“그래. 루드거 첼리시. 그래서 너는 이 세상을 보며 무엇을 느끼지?”




“…….”




루드거는 잠시 눈을 감았다.




제로 오더는 그런 루드거의 행동을 잠자코 지켜보며 너그러이 대답할 시간을 기다려 주었다.




이윽고 마음의 정리를 끝낸 루드거가 입을 열었다.




“새장이다.”




“새장이라고?”




“그래. 이 세상은 얇고 촘촘한 철 우리로 뒤덮인 새장이다. 아름답지만 혐오스럽고, 광활하지만 터무니없이 좁지. 우리는 그 안에 갇혀서, 자신이 자유를 박탈당했다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해.”




“역시…….”




제로 오더는 만족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불타는 창고의 앞에서 너를 처음 봤을 때 바로 느낄 수 있었지. 너는 무언가 다른 사람이라는 걸.”




“다른 사람이라고?”




“그래. 너는 인간임에도 우리와 같은 세상을 보지. 다른 사람들은 모르는, 또 다른 시선으로 말이야.”




그것만으로 루드거에게는 자격이 있었다.




그러나 루드거는 제로 오더의 그 말을 코웃음으로 일축했다.




“그런 시선으로 세상을 본다 한들, 온갖 사건을 뒤에서 일으키는 그쪽과 내가 어울리는 일은 없어.”




“그래. 그 부분은 인지하고 있어. 네가 왔던 길을 돌아보면, 나와는 확연히 다르니까.”




제로 오더는 루드거의 과거 행적을 알고 있다는 듯한 발언을 했다.




단순히 떠보는 것이 아니다.




제로 오더라면 진짜로 알고 있을 것이다.




이쪽이 숨기고 있는 패를 지닌 만큼, 제로 오더도 아직까지 숨기고 있는 패를 지녔을 테니까.




하물며 그가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 악마임을 생각하면 더더욱.




“하지만 언젠가 너는 선택을 내려야 할 거야. 알다시피 이 세상은, 고작 개인의 힘으로 헤쳐 나가기에는 너무나도 험난한 곳이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손을 잡자 이건가?”




“그렇게 들렸나? 사실 그러면 더 좋지만 말이지.”




“…….”




루드거는 제로 오더의 얼굴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이쪽을 향한 제로 오더의 표정에서 느껴지는 건 호의뿐이었다.




자신과 같은 세상을 보는 동료를 만나서일까.




아니면 또 다른 이유가 있기 때문일까.




루드거는 그것을 알지 못했다. 물어본다고 한들 저 남자가 말해 줄 것 같지도 않았고.




그때였다.




제삼자가 대화에 끼어든 것은.




“남정네들 둘이서 대체 이야기를 얼마나 오래 나누는 거야?”




목소리가 들려온 곳은 창가.




루드거와 제로 오더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곳으로 향했다.




언제 열렸는지 모를 창가에 한 여성이 걸터앉아 있었다.




어깨와 쇄골이 드러나는 활동하기 편한 모험복에 허리를 꽉 조이는 코르셋.




허벅지까지 올라오는 검은 가죽 부츠에 한 손에는 양산을 쥐고 있었다.




가장 시선이 가는 것은 바로 머리색.




중단발 길이의 머리카락은 미간을 중심으로 한쪽 절반은 흰색, 절반은 검은색을 띠고 있었다.




루드거로서는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아니. 애초에 사람이 맞을까.




“내가 바깥에서 기다리라고 하지 않았던가? 헬리아.”




제로 오더가 입을 연 것은 그때였다.




“기다리고 있는데, 금방 돌아온다는 사람이 시간이 지나도 안 돌아와서 말이야. 너무 지루해서 그냥 내가 직접 움직였어.”




헬리아라는 여성은 그렇게 말하며 루드거를 향해 시선을 보냈다.




그녀의 두 노란빛 눈동자가 재미있는 걸 발견했다는 듯 반짝였다.




“그래, 그쪽이 그 바사라를 쓰러뜨렸다는 인간?”




“…….”




헬리아라는 여성의 말에 루드거의 표정이 굳었다.




제로 오더를 상대로 편하게 말을 놓는 것도 그렇고, 말을 걸 때까지 기척이 느껴지지 않은 것도 그렇고.




그 모든 행동이 대놓고 그녀의 정체를 암시하고 있었다.




‘평범한 인간은 아닐 거라 생각은 했다만.’




설마하니 이 자리에 사도가 한 명 더 모습을 드러낼 줄이야.




헬리아는 방긋 웃으며 루드거를 향해 손을 흔들어 보였다.




“만나서 반가워. 앞으로 새로운 퍼스트 오더로 활동하게 될 헬리아라고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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