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UA - 322화 한여름 밤의 만남 (2)

 ◈ 322화 한여름 밤의 만남 (2)




탁.




플로라는 루드거의 병실의 문을 닫으며 밖으로 나왔다.




그녀는 한동안 문에 등을 기댄 채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했다.




플로라의 흐릿한 시선은 조금 전 루드거와 나누었던 대화 장면을 영사(影寫)하고 있었다.




-그 리네라는 아이와는…… 무슨 사이예요?




플로라는 큰마음을 먹고 가장 궁금했던 질문을 던졌다.




그 자리에서 굳이 그런 질문을 했을 필요가 있을까, 하는 후회는 있었다.




하지만 지금이 아니면 루드거에게서 대답을 듣지 못할 거라는 불안감이 더 컸다.




평소의 루드거였다면 그런 플로라의 질문에 침묵으로 응대하거나, 혹은 아무것도 없었다고 잡아뗐을 것이다.




하지만 정신세계에서 일 때문인지 루드거는 플로라의 질문을 가만히 듣더니, 이윽고 깊은 고민에 들었다.




그것만으로도 플로라는 루드거가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꽤 달라졌음을 깨달았다.




전보다 자신을 더 신경 써 주는 것 같아 내심 기뻐하던 그때였다.




-자세히 설명은 해 줄 수 없다. 이것은 내 개인적인 일이니까.




-그렇다는 말은, 실제로 무슨 관계가 있다는 말이네요?




-그렇게 좋은 관계는 아니다.




-그런 것치고는, 선생님은 그 아이를 많이 아끼는 거로 보이시는걸요.




플로라는 마음속에 담아 두고 있던 서운함을 드러냈다.




평소였다면 하지 않았을 행동.




그러나 루드거가 플로라를 대하는 태도가 꽤 바뀌었듯.




플로라 또한 루드거에게 보여 주는 모습이 전보다 더 진실하게 변했다.




정신세계에서 있었던 일이 일종의 공감대가 형성된 것이다.




그날의 광경은 우리 두 사람 말고는 누구도 모를 거라고.




하지만 그럼에도 리네라는 아이는 꽤 마음이 걸렸다.




루드거가 리네에게 보여 주는 행동은 평범한 관계와는 거리가 멀어 보였으니까.




-과거의 일이다. 리네는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일이지.




-둘이 옛날에 만났던 거예요?




루드거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플로라는 어쩌다가 둘이 만나게 된 거고, 그때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묻지 않았다.




차마 물어볼 수가 없었다.




그때 순간이지만 지었던 루드거의 표정이.




전에는 본 적 없는 진한 슬픔에 잠겨 있었기 때문이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플로라는 괜히 마음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자신은 루드거에게 도움을 받았지만, 정작 루드거에게 도움을 줄 수 없다는 사실에.




플로라는 자신의 모자람을 처음으로 사무치게 느꼈다.




동시에 그런 생각도 들었다.




만약 자신에게도 좋지 않은 일이 생긴다면, 선생님은 저런 표정을 지어 주실까?




플로라는 고개를 저었다.




너무 부정적인 생각은 하지 말자. 이제부터 달라지기로 다짐하지 않았던가.




더욱 노력해야 했다.




처음으로 누군가가 손을 내밀어 주어서 얻게 된 기회였다.




지금 살아 숨 쉬는 이 일분일초라도 허투루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플로라는 마음을 다잡은 뒤 자신의 병실이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저벅. 저벅.




“…….”




멀어지는 플로라의 기척을 느낀 루드거는 여전히 자리에 앉아 창가를 바라보았다.




플로라의 상태는 걱정했던 것과 다르게 아주 좋아 보였다.




말투도 행동도 전보다 더 꾸미는 것이 없었다. 감정을 더욱 잘 드러내서 보기 좋았다.




그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루드거는 머리가 복잡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번 수도에서 벌어진 사건은 큰 파장을 몰고 올 것이다.




그러나 루드거는 그 파장 자체가 가져올 미래를 걱정하지 않았다.




단지 신경 쓰이는 것은 리네의 상태였다.




그날 바사라로부터 리네를 구해 줬을 때, 루드거는 그녀의 눈동자를 보았다.




밝은 빛으로 가득 찬 그 눈동자는 판정안이 제대로 발동했다는 소리였다.




바사라는 리네를 보며 성녀라고 말했다.




루드거도 그것이 무얼 의미하는지 모르지 않았다.




리네는 성녀의 자질을 타고났다.




그녀가 지닌 판정안은, 단순히 핏줄을 통해 유전되는 것이 아니다.




조금 더 거대한 운명론적인 무언가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지.




‘세기에 오직 한 명만 존재한다는 판정안.’




그리고 대부분 판정안의 소유자들은 자신이 그런 힘을 지녔다는 것을 인지조차 하지 못한다.




판정안이 눈을 뜨는 것은, 전 세계 단위로 큼직한 사건이 일어났을 때뿐이니까.




그런데 리네의 판정안이 각성했다.




완전하지는 않았지만, 그 정도라면 리네 본인도 스스로 의아함을 느낄 터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제로 오더가 그녀를 찾는 것이 마음에 걸려.’




제로 오더가 문헌 속의 악마임을 생각한다면, 판정안을 지닌 리네를 제거하려고 찾는 것이 가장 유력했다.




지금은 루드거가 모르는 척 숨기고 있다지만, 언젠가는 분명 들키고 말 것이다.




과연, 미래에도 그는 그 아이를 지킬 수 있을까.




‘그저 평범하게 자라 주길 바랐는데.’




그 아이가 모든 것을 잊고서 평범하게 살아 주길 바랐다.




하지만 운명은 그것을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루드거는 거기까지 생각했다가 자조적인 웃음을 흘렸다.




그래. 지금 누가 누굴 걱정한단 말인가.




애초에 리네가 그렇게 된 것에는 자신의 책임도 있지 않은가.




그녀의 어머니를 이 피 묻은 손으로 죽인 그날부터.




리네는 이미 평범함과 동떨어진 삶을 살게 된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이쪽이 리네를 신경 쓰는 것 자체가 그녀에게 더욱 큰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저 일방적으로 죄책감을 덜어 내기 위해서 하는 이기적인 행동.




루드거는 자신의 걱정을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결국 일은 벌어졌지.’




여기까지 온 이상 끝까지 모르는 척할 수도 없었다.




게다가 무슨 운명의 농간인지, 세오른에는 리네 말고도 그날의 사건과 관련된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다.




프로이덴 울부르크.




그 자그맣던 꼬마 늑대는 어느덧 어엿한 성인으로 자랐다.




이쪽을 향한 적대감을 더욱 키운 채로 말이다.




아직까지는 리네에게 과거의 일을 말하지 않은 것 같지만, 또 언제 갑자기 무언가 일이 터질지 모를 일이었다.




“후우.”




루드거는 지하 공동에서 안드레이와 나누었던 마지막 대화를 떠올렸다.




누군가를 지키지 못했고, 그것에 절망했던 적이 있다.




안드레이 또한 그랬고, 그는 결국 흑마법사의 길을 걷게 됐다.




‘너는 실패하지 마라, 인가.’




그 응원 아닌 응원의 말이 루드거는 우습다고 생각했다.




어처구니가 없어서가 아니다.




오히려 그 말에 루드거는 감사함마저 느끼고 있었다.




안드레이가 남긴, 루드거의 삶을 관통하는 그 짧은 한마디.




아이러니하게도 그 말이, 루드거의 메마른 마음에 단비와도 같은 위로를 건네주었기 때문이다.




‘평생을 고독하게 살리라 생각했지만, 살다 보니 이런 일도 겪는군.’




루드거는 그렇게 생각하며 창가를 바라보았다.




지금쯤이라면 누구보다도 가장 먼저 왔어야 할 손님이 찾아오지 않는 것이 못내 이상했다.




‘이상하군. 스승님은 지금 수도에 계신 거로 아는데. 안 오시는 건가?’




그란데르의 성격상 이쪽이 다쳤다고 병실에 실려 가면 놀리기 위해서라도 찾아왔을 터.




그것도 한밤중에, 남들의 눈을 피해서 말이다.




‘워낙 제멋대로인 성격이라, 올 것 같을 때 안 오는 것도 딱히 이상하지는 않다만.’




루드거는 그란데르의 행동을 추측하는 걸 포기하기로 했다.




안 오면 뭐, 좋은 거고.




* * *




“이거 참. 조금 더 수다를 떨었어도 좋았을 텐데. 꽤 재미있는 인간이었단 말이야.”




헬리아는 한 손에 쥔 양산을 빙빙 돌리며 투덜거렸다.




제로 오더는 헬리아의 말에 묵묵부답으로 응대하며 앞장서서 길을 걸었다.




어두운 수도의 거리는 황량하기 그지없었다.




아직 테러의 흔적이 남아 있다 보니 사람은 없었고, 미처 정리하지 못한 잔해들이 거리에 널려 있었다.




헬리아는 이 광경이 마음에 들었다.




마치 세상이 한 차례 멸망하기라도 한 것 같지 않은가.




물론 세상은 멸망하지도 않았다. 이 폐허와 같은 광경은 다음 날이면 재건해 깔끔한 본래 모습으로 돌아가리라.




“그래도 조금은 더 즐길 수 있을 때 즐기는 것이 좋은…….”




헬리아가 그렇게 중얼거리는 그때였다.




앞장서서 걷던 제로 오더가 발걸음을 멈췄다.




뒤따라 걷던 헬리아도 덩달아 멈추었다.




“뭐야뭐야? 무슨 일이야?”




헬리아가 제로 오더의 어깨너머로 고개를 삐쭉 내밀며 정면을 바라봤다.




그러고는 켁, 하고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넓은 거리의 중심에 한 소녀가 있었다.




커튼처럼 쏟아지는 달빛을 받으면서도 찬란하게 빛나는 금발과, 어두운 밤인데도 선명하게 보이는 붉은 눈동자.




붉은빛 드레스를 입은 인형처럼 여리고 어린 소녀의 모습이지만.




헬리아의 그녀의 정체를 알고 있기에 구겨진 표정은 쉽게 펴질 줄 몰랐다.




“아니, 왜 하필이면…….”




“달밤에 산책이라도 나가느냐?”




헬리아가 그렇게 중얼거릴 때, 그란데르가 운을 뗐다.




“보기 드문 일이구나. 너희 족속이 한 놈도 아니고, 무려 둘이나 같이 붙어 다니다니 말이야. 아니, 오늘 있었던 일을 생각하면 셋인가?”




그란데르의 붉은 눈동자가 서슬 퍼렇게 빛났다.




마치 고요한 피 웅덩이에 물방울이 떨어져 파문이 번지는 것 같았다.




그 모습에 헬리아는 자기도 모르게 손에 쥔 양산에 힘을 주었다.




정작 그란데르의 시선을 마주 보는 제로 오더는 별다른 동요를 보이지 않은 채 말했다.




“그쪽이 여긴 어쩐 일이지.”




“어쩐 일이긴. 내가 이런 곳에 오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나?”




“조용한 걸 원하지 않았나. 사람이 많은 곳은 피해 다닌 거로 안다만.”




“그것도 옛날의 일이다. 지금은 마음이 바뀐 지 오래지.”




그란데르는 그렇게 말하며 장난스럽게 미소 지었다.




“그래서 지금 고민이다. 지금 내 기분이 썩 좋지 않거든. 모처럼 관광이라도 하러 왔는데, 기분 나쁜 녀석을 무려 둘이나 마주하게 됐으니까.”




“굳이 피해 다니는 우릴 억지로 찾아온 건 그쪽이지. 아니면 지금 여기서 싸우겠다는 건가?”




“못할 것도 없다만?”




그란데르의 주위로 핏빛 기운이 아지랑이처럼 일렁이기 시작했다.




그에 질세라 헬리아 또한 검은 마력을 일으키며 환영을 사용할 준비를 갖췄다.




그 모습에 그란데르는 가소롭다는 듯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 조잡한 환영으로 감히 나를 상대하겠다는 거냐? 분명 예전에 내가 한번 호되게 벌을 내렸던 거로 기억한다만, 다 잊어버린 모양이구나.”




“적어도 시간을 벌어서 도망칠 수는 있지.”




“예나 지금이나 참 한결같구나. 자신보다 강한 자에게 꼬리를 말고 도망부터 치려는 꼴이 변하지 않았어.”




“보통 댁 같은 괴물이랑은 누구도 싸우고 싶어 하지 않거든?”




그 대꾸에 그란데르의 눈썹이 불쾌하다는 듯 위로 솟구쳤다.




“괴물이라고?”




“……어, 방금 그 말은 취소.”




헬리아는 곧바로 꼬리를 내렸다.




물론 그것은 말뿐인 행동.




헬리아의 주위로 서서히 환영이 실체를 갖춰 가기 시작했다.




온갖 짐승과 벌레를 뒤섞은 것 같은 고대의 괴수들.




헬리아가 명령을 내리기만 한다면, 놈들은 목숨을 던져 가며 그란데르를 공격할 것이다.




그때 나선 것은 가만히 있던 제로 오더였다.




“어차피 싸울 생각이 없으니, 피차 여기까지만 하지.”




“……뭐라?”




그란데르가 눈썹을 찌푸리며 그게 무슨 소리냐는 시선으로 제로 오더를 쏘아보았다.




제로 오더는 그란데르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둘의 시선이 허공에서 충돌했다.




결국, 먼저 힘을 거둔 것은 그란데르였다.




“흥. 흥이 식었다.”




“그거 다행이군.”




“네놈을 본 것은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지만, 여전히 다른 사도라 불리는 놈들과는 다르구나.”




“서로 피차일반 아니겠어.”




“그렇겠지. 죽길 바라는 불사자와 신을 찾지 않는 사도라니.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음조차 나오지 않아.”




그란데르에게서 흘러나오던 살기가 감쪽같이 사라지자 헬리아는 당혹스러워했다.




‘뭐야. 마주치면 바로 싸우는 거 아니었어?’




수도에 그란데르가 있다는 것을 알고서 얼마나 몸을 사렸던가.




루드거와 만났을 때 환영 결계를 오래 펼치지 않은 것도 그란데르에게 꼬리를 잡히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그란데르는 눈치가 빨랐다.




조용히 수도를 빠져나가려던 둘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며 적대감마저 내비쳤다.




하지만 무슨 바람이 분 것인지 그란데르는 이쪽과 싸울 생각이 없어 보였다.




‘저 할망구가 노망이라도 났나? 예전이었으면 피를 흩뿌리면서 달려들었을 텐데.’




아직도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면 등골에 전류가 찌릿 흐르는 느낌이었다.




정작 놀란 헬리아와 다르게 제로 오더는 무언가 짐작한 듯싶었다.




“찾았구나.”




제로 오더의 확신에 그란데르는 코웃음으로 응수했다.




“찾기는 무슨. 그저 목표를 잠시 뒤로 미뤘을 뿐이다.”




“그런가.”




“그러는 너야말로 찾고 있던 것은 제대로 찾았더냐?”




“아직 찾지 못했어. 하지만 흔적을 보았으니,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생각보다 빠르구나.”




“뭐야뭐야. 나 빼고 둘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거야?”




헬리아가 물었지만 제로 오더와 그란데르 누구도 그녀의 말에 대답해 주지 않았다.




마치 같은 자리에 있는데도 이쪽은 없는 존재 취급에 헬리아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아아. 그래. 어차피 나는 알 필요 없다 이거지? 그러면 알았어.”




헬리아는 투정을 부리듯 말하고는 환영처럼 자리에서 사라졌다.




그녀가 만들어 낸 고대 마수들의 환영 또한 신기루처럼 허공에 녹아내렸다.




“나 또한 가 보도록 하겠어. 맹약은 지켜 주리라 믿지.”




제로 오더는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검은 연기처럼 사라졌다.




“맹약인가.”




그란데르는 맹약이라는 단어를 한 차례 중얼거린 뒤 홍옥 같은 눈동자로 한 곳을 향했다.




그 방향에는 자신의 못난 제자가 머물고 있는 병원이 있었다.




제자 놈이 다쳐서 실려 갔다고 하니, 병문안 겸 실컷 놀려 줄까 생각했지만.




“오늘은 날이 아니구나.”




그란데르는 아쉽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숙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렇게 된 이상, 한스라는 아이를 놀려 먹어야겠다.




“그래도 제자 놈이 참 재미있는 녀석을 주웠어.”




* * *




부르르.




“뭐지?”




숙소에서 벨라루나의 간호를 해 주던 한스는 불현듯 느껴지는 오한에 몸을 떨었다.




분명 수도에서 벌어진 사건은 다 끝났을 텐데, 왜 이렇게 불안한 걸까.




‘착각, 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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