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UA - 323화 하얀 거울 속 수여식 (1)

 ◈ 323화 하얀 거울 속 수여식 (1)




다음 날 아침.




이른 아침부터 한 손님이 루드거의 병실을 찾아왔다.




문을 열고 모습을 드러낸 것은 금발에 선한 인상을 지닌 미남 기사, 파시우스였다.




“황녀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조금 더 쉬어야 할 것 같습니다만.”




“황녀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아직 몸 상태가 썩 좋지 않은 것 같군요.”




“황녀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




무슨 말을 해도 방긋 웃는 얼굴로 같은 대답만 반복하는 파시우스.




그쪽 입장은 안타깝지만 이쪽도 양보할 수 없다는 기세를 팍팍 풍겼기에, 루드거는 결국 마지못해 승낙할 수밖에 없었다.




파시우스의 안내를 받아 병원 입구로 향하니, 미리 대기 중이던 검은색 증기 자동차가 있었다.




황실 전용 차량이라 유리창 밖에서 차량 내부를 확인하기 힘들었다.




아마 이 또한 아일린 1황녀의 배려이리라.




‘이런 배려까지 원치 않았는데.’




아일린의 배려라고 하면 뭔가 막 감격스러워야 했지만, 루드거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아일린은 받는 만큼 주지만, 반대로 주는 것 이상으로 받아 내는 성격이었다.




지금 베풀어주는 이 사소한 혜택과 배려 하나하나가 쌓인다면, 나중에는 루드거의 목줄을 옭아매게 될 것이다.




루드거도 그것을 알고 있었지만, 당장에 마땅히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이쪽이 저지른 일을 최대한 덮어 주는 것은 아일린이었고, 루드거는 거기에 도움을 받는 입장이었으니까.




차량에 탑승하자 파시우스가 운전대를 잡았다.




“운전을 그쪽이 합니까?”




“가끔 황녀님이 비밀 시찰을 할 때 제가 운전을 하죠. 덕분에 팔자에도 없는 면허증을 따야만 했고요.”




“로열가드가 그런 것도 합니까?”




“저만 특이한 케이스죠.”




그렇게 중얼거리는 파시우스의 목소리는 이미 체념의 기색이 다분했다.




루드거는 자신의 후임이 저런 일을 겪는다는 사실에 안쓰러움을 느낌과 동시에, 저 자리에 자신이 없어서 천만다행이라 생각했다.




‘맨손으로 오러를 뽑아 내는 소드마스터를 고작 운전기사로 써먹다니. 인력의 낭비라 해야 할지, 아니면 골수까지 뽑아 낸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군.’




부우웅.




루드거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차량이 출발했다.




파시우스는 한두 번 운전을 해 본 것이 아닌 듯 능숙하게 핸들을 돌렸다.




아직 테러로 인한 보수 작업이 완전히 끝나지 않은 탓인지 도로는 한산했다.




그 위를 검은 차량이 막힘없이 내달렸다.




“그래서 몸 상태는 어떻습니까?”




“치료를 받은 덕분에 충분히 좋아졌습니다.”




“그렇군요. 황녀님의 배려대로 입이 무거운 치료사들을 고용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랬군요.”




“아, 참고로 지금 황성에는 다른 사람들도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선 그날 지하 수로에 들어간 사람들은 훈장을 받게 되기로 했거든요.”




“훈장 수여식 말입니까.”




“썩 내킨다는 반응은 아니네요. 조금 자랑스러우셔도 좋을 텐데 말이죠. 남들은 받지 못해서 안달이잖아요?”




파시우스는 운전대를 잡은 채 피식 웃었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루드거 씨에게 제 훈장까지 다 넘기고 싶습니다.”




“제가 말입니까?”




“그날 지하 수로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고 있습니다. 눈을 떠 보니 다른 장소였는데, 루드거 씨에게 빚을 졌다는 것을 모를 수가 없었죠.”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합니까?”




“아니요. 먼저 정신을 차린 제가 적당히 둘러댔기에 딱히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역시 황녀의 그림자 비수.




일 처리가 매우 깔끔하다.




루드거는 그 부분은 다행이라 생각했다.




이쪽이 혼자 남아서 루이폴트와 싸웠다는 것을 알리면, 힘을 숨기고 있었다는 것을 드러내는 셈이니까.




“물론 눈치를 챈 사람이 없는 건 아니지만요. 혹시 누구인지 궁금하십니까?”




“케이시 셀모어 아닙니까.”




루드거의 입에서 바로 정답이 흘러나오자 파시우스가 오, 하고 감탄사를 흘렸다.




“역시. 그 탐정님과는 이미 서로 알 만한 것은 다 아는 사이신 거로 보이더군요.”




“딱히 그러지는 않습니다만.”




“뭐, 숨기시겠다면 굳이 말리지 않겠습니다. 다만 케이시 탐정님도 루드거 씨가 저희를 구해 줬다는 부분은 함구에 동의했습니다. 오히려 가장 의심하던 테리나 라이언하울 단장을 설득해 주시기까지 했죠.”




“……그렇습니까?”




결국, 케이시는 지금까지도 자신의 정체를 비밀에 붙여 줄 생각으로 보였다.




절친인 테리나에게까지 말하지 않은 것은 다행이다 싶었지만.




이제는 오히려 그런 부분에서 수상함마저 느끼게 된다.




대체 케이시 셀모어는 자신에게 무엇을 바라는 걸까.




‘그때도 어떻게든 나와 같이 싸우겠다고 고집을 부렸었고. 뭐지. 경쟁의식이라도 느끼는 건가?’




루드거를 제외하면 유일하게 악마의 힘에 저항한 사람이 케이시였다.




물론 완벽하지는 않아서 상태가 썩 좋지 않았지만, 거기서 눈을 뜬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었다.




그것은 루드거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으니까.




“혹시 케이시 셀모어도 황실에 있습니까?”




“아, 그건…….”




파시우스는 잠시 대답을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케이시 탐정님은 곧바로 레더벨크로 떠나셨습니다.”




“떠났단 말입니까?”




“예. 황녀님께서 친히 불러 주셨지만, 본인은 피곤하고 바쁘다고 하며 가 버렸죠. 대단하신 분이에요.”




파시우스의 말은 빈말이 아닌, 진심 어린 상찬에 가까웠다.




파시우스가 보기엔 1황녀의 은근한 압박 어린 초대를 시원하게 거절하는 케이시의 행동은 매우 본받을만한 것이었다.




아마 본인은 절대 그러지 못하리라는 걸 알았기에 더욱 그런 걸지도 몰랐다.




“다만, 떠나기 전에 상태를 봤는데, 썩 좋아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정확히 어떤 상태였습니까?”




“오. 드디어 서로 무언가 인연이 있다는 것을 실토하시는 겁니까? 걱정되시는 거 맞죠?”




“……그냥 그런 셈으로 치죠.”




“농담입니다, 농담. 아무튼, 상태라고 했는데 표정이 어둡고 안색이 초췌해 보였죠. 핑계가 아니라 정말 피곤해 보이더군요.”




“그렇습니까.”




“예.”




파시우스는 자신이 아는 이야기는 여기까지라고 선을 그었다.




루드거는 마지막에 케이시가 자신을 향해 애처롭게 보냈던 눈빛을 떠올렸다.




창밖의 풍경을 슬쩍 보던 루드거는 손으로 관자놀이를 긁적였다.




이래서야.




한 번쯤은 직접 찾아가 봐야 할 것 같지 않은가.




“도착했습니다.”




어느덧 차량은 드발크 황성의 입구에 도착해 있었다.




입구에서 사전에 언질을 주었는지 위병들은 차량을 보기 무섭게 바로 문을 열어 주었다.




황성은 테러라는 소란 속에서도 영향을 받지 않은 탓인지 여전히 위용이 넘쳤다.




무수히 솟은 새하얀 첨탑들을 보던 루드거는 기대 반, 걱정 반의 마음을 품으며 안으로 향했다.




* * *




황제를 알현하기 전에 잠시 머무는 대기실.




루드거는 그곳에서 초조해하며 한쪽 다리를 떠는 크리스 베니모어를 미묘한 시선으로 응시했다.




“크리스 선생님.”




“…….”




“크리스 베니모어 선생님.”




“……뭐지?”




루드거가 조금 이름을 강하게 부르자 그제야 크리스가 반응했다.




평소였다면 툭 쏘아붙였어야 할 그의 목소리는 어딘가 힘이 없고 침울함으로 가득했다.




루드거는 크리스가 왜 저러는지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아직도 그 엘프 아가씨를 생각하시는 겁니까?”




“엘프 아가씨가 아니라 레이디 벨라루나다.”




“……예. 아직도 레이디 벨라루나를 생각하시는 겁니까?”




“그녀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마……!”




“…….”




뭐 어쩌라는 건지.




루드거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지하에서의 싸움에서 루드거는 모두를 안전한 장소까지 옮겨 주었다.




그중 벨라루나의 경우에는 한스를 시켜 다른 사람들이 정신을 차리기 전에 먼저 데려갔다.




혹시라도 그녀의 입장을 걸고 넘어갈 것을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문제는 벨라루나가 말없이 사라진 것이 크리스에게 마치 하늘이라도 무너진 것 같은 충격을 선사했다는 거였다.




‘아주 비운의 주인공 납셨군.’




크리스 베니모어는 지금 상사병에 걸린 사람처럼 애타게 벨라루나를 찾고 있었다.




아마 오늘 수여식이 없었다면 그는 망령처럼 수도를 떠돌고 있었으리라.




“……어차피 어디선가 잘 지내고 있을 겁니다.”




“아니! 너는 레이디 벨라루나가 얼마나 심약하고 여린 여성인지 몰라서 하는 말이다! 갑자기 사라졌단 말이다! 갑자기!”




‘……심약? 여린?’




루드거는 순간 여리다는 단어의 의미를 자신이 뭘 잘못 알고 있는지 재검토를 해야만 했다.




잘못 들은 것이 아니었다.




놀랍게도 크리스는 벨라루나를 여린 엘프 아가씨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뒷세계에서 야매 의사로 악명 높았던 벨라루나가 여려?’




지금 당장 범죄 구역에 떨어뜨려 놔도 그쪽을 집어삼킬 수 있는 엘프가 대체 어디가 여리다는 걸까.




지하 수로에서의 일만 봐도 그렇다.




그 치열한 싸움 속에서 벨라루나는 자신의 개인 파우치 안쪽에 키메라와 실험체들의 살덩어리 조직을 몰래 담아 놓기까지 했다.




특제 약품을 꺼내려다가 그걸 보고 루드거도 속으로 얼마나 섬뜩해 했던가.




‘……하긴, 세계수 해킹까지 한 것을 문제조차 삼지 않았는데, 그런 게 무슨 대수겠어.’




루드거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고 크리스를 저대로 놔두자니 같은 공간을 쓰는 입장에서 자꾸 신경이 거슬려서 안 되겠다.




“정 그러면 황녀님께 여쭤보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뭐라고 했지?”




“아일린 황녀님과 따로 뵙게 될 기회가 있을 겁니다. 그때 제가 벨라루나 씨가 어디에 있는지 물어보도록 하죠.”




그러니까 지금은 좀 얌전히 있어라.




루드거는 그 뒷말을 삼켰지만, 크리스는 그 뜻을 알아차렸는지 곧바로 불안하듯 떨던 다리를 멈췄다.




“……그래. 부탁하지.”




얌전해진 크리스를 보며 루드거는 다행이다 싶었다.




이렇게까지 말했으니, 일단 벨라루나에게도 의견을 물어봐야겠다.




‘만날지 말지는 온전히 그녀의 선택이니까.’




다만 벨라루나가 크리스를 대하던 반응을 생각하면, 그녀가 거절할 것 같지는 않다는 점이었다.




일단 서로 만나고 싶을 테니 만나게 해 주긴 하겠지만.




루드거는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청첩장이 날아오는 건 아니겠지?’




그러면 자신은 그때 무슨 표정을 짓게 될까.




잘 상상이 가질 않았다.




“준비되셨습니까? 지금 출발하셔야 합니다.”




황실 소속 시종이 문을 열며 말했다.




루드거와 크리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은 시종의 안내를 따라 넓은 홀로 발걸음을 옮겼다.




수백 명이 들어차고 공간이 남을 ‘하얀 거울 홀’은 이름 그대로 새하얀색으로 이루어진 공간이었다.




은은하게 들어오는 빛이 사방에 들어차 자연스러운 조명을 만들었는데, 그럼에도 전혀 눈이 부시지 않았다.




바닥은 매끈한 대리석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하얀 거울이라는 이름답게 바닥에는 모든 것이 선명하게 비쳤다.




홀이라기보다는 어딘가 성스러운 예배당을 보는 느낌.




루드거는 슬쩍 고개를 들어 올렸다.




반짝이는 보석 같은 샹들리에 너머로 극사실주의적인 명화들이 천장에 크게 그려져 있었다.




미적인 아름다움과 경외감이 동시에 느껴지는 공간.




그곳에서 루드거는 황제를 대면하게 됐다.




물론 혼자는 아니었다.




루드거의 곁에는 크리스 베니모어를 필두로 파시우스, 테리나 라이언하울 등 침투조 멤버들이 모여 있었으니까.




멤버들 중에서 이 자리에 빠진 것은 벨라루나와 케이시 셀모어, 단둘뿐이었다.




루드거는 로테론을 살펴봤다.




그는 여전히 얼굴에 철투구를 쓰고 있었다.




황제를 알현하는 자리에서 얼굴을 감춘다는 것은 일견 불경한 일일 수도 있었지만.




로테론이 얼굴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것은 꽤 유명한 일인지라 특별히 허가가 떨어졌다고 한다.




‘수인이라 했지.’




루드거는 로테론에게서 자신의 수업을 듣는 학생 중 하나인 이오나 오밸리를 떠올렸다.




수인족은 현대 사회에서 꽤 차별을 받는 종족이다.




엘리트주의를 표방하는 마법계에서는 당연히 수인족을 더욱 철저하게 배척했다.




요즘은 그런 인식이 많이 줄었다고는 하지만, 차별의 잔재는 여전히 남아 있는 법.




그런 곳에서 수인이 저 자리까지 올라갔다는 것은.




‘정말 죽도록 노력했다는 거겠지.’




하물며 로테론은 [특이] 마법까지 숨기고 있었다.




그렇다는 것은 그 힘으로 저 자리까지 올라간 것이 아니라는 말이었다.




어지간한 집념이 아니고서야 할 수 없는 일.




그때 로테론이 가면 너머에서 루드거를 곁눈질했다.




루드거는 그 시선을 분명 느낄 수 있었다.




이쪽이 빤히 쳐다봐서, 라는 이유는 아니었다.




로테론도 은근하게 루드거를 의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수여식의 시작을 알리는 힘찬 나팔소리가 울려 퍼졌다.




둘의 시선이 동시에 정면으로 향했다.




시선의 끝에 황제 일가의 모습이 보였다.




광장에서 못 보던 얼굴도 보였다.




황제의 옆에 앉아 있는 황후였다.




‘아일린 1황녀가 누굴 닮았는지 바로 알 것 같군.’




황후는 자식이 셋이나 있는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을 정도로 젊고 아름다웠다.




아일린과 비교하면 자매라고 해도 좋을 정도.




차이점을 꼽자면 어딘가 속이 검은 아일린과 다르게 더 성숙하고 포근한 인상이라 해야 할까.




황후의 옆에는 아일린 1황녀가 서 있었으며, 그 옆에는 2황자와 3황녀인 에렌디르도 있었다.




‘황가의 사람들이 전부 한자리에 모인 건가. 훈장 수여식이라고 꽤나 의식을 한 모양인데.’




특히 성격이 완전히 다른 3남매가 눈에 띄었다.




그 셋 중에서 루드거의 시선을 가장 많이 사로잡는 것은 바로 2황자였다.




많이 봐 온 아일린과 에렌디르와 다르게 2황자를 마주한 것은 지금이 처음.




어지간한 자리에도 얼굴을 비추는 일이 없으니, 정말 희귀한 기회라 할 수 있었다.




2황자는 어떤 의미로 세 남매 중에서 가장 특이한 사람이었다.




‘소문이라는 것이 거의 나지 않은 사람이었지.’




황가의 핏줄이라면 어떤 의미로든 소문이 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타고난 혈통은 어디를 가도 파란을 몰고 오기 때문이었다.




그 에렌디르조차도 귀족들 사이에서 나름 이름이 돌고 있을 정도였으니 말 다 했다.




하지만 2황자는 그런 에렌디르보다도 인지도가 낮았다.




아주 많이.




그것은 본인이 바깥에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은 이유도 있었지만.




루드거는 다른 무언가가 더 있다고 생각했다.




‘2황자 이벨론 폰 엑실리온.’




심약해 보이는 인상은 그의 아버지를 똑 닮아 있었지만, 그 눈빛은 전혀 그러지 않았다.




‘아일린 1황녀에게 밀려서 계승권과 권력, 그 모든 것을 포기했다고 하더니…… 눈빛만 보면 전혀 그렇지 않아 보이는군.’




그때 이벨론 2황자의 시선이 루드거를 향했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혀들었다.




동시에 루드거는 2황자에게 무언가 있음을 직감했다.




‘저 사람. 의도적으로 자신을 감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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