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UA - 325화 엘프 가문 (1)
◈ 325화 엘프 가문 (1)
“파시우스 경에게 듣지 않았습니까.”
“전부는 아니지. 애초에 파시우스는 중간에 기절하지 않았나. 그대가 그걸 모를 리가 없을 텐데?”
루드거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파시우스를 향했다.
어디까지 말했냐는 시선에 파시우스는 어색한 미소를 흘릴 수밖에 없었다.
“저야 황녀님 앞에서 숨기는 게 있으면 안 되거든요.”
“…….”
말은 어쩔 수 없다는 듯하지만, 아마 같은 상황이 주어져도 파시우스는 똑같은 선택을 내렸을 것이다.
그의 모든 행동은 황가를 향한 충성이고, 그것에 반하는 짓은 절대로 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적어도 아일린에게 있어서 파시우스는 숨기는 것 없이 모든 것이 진실해야만 했다.
“그래서 어떻게 된 거냐. 그 악마의 힘을 사용했다는 해방군 간부는 어떻게 됐지?”
“죽었습니다.”
“죽었다고? 어쩌다?”
“제가 죽였습니다.”
루드거는 솔직하게 답했다.
어차피 대부분 일을 알고 있는 아일린 앞에서는 굳이 숨길 필요도 없었다.
오히려 그녀가 알아야만 입을 맞추기 편해 진실을 덮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정작 루드거의 답변을 들은 아일린은 노골적으로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 말이 정말인가?”
“본인이 다 털어놓으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왜 그러냐는 시선으로 멀뚱히 바라보는 루드거.
아일린은 검지로 자신의 이마를 툭툭 두드렸다.
“듣기로는 그 루이폴트라는 놈은 흑마법의 실험체가 되어 대단한 힘을 손에 넣었다고 하던데.”
“예, 맞습니다. 제대로 알고 계시군요.”
“……무려 실종된 마법사들을 갈아서 자신의 몸에 이식해, 개인이지만 동시에 여러 마법을 발현했다 했지. 거기에 더해 세계수의 세포와 악마의 힘까지 다뤄서 육체적으로도 완전하다 했고.”
“예. 그 또한 맞습니다. 소드마스터가 힘에서 밀렸으니 그렇겠죠.”
루드거의 대답에 아일린의 표정이 점점 더 미묘해졌다.
“그걸 그대가 죽였다, 이 말인가?”
“예.”
“어떻게? 듣자 하니 소드마스터의 오러 블레이드로도 제대로 상처를 내지 못했다 하였거늘.”
“어, 황녀님. 정확히는, 상처는 낼 수 있지만 재생력이 너무 뛰어나 모두 회복한 것이 옳은 말입니다.”
“시끄럽다. 네놈은 입 다물고 있어라.”
파시우스가 중간에 끼어들었지만, 아일린의 호통에 곧바로 쭈그러들었다.
“인간의 탈을 벗어 던지고 완전히 괴물이 돼 버린 녀석을 죽였다고? 그것도 혼자서?”
“그 상황에서 도움을 받을 사람은 없었으니 혼자는 맞습니다. 아, 완전히 혼자는 아니군요. 안드레이 세모프의 도움을 받기는 했습니다. 아주 약간이지만요.”
“……상황을 자세히 설명해 보거라.”
파시우스가 기절한 이후의 이야기는 아일린도 잘 몰랐다.
그래서 지금 이 자리에 루드거를 부른 것이기도 했다.
루드거는 일행들이 기절한 뒤, 자신이 일행들을 옮기고 혼자서 루이폴트와 맞서 싸웠던 일을 이야기했다.
그 루이폴트를 여러 마법으로 제압을 했다는 부분에서 아일린은 처음은 흥미롭다는 듯 일관된 태도를 보였다.
그러다 루드거의 설명이 점차 길어지며 루이폴트의 내면에 잠들어 있던 악마 바사라가 눈을 떴다고 했을 때는 처음으로 놀란 감정을 보였다.
“지금 악마라 하였느냐?”
“뭘 그렇게 놀라십니까.”
“악마라…….”
“세계수 내부에 봉인된 악마의 힘은 이미 들은 이야기 아닙니까.”
“악마의 힘을 정제해서 실험체를 강화시켰다는 이야기는 들었어도, 봉인된 악마가 완전히 깨어났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그렇다면 지금 듣게 됐군요.”
루드거의 말에 아일린은 그가 지금 거짓말을 하는 것은 아닌지 지그시 노려보았다.
하지만 아일린은 알고 있었다.
지금 루드거는 전혀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다는 걸.
“……그렇다면 지상에서 목격되었다는 그 검은 폭풍도.”
“예. 그 악마가 저지른 짓입니다.”
루드거는 악마 바사라가 지닌 권능에 대해서 설명해 주었다.
인간의 정신에 간섭하여 내면의 트라우마를 자극하고, 사람들을 환상에 빠뜨리고 정신적으로 망가지게 만드는 것까지 전부.
그 말을 들은 아일린은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보고를 듣자 하니, 그 힘은 렉서러 등급 마법사와 소드마스터까지 쉽게 쓰러뜨릴 정도로 위험한 거로 안다.”
“실제로 둘 다 당했으니 그럴 겁니다.”
“그런데 그대는 어떻게 그 힘에서 멀쩡했지?”
“멀쩡하진 않았습니다. 저도 영향을 받기는 했으니까요.”
“하지만 기절하지 않고 놈과 싸우지 않았느냐.”
“예. 정신력으로 견뎌 냈습니다.”
“마치 잘 단련된 군인처럼 이야기하는구나. 기합이니 정신력이니 뭐니 하는 거로 다 이겨 냈다고 하는 것처럼 말이야. 정말로 터무니없어.”
아일린은 골치가 아프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루드거의 말은 상식적으로 믿기지 않는 것들로만 가득했다.
하지만 모든 상황이, 그리고 루드거의 행동이 전부 진실임을 입증하고 있었다.
아일린 또한 루드거가 평범한 사람과 다르다는 것은 진작 알고 있었으니까.
“운이 좋았습니다. 저는 기본적으로 정신적인 공격에 별로 영향을 받지 않아서요.”
“보통 그런 걸 두고 운이 좋다고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런 셈으로 치죠.”
“…….”
아일린이 눈을 가늘게 떴다.
이야기를 들을수록 루드거에게 조금씩 휘말린다는 생각을 도저히 지울 수가 없었다.
하지만 당장 정보를 지닌 것은 루드거고, 이 상황에서 관계적 우위를 점한 것 또한 그였다.
“그래서 그 악마가 지상으로 도망쳐 피난을 가던 세오른 학생들을 습격한 뒤, 한 여학생의 몸을 빼앗았다고 했나?”
“예.”
“과연. 피난 가던 도중 학생들과 위병들이 기절했던 이유가 바로 그것이로군. 이제야 퍼즐 조각이 맞아떨어졌어.”
습격을 당한 것치고는 신체에 어떠한 상해의 흔적도 남지 않아서 이상하게 여기던 참이었다.
당한 사람들도 모두 자신이 기절하기 전에 무슨 일을 겪었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그래서 해방군이 또 알 수 없는 수작을 부린 거라고 생각했다.
설마하니 그것이 악마의 힘 때문이었을 줄이야.
“그 몸을 빼앗겼던 학생은 괜찮은 건가? 플로라 루모스라 했었지. 하필이면 그 루모스인가.”
“이곳에 오기 전 한번 만나서 살펴보았는데, 딱히 이상한 기색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당장에 드러나지 않았을 뿐, 나중에 어떻게 될지는 모르는 일이지 않은가. 그리고 그것이 루모스 가문의 여식이라면 더더욱 신중히 처리해야 하는 법이다. 앞으로도 계속 지켜볼 필요가 있겠어.”
“그러지 않아도 그럴 생각입니다.”
“마음만 같아서는 이쪽에서 가둬 놨다가 주기적으로 상태를 지켜보고 싶다만…….”
그렇게 중얼거리던 아일린은 슬쩍 루드거를 곁눈질했다.
“자기 학생을 건드린다면 어떤 선생님께서 매우 화를 낼 거 같으니, 그 생각은 말끔히 접어야겠군.”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군요.”
“흥, 잡아떼기는. 뭐 됐다. 그쪽에 신경 쓰며 지켜본다면, 다른 의미로 안심이 되니까 믿고 맡길 수 있겠지. 그래서 그밖에 다른 변화는 없었나?”
“악마가 몸을 빼앗으면서 육체의 재능을 강제로 개화시키기는 했습니다. 그 때문인지 머리색이 약간이지만 변했더군요.”
“그로 인한 부작용은?”
“없습니다. 오히려 마력 감응력과 마력의 총량, 마법적인 부분의 감각이 비약적으로 상승했습니다.”
“사실상 기연을 얻은 셈이로군.”
아일린은 플로라 루모스에게 관심을 품었지만, 그것은 순간의 감정일 뿐이었다.
당장에 아일린에게는 다른 궁금한 것이 너무 많았다.
“그래서 악마는 어떻게 처리한 거지?”
“학생의 정신세계에 들어가 녀석의 정신체를 소멸시켰습니다.”
아일린은 이제 놀라지도 않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절대 평범한 싸움은 아니었겠군.”
“별거 아니었습니다.”
“그래. 그거야 본인에게는 별거 아니었겠지. 남들에게는 아니겠지만 말이야.”
아일린이 왼손으로 턱을 괴며, 오른손을 들어 올려 루드거의 미간을 검지로 가리켰다.
“나는 가끔 그런 생각이 든다. 그대가 언제 갑자기 자기 입으로 대단하다는 극찬의 말을 꺼낼지 말이야. 항상 별거 아니다, 평범한 일이다, 그저 그랬다. 이런 말이 아니라 뭔가 더한 상찬의 말. 그대의 입에서 그런 단어가 나온다는 걸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무서워진다. 마음의 준비가 단단히 필요할 것 같거든.”
아일린은 장난스럽게 비꼬듯 말했지만, 반은 진심이기도 했다.
피식 웃으며 말하던 아일린의 표정이 삽시간에 변한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그래. 이야기는 잘 들었다. 결국 이번 일은 해방군이 벌였지만, 그 대미를 장식한 것은 강림한 악마라는 말이로군.”
“예.”
“그렇다면 더욱 문제가 생긴다. 수도 한복판에서 악마의 힘이라니. 이래서야 놈들이 개입할 명분을 주는 셈이야.”
“놈들이라면…….”
“루멘시스 교단 말이다. 정확히는 그 총본산인 브레투스 성국이지.”
“…….”
루멘시스 교단이라는 이름에 루드거가 입을 다물었다.
그는 레더벨크에서 자신을 찾아왔던 교구장을 떠올렸다.
평소였다면 가만히 있었을 놈들이, 최근 들어 활발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루드거는 그 이유를 모르지 않았다.
“놈들이 과연 이번 상황에서 눈치를 챌 거 같습니까?”
“챌 거다. 이런 쪽으로는 눈치가 빠른 놈들이니까. 수도 한복판에서 검은 폭풍이 일어났다. 누가 보더라도 영 불길한 일인데, 거기에 더해서 너무 많은 사람이 목격했어.”
그나마 다행이라면 그 검은 폭풍을 플로라의 육신을 빼앗은 바사라가 일으켰다는 것과.
루드거가 그것을 실질적으로 저지했다는 사실은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단지 그뿐.
루멘시스 교단은 그것을 빌미로 움직일 것이고, 모종의 방법을 통해 진실에 접근할지도 몰랐다.
“당장에는 어떻게든 이쪽에서 최대한 정보를 감추고 있지만, 그래 봤자 시간벌기에 지나지 않을 거다. 놈들은 반드시 개입할 거고 조사에 착수하겠지. 그렇게 된다면…….”
“……저라고 용의선상에서 피해갈 수는 없다는 말씀이군요.”
“너뿐만이 아니다. 그 루모스가의 여식인 플로라라는 아이도 같이 휘말리게 되겠지. 두 사람이 비밀로 한다고 하더라도, 세상에 영원히 숨길 수 있는 진실은 없으니까.”
아일린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지 않은지 가볍게 혀를 찼다.
“참으로 무도한 놈들이야. 신의 이름을 앞세우며 자신들의 특권을 어떻게든 사용하려고 하니까. 감히 나를 비롯해 우리 일가의 일에 끼어들려고 하고. 하지만 안타깝게도, 놈들이 작정하고 나선다면 쉽게 막을 수가 없어.”
“브레투스 성국이 대단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것도 결국 옛일이 아닙니까.”
“지금이야 옛날보다 그 위세가 줄어들었다고는 하지만, 나는 그 말을 쉽게 믿지 않아. 그대도 알 텐데. 엑실리온 제국이 들어서기 전, 전대 왕국이 어떻게 되었는지.”
루드거도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엑실리온 제국이 나타나기 전, 과거 왕국은 지하에 시설을 만들고 여러 실험을 진행했다.
무엇을 위해 지하에 그렇게 거대한 구조물을 만들었는지 이유는 모른다.
다만 그 사건에 엘프들 또한 연관되어 있으며, 거의 성공할 뻔한 무언가는 바사라의 개입으로 실패해 버렸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지하에서 그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무엇을 말이지?”
“지하 시설에 어쩌다가 죽은 세계수가 존재하게 됐는지, 그리고 그 안에 악마가 어쩌다 봉인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아일린은 그 말을 왜 지금 하냐며 보채지 않았다.
서로가 서로에게 숨기는 패는 한 두 개는 있어야만 했다.
그게 두 사람의 관계가 아니었던가.
“그건 좀 흥미롭구나.”
“그 이야기에 앞서, 지하에서 세계수를 키우는 데 도움을 준 자들이 있었습니다.”
“……엘프인가.”
“예.”
엘프라는 말에 아일린은 등받이에 등을 기대며 팔짱을 꼈다.
상념에 빠진 그녀는 골똘히 생각하는 듯하더니 무언가를 떠올렸는지 다물었던 입술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그런 이야기를 들었다. 엘프들의 왕국에는 특별한 귀족들이 존재한다고.”
“예. 저 또한 들었습니다. 원로 가문이라 했죠.”
“세계수를 관리하는 가문부터 숲 바깥을 관할하는 가문까지 여러 개로 나뉘어 있다고 하지. 그중 단연코 최고의 권력을 지닌 것은 숲의 중심, 세계수를 지키는 가문이고.”
그 가문을 엘프 왕국의 일곱 뿌리라 부른다.
“하지만 그거 아는가? 지금은 세계수를 지키는 가문이자 단연코 최고의 권력을 지녔다 알려진 리프레 가문이지만, 과거에는 그러지 않았다는 걸.”
“그것이 정말입니까.”
“과거에 리프레 가문은 일곱 뿌리 내에서도 그렇게 높은 순위가 아니었다고 한다. 당시 세계수를 섬기던 가문은 따로 있었으니까. 하지만 모종의 사건이 벌어지고, 리프레 가문이 세계수를 맡게 된 모양이다.”
“설마 그 모종의 일이라는 것이…….”
“그래. 단지 추측일 뿐이지만, 수도의 지하에 있는 그 세계수와 관련된 일일 가능성이 커 보여. 그렇게 생각하면 앞뒤가 딱 맞는군.”
아직은 추측의 단계일 뿐이었지만, 루드거는 그것이 매우 신빙성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애초에 지하에 세계수를 키울 정도라면, 엘프들의 도움이 없이는 불가능했다.
하지만 엘프라고 해서 무조건 세계수를 키울 수 있는 능력을 지닌 것은 아니다.
당장에 벨라루나의 경우만 보더라도, 세계수에 접촉했다는 이유로 왕국에서 쫓겨나지 않았는가.
세계수는 엘프들이 섬기는 신목.
그것을 함부로 늘리는 건 엘프들에게 있어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모독하는 것이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제로 오더가 말했지. 과거 엘프 중에서는 매우 진취적인 자들이 있었다고.’
루드거는 머릿속으로 상황을 그려 보았다.
리프레 가문 이전에 존재했던 가문.
그렇다면 해당 가문은 대체 어떻게 됐을까.
굳이 따지자면 엘프 사회에서 축출됐을 가능성이 컸다.
단순한 추방을 넘어, 가문 자체가 사라졌을 수도 있고 말이다.
“그랬다면 당시 엘프 사회에선 대혁명이 벌어졌겠군요.”
“그래. 다만 옛날의 일이기도 하고, 워낙 폐쇄적인 곳이라 이걸 알고 있는 사람은 몇 없다. 다만.”
“다만?”
“당시 축출됐던 가문의 생존자들이 아직 대륙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말이 있더군.”
“놀랍긴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군요.”
“그래. 한때 엘프 왕국의 최고 가문으로 군림하던 자들일 테니, 이 대륙 어딘가에 잘 도망쳤을 터. 잘만 하면 마주칠 수도 있고, 그들에게서 그날의 진실을 들을 수도 있겠지.”
“허황된 소리입니다. 그들은 추적자들을 생각해서 정체를 감추고 지낼 텐데, 어떻게 마주한다는 겁니까. 그야말로 사막에서 바늘을 찾기입니다.”
루드거는 어차피 자신과 관련 없는 일이라 생각했다.
멸망한 엘프 가문의 후계자가 찾는다고 찾아지는 자들이 아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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