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UA - ◈ 331화 관계의 벽 (1)

 ◈ 331화 관계의 벽 (1)




[들었어요. 거기서 많이 고생하셨다면서요?]




통신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엘리사 총장의 목소리.




루드거는 상대가 자리에 없음에도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별거 아니었습니다.”




[별거 아니라뇨. 어렴풋이 전해 들은 이야기만으로도 루드거 선생님이 얼마나 큰 활약을 하셨는지 짐작이 가던데요.]




“……감사합니다.”




[어머. 이제는 별로 겸양을 안 떠시네요?]




“겸양 말입니까.”




[네. 평소 루드거 선생님이었다면 해야 할 일이었다. 별거 아니었다. 뭐 이렇게 말씀하셨을 거잖아요.]




“…….”




너무나도 정곡을 찌르는 말에 루드거는 입을 다물었다.




사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똑같은 말을 하려 했기 때문이었다.




[왜 대답이 없어요? 제가 정곡을 찔렀나?]




“……부정하지는 않겠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그러지 말라고 말했어요? 너무 겸양 떤다고.]




“안 그래도 근래 그런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가장 최근에는 누가 그런 말 했는데요?]




“아일린 폰 엑실리온 1황녀님입니다.”




[와. 황가의 사람과 대면한 것도 놀라운데, 본인에게 그런 말을 직접 들었어요? 둘이 꽤 친한 사이이신가 보다.]




“그럭저럭 아는 사이입니다.”




[아무튼 그런 말을 들었을 정도라면, 평소에도 저 말고도 다른 사람들에게 비슷한 말을 자주 했다는 거네요.]




“생각해 보니 그런 것 같습니다.”




루드거가 그렇게 답하자 통신기 너머에서 엘리사가 간드러지게 웃었다.




[아, 미안해요. 웃으면 안 되는데.]




“웃기면 웃으셔도 됩니다.”




[그거 아세요? 루드거 선생님은 어떨 때는 정말 간교하면서도, 또 어떨 때는 되게 뻔하고 우직한 거? 그런 걸 보면 어떤 게 진짜 모습인지 모르겠다니까. 아니면 둘 다 진짜인가?]




“…….”




[아무튼, 잡설은 여기까지만 하고. 루드거 선생님도 일단 들으셨을 거예요. 이번 현장 학습이 엉망이 됐으니까요.]




“예. 다친 학생들이 완전히 병실에서 일어나기 전까지는 저희는 이곳에 머물러야 한다고 하셨죠.”




[그렇죠. 그러는 와중에도 시간은 흐르고, 본래 계획했던 학사 과정은 계속 뒤로 미뤄지고요. 이번 1, 2학년들만 방학을 늦게 시작할 수도 있겠네요.]




“학생들의 원성이 자자하겠군요.”




[그게 아니라면, 일단 남은 학사 과정을 최대한 빨리 끝내는 수밖에 없어요. 하루에 수업 일정을 1.5배로 늘려야 하고요.]




“학생들이 죽어 나가겠군요.”




[그게 또 나름 학창 시절의 매력 아니겠어요? 학창 시절 하니 생각나는 건데, 저 다닐 때는 지금보다 훨씬 더 눈코 뜰 새 없이 바빴거든요.]




엘리사는 그땐 그랬지, 하는 말을 하더니 곧바로 화제를 전환했다.




[루드거 선생님께 하는 말이지만, 아무래도 특정 수업의 비중을 늘려야겠어요.]




“실전 마법과 기초 전투 교습 말씀하시는 거군요.”




[척하면 척이시네요. 맞아요. 원래부터 중요성이 크기는 했지만, 이번에 수도에서 터진 일로 확실히 깨달았어요. 마법은 이론적인 부분도 중요하지만, 역시나 실전에서 사용하지 못하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걸요.]




세오른의 학사 과정에서 실전 마법에 대한 수업은 항상 있다.




다만, 1, 2학년의 경우에는 그 비중이 작았다.




본격적으로 배우는 것은 3학년 때부터였고, 루드거도 그게 나쁘다곤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 수도에서 터진 테러 사건 때문에 엘리사는 생각을 바꿨다.




[현장 학습 기간에 겹쳐서 그런 일이 벌어졌어요. 우연이라고 치부하기에는 꽤나 공교롭죠.]




“해방군도 세오른 학생들을 노리고 테러를 벌인 것이 분명합니다. 실제로 대부분 테러 발생 구역이 학생들이 멘토들과 모여 있던 곳이기도 했고요.”




[제 말이요. 물론 이번 사건이 상당히 특수한 경우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내버려 둘 수도 없거든요.]




루드거는 고개를 끄덕였다.




“총장님께서는 이제 학년의 구분 없이 실전 마법에 대해서 배워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거군요.”




[그건 루드거 선생님도 동의하시지 않으시나요? 그날 크리스 베니모어 선생님과 내기를 하셨을 때, 에이단이라는 학생에게 기동 술식을 가르치셨잖아요.]




사실 루드거도 이론과 실전에서 뭘 더 중요하게 여길지 선택하라 한다면, 여지없이 실전을 고를 것이었다.




[게다가 해방군은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도 않았죠. 언제 또 어디서 갑자기 학생들을 노릴지 몰라요.]




“동의합니다.”




[게다가 루드거 선생님도 아시겠지만, 저희에게 있어서 적은 단순히 해방군만 있는 건 아니거든요.]




엘리사의 의미심장한 말.




콕 짚어서 말하지 않았지만, 루드거는 엘리사가 무엇을 지칭하는지 알고 있었다.




검은 여명회.




엘리사는 그들을 가장 경계하고 있는 것이었다.




‘물론, 검은 여명회만 있는 건 아니지.’




세오른에는 적이 많다.




세오른이 뭘 잘못해서 있는 것은 아니다. 그저 세간에서 주목을 받는 조직은 열이면 열 견제를 받게 되니까.




이 넓은 대륙에는 마법을 가르치는 교육 기관이 세오른만 있는 것이 아니다.




세오른은 여러 아카데미 중에서 ‘제일’이라는 칭호를 지닌 것이지, ‘유일’한 아카데미는 아니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세오른을 ‘제일’이란 자리에서 끌어내리고자 하는 다른 국가의 아카데미들도 존재한다.




그리고 세오른은 하나의 거대한 조직이지만, 그만큼 막대한 예산을 잡아먹는다.




‘그리고 그 예산을 뒤에서 후원해 주는 자들이 따로 있지.’




거대 기업, 억만장자 자산가, 국가 단위의 조직까지.




드발크 황성 또한 세오른에 예산을 지원해 주는 큰손 중 하나였다.




하지만 모든 큰손들이 세오른이 잘되길 바라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세오른이 대륙에서 얼마나 좋은 평가를 받는지 신경 쓰지 않는다.




원하는 것은 오직 하나.




자신이 투자한 세오른에, 남들보다 더 거센 입김을 불어 넣는 것이다.




‘아무리 총장이라 하더라도 투자자들의 압박을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그나마 지금까지 엘리사가 뛰어난 수완을 선보이며 투자자들의 불만을 계속해서 회피하거나 억눌러 왔지만.




이번 현장 학습 테러 사건은 가만히 있던 투자자들이 엘리사를 물어뜯을 명분을 주기 충분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지금 걱정해 주시는 거예요? 좀 많이 감동이네요.]




“이래 봬도 저는 세오른의 기획처장입니다. 총장님께서 우려하시는 일은 저 또한 온전히 겪게 된다는 거죠.”




[뭐, 그것도 그렇죠. 하지만 명분뿐인 자리라, 나 몰라라 해도 상관없었을 텐데요.]




“그런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말입니다. 괜히 무시했다가 귀찮은 파리들이 꼬이는 것도 사양입니다.”




루드거는 사실상 투자자들의 입김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 말에 엘리사는 통신기 너머에서 대답이 없었다.




하지만 루드거는 엘리사가 흡족한 미소를 짓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루드거 선생님은 정말 척하면 척이시네요. 대체 왜 지도 교사들이 마음에 드는 학생들을 어떻게든 대학원생으로 편입시키려 하는 건지 이제야 이해가 가요. 루드거 선생님. 제 대학원생 하실래요?]




“……무서운 비유는 그만둬 주시겠습니까.”




[농담이에요, 농담. 사실 반은 진담이지만요. 아무튼, 당장은 이쪽에서도 향후 대처 방안과 일정 짜느라 바쁘니까, 그동안에는 루드거 선생님도 푹 쉬세요. 휴가 갔다는 생각으로요.]




“별로 휴가라 생각은 안 합니다만, 할 일이 없는 것도 사실이군요.”




[황성에서 묵는 것이 쉬운 일인 줄 아세요? 그걸 빌미로 황성에서 저희에게 뭔가를 요구할 걸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뼈아픈 일이지만, 기왕 이렇게 된 거 뽑아 먹을 건 다 뽑아 먹어야죠.]




엘리사는 다음에 연락하기 전까지 푹 쉬라는 말을 남기며 통신을 끝냈다.




루드거는 통신기를 뒤로하고 방 밖으로 나왔다.




그가 엘리사와 대화를 나눈 곳은 황성 내부에서도 특별한 장소로, 외부와 통화할 수 있도록 따로 준비된 공간이었다.




‘통신실도 따로 있을 정도라니. 황실이 대단하긴 대단해.’




심지어 황실 근위대가 곳곳을 지키고 있었다.




안쪽의 정보가 혹시라도 바깥에 새어 나가지 않게끔 철저하게 감시하는 것이리라.




‘그보다 휴가인가…….’




엘리사는 무려 그 귀하다는 유급 휴가니까 쉴 거면 푹 쉬라고 했다.




루드거도 그런 제안을 굳이 거부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쉬라고 말을 한들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많이 쉬어 봤어야 알지.’




루드거는 자신의 삶을 반추하며 돌이켜보았다.




생각해 보니 마음을 놓고 푹 쉬었던 적이 거의 없었다.




그는 대부분 삶을 무언가에 열중하는 것으로 보냈다.




스승님과 지낼 때도 마법을 배우느라 바빴고.




홀로 독립을 했을 때는 여러 신분을 바꿔 가며 온갖 장소를 떠돌며 여러 사건을 겪었다.




숨 쉴 틈 없이 계속 앞을 향해 달리는 삶.




그것이 루드거의 인생이었다.




루드거는 자신이 바라던 목표를 이루기 전까지는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살리라 의심치 않았다.




오히려 이제는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불안했다.




강박증 때문에 계속 일을 하는 자신에게 휴가라니.




‘뭐, 휴가라고 했지만, 무조건 쉬어야 하는 것은 아니니까.’




루드거는 굳이 휴가라는 말에 얽매이지 않기로 했다.




이번 테러 사건이 끝나고 뒷정리를 해야 할 것이 얼마나 많던가.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그날의 목격자들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눠야 하는 것이었다.




‘플로라와는 충분히 대화가 됐고, 에이단은 만델리나가 책임진다고 했으니. 이제 남은 건…….’




루드거는 애쉬그레이 머리색을 지닌 학생을 떠올렸다.




리네.




자신의 수업을 듣는 학생이자 무속성 마력과 판정안의 소유자.




그리고.




루드거의 죄책감이기도 했다.




‘일단 만나서 대화를 해 보긴 해야 하는데.’




막상 대화할 생각을 하니 머리가 상당히 복잡하다.




그날 리네에게 보여 준 자신의 마법도 그렇지만, 그녀가 갑자기 각성해 버린 판정안은 어떻게 설명한단 말인가.




그 악마의 존재는 또 어떻고.




‘여기까지 온 이상, 바사라를 처리한 게 나라는 사실을 리네도 눈치챘을 거다.’




아마 리네 또한 계속 궁금해하고 있을 것이다.




끝까지 모르쇠로 잡아뗄까?




루드거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고 그런 부분을 말하지 않고 넘기자니 제로 오더의 존재가 자꾸 눈에 밟혔다.




리네는 순진한 것 같으면서도 눈치가 있는 영민한 아이다.




제로 오더같이 수상한 녀석에게 쉽게 속을 성격은 아니었다.




하지만 만에 하나라는 것을 배제할 수가 없었다.




‘안일한 판단은 독이 된다.’




루드거도 자신이 세오른의 교사가 될 줄 몰랐으며, 이곳에 와서 리네와 프로이덴이라는 과거의 연을 다시 마주하리라 생각지도 못했다.




그럼에도 이런 일들이 벌어졌다.




세상은 결국, 단순히 추측과 이성으로만 굴러가지는 않는다는 말이었다.




분자의 움직임 하나까지 모두 계산해서 미래의 일을 산출해 내는 악마의 이야기는 전부 허구일 뿐이다.




루드거는 어떻게 하면 리네에게 자연스럽게 말을 걸 수 있을지 고민하며 긴 복도를 거닐었다.




루드거는 새하얀 복도의 모퉁이를 돌려는 순간 한 사람과 부딪힐 뻔했다.




먼저 기척을 느끼고 발걸음을 멈춰서 망정이지, 그러지 않았다면 정말로 부딪혔으리라.




루드거는 자신과 부딪힐 뻔한 상대방을 빤히 응시했다.




그것은 상대방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의 눈동자가 동시에 당혹감에 물들었다.




설마하니 이런 장소에서 마주하게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것이다.




‘인생은 정말이지, 항상 예측 불가능한 일들의 연속이로군.’




루드거가 그렇게 생각할 때, 내심 마음이 복잡한 것은 리네도 마찬가지였다.




황성에서 눈을 뜨고 안쪽에서 지내길 며칠.




리네는 그 기간 동안 계속 루드거에 대해서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그날 봤던 선생님의 모습. 그건 대체 뭐였을까?’




몸에 검은 그림자를 두르며 자신의 그림자에서 불쑥 튀어나오던 루드거의 모습.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에 몸을 빼앗긴 플로라와, 그런 플로라와 맞서 싸운 루드거.




대체 검은 폭풍이 몰아치던 그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이야기를 들어보면 플로라는 무사하고, 루드거도 괜찮다고는 하는데.




풀리지 않는 의문투성이.




리네는 그것이 너무 궁금해서 어떻게든 루드거와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특히 요즘 자신의 눈이 예전 같지 않았다.




상태가 나빠졌냐면 그건 아니다. 오히려 지나치게 좋아져서 문제였다.




거울 너머에서 별빛처럼 반짝이는 자신의 눈을 보면, 자기도 모르게 그 아름다움에 멍하니 바라볼 때가 많을 정도.




게다가 원래부터 희미하게 보이던 사람의 기운 같은 것이, 지금은 타오르는 불꽃처럼 매우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리네는 이 뜻하지 않은 힘을 별로 달갑지 않게 여겼다.




그래서 루드거에게 물어보고 싶었다.




선생님이라면 왠지 자신의 눈이 왜 이렇게 됐는지 알 것 같았다.




‘만난다면 뭐라 말하지? 아니, 그보다 그전에 만날 수는 있나? 무턱대고 다가가면 민폐는 아니겠지?’




그런 고민을 조금 전까지도 계속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마주칠 줄이야.




리네와 루드거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두 사람 다 하고 싶은 이야기는 많았지만, 어떻게 말문을 열어야 할지 고민이었다.




“그…….”




“저…….”




두 사람은 동시에 입을 열었다 다물었다.




리네가 용기를 내서 말했다.




“서, 선생님 먼저 말씀하세요.”




이쪽을 조마조마한 표정으로 올려다보는 리네의 모습에 루드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피차 할 말이 있으니 어디 조용한 곳에서 이야기라도 나누지.”




“어, 정말요?”




“싫은가.”




“아, 아니요? 저는 괜찮아요. 오히려 선생님이 바쁘실 거 같아서…….”




“나는 상관없다. 너도 괜찮다고 했으니, 적당히 근처 벤치에라도 앉도록 하지.”




루드거의 제안은 리네에게도 반가운 것이었기에 그녀는 고개를 위아래로 세차게 흔들었다.




“네!”




그렇게 함께 걷는 두 사람의 모습을, 세디나가 몰래 숨어서 조용히 지켜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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