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UA - 334화 백의의 사자 (2)
334화 백의의 사자 (2)
타국의 사절단을 맞이하기 위한 커다란 응접실.
그 넓은 공간을, 두 집단이 좌우로 양분한 채 서로를 응시하고 있었다.
한쪽은 백색의 신관복과 예복 위에 백색 갑옷을 덧대 입은 성기사와 사제들.
다른 한쪽은 은색 제복을 입은 채 도열한 황실수호기사단.
귀중한 손님을 모시는 공간이었지만, 응접실 내부의 분위기는 험악하기 그지없었다.
“음. 차 맛이 좋군요.”
무겁고 험악한 분위기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는 듯 여유로운 태도를 고수하는 남자의 한마디.
꽤 흔한 인상을 지닌 남자였다.
탁한 갈색 머리카락과 약간의 주근깨를 지녔는데, 그 표정에는 한껏 거만함이 깃들어 있었다.
그와 마주 보고 앉은 아일린이 가늘게 뜬 눈으로 남자를 쏘아보듯 응시했다.
“그런데 제가 듣기로는 제국에 더 좋은 찻잎이 많다고 들었습니다만, 미처 준비되지 않았나 보군요. 아, 물론 이 차 맛이 나쁘다는 건 아닙니다만, 제가 마시기에는 조금 급이 떨어지지 않습니까.”
그 무례한 발언에 수호기사단이 발끈했다.
하지만 잘 훈련이 된 만큼 함부로 입을 여는 사람은 없었다.
그 대신 살기 어린 시선으로 상대방을 압박하듯 쏘아보았다.
그러나 상대방은 오히려 그런 시선에도 고개를 빳빳하게 세웠다.
자신의 실력을 맹신해서가 아니라, 등 뒤에 도열한 성기사들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상으로.
자신의 곁에 다소곳이 앉아 있는 여인을 믿고 있는 것이기도 했다.
“엑실리온 제국의 수도에서 벌어진 불미스러운 사건은 저희도 전해 들었습니다. 정말 안타까운 일이군요.”
“브레투스 성국에서 사절단까지 파견해 주면서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전해 주니 힘이 나는군.”
아일린은 안색 하나 바꾸지 않고 말했다.
“한데, 안타까운 일에 걱정하며 도움을 주려는 것치고는 꽤나 사람을 많이 이끌고 오신 모양이야.”
아일린의 시선은 껄렁대는 남자 곁에 앉아 있는 여인에게서 떠날 줄 몰랐다.
새하얀 의복을 입고 눈가에 티아라를 착용한 여인이었다.
입가에 은은한 미소를 머금은 채 단아하게 앉아 있었는데, 그 모습이 인간을 본뜬 마네킹 같아서 묘한 소름이 돋았다.
아일린은 저 여인의 정체가 무엇인지 단번에 파악했다.
‘본국의 제사장인가.’
브레투스 성국은 국가마다 루멘시스교단 지부를 설립해 그곳에 자신의 사람들을 보냈다.
한 국가의 대도시급마다 반드시 한 명씩은 존재한다는 교구장이 바로 그러했다.
자신의 구역에서는 나름 어깨에 힘을 줄 수 있는 자들.
그러나 그런 교구장도 본국으로 돌아가면 고개를 조아릴 수밖에 없는 것이 바로 눈앞의 상대였다.
제사장.
루멘시스교에서 제사장은 보통 신과 인간의 사이를 이어 주는 통로이자 통신구의 역할을 한다.
그렇기에 인간들 사이에서 ‘가장 신에 가까운 인간’이라 평가를 지니고 있었다.
브레투스 성국에서 지위가 낮을 수가 없는 직책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젊은 여인이라.’
제사장이라고 한다면 기본적으로 나이가 지긋한 늙은 사람을 떠올리겠지만, 브레투스 성국은 그러지 않았다.
그들은 전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20대 중반으로 보이는 여인들을 제사장으로 삼았다.
그 숫자는 채 10명도 되지 않지만, 제사장이라는 자들이 하나같이 동일하게 눈에 티아라를 쓴 여인이라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아일린이 자신을 빤히 응시하는 걸 아는지, 무명의 제사장은 그런 아일린을 돌아보며 입가에 머금은 미소를 더욱 진하게 만들었다.
이쪽을 비웃거나 농락하려는 것이 아닌, 진정 자애에서 빗어진 것 같은 미소였다.
그러나 아일린은 그 미소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원체 험한 꼴을 보고, 어두운 세계에서도 영향력을 뿌려서인 건지, 저런 자들을 만나면 항상 마음이 불편했다.
하물며 상대가 그 브레투스 성국 출신이라면야 더더욱.
‘게다가 테러 사건이 끝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이 정도 병력을 이끌고 수도에 방문했다. 이쪽이 미처 대비할 틈도 없이, 마치 이럴 걸 알고 준비라도 한 것처럼.’
설마 들킨 걸까. 아니면 단순히 우연히 겹친 것일 뿐?
아일린이 속으로 여러 가능성을 생각하고 있을 때, 제사장 대리가 언짢은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무례하시군요. 지금 당신이 누구를 마주하고 있는지 모르는 겁니까?”
그래, 이 자리엔 저런 녀석도 있었지.
제사장의 힘이 자신의 힘이라고 철석같이 믿는 멍청한 여우가.
“그쪽이야말로 무엄하구나. 지금 누구를 마주하고 있는지 모르는 게냐?”
“당신은 황제가 아닙니다.”
“그러나 나는 황제가 될 수 있지. 제사장의 대리지만 제사장이 될 수 없는 그대와 달리 말이야.”
아일린의 날카로운 지적에 대리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제사장의 권위를 빌려서 제멋대로 설치고 다녔지만, 그의 마음 한편 깊은 곳에는 절대로 제사장이 될 수 없다는 절망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눈치가 빠른 아일린이기에 상대방의 그런 약점을 단번에 파악했다.
제사장 대리는 무어라 말하려다가 이내 만면에 재수 없는 미소를 머금었다.
“예. 뭐, 저는 이 자리에 만족해서 말입니다. 그리고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지 않겠습니까?”
“흥. 시답잖은 말 돌리기는 되었다. 어서 여길 찾아온 본론이나 말해라.”
“말하지 않았습니까. 안타까운 일에 애도를 표하기 위해서라고 말이죠.”
“그래서 사제를 데려온 것은 그렇다 쳐도, 성기사들까지? 누가 보더라도 무력을 사용하려는 거로 보인다만.”
“물론 무력은 필요하죠. 다만 그 대상은 제국이 아닐 뿐.”
제사장 대리는 눈을 게슴츠레 뜨며 아일린의 모습을 위에서 아래로 쓰윽 훑었다.
“하지만 대답의 여하에 따라 제국이 될 수도 있습니다.”
“…….”
오만한 말이다.
감히 제국의 안마당인 황궁의 안에서 저런 망발을 지껄이다니.
다른 나라의 사절단이었다면, 사절이고 뭐고 아일린은 본인이 검을 뽑아 놈의 목을 쳤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는 브레투스 성국의 사절이다.
지금은 과거에 비해서 빛을 잃었다고는 하나, 브레투스 성국이 지닌 힘은 여전히 만만치 않았다.
‘특히 놈들이 오래전부터 타국의 수뇌부에 개입해 온 방식도 마음에 걸리고.’
차라리 대놓고 국력이 강한 나라였다면, 이렇게까지 골치가 아프지 않았을 것이다.
그 이상으로 정체를 알 수 없는 껄끄러운 힘을 지니고 있으니, 그게 오히려 불안감으로 작용하는 것이었다.
이래서 비대칭 전력을 지닌 놈들은 상대하기 귀찮다는 거다.
아일린은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며 입을 열었다.
“그쪽이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군. 그래서 그 무력은 어디에 쓸 생각이지?”
“최근 제국에서 벌어진 일의 소식은 조금 전 말했다시피 저희도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들리는 보고 중에서 특이한 사항이 하나 있다고 하더군요.”
“특이한 사항?”
“수도의 한복판에서 딱 봐도 불길해 보이는 검은 폭풍이 일어났다고요. 혹시 뭐 알고 있는 일이라도 있습니까?”
마치 이쪽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부 다 꿰뚫어 보겠다는 눈빛.
그 모습에 아일린은 올 것이 왔다고 생각하면서도 눈앞의 건방진 제사장 대리를 비웃었다.
꼴에 비슷한 자리에서 몇 번 목에 힘을 준 경험이 있는 것 같다만.
고작 저 정도밖에 되지 않는 실력을 갖추고서 자신과 맞먹으려 하다니.
실로 건방지지 않은가.
“글쎄다. 갑자기 검은 폭풍이 일어났다는 것은 나 또한 들어서 아는바. 하지만 그것은 오래 가지 않고 금방 그쳤지.”
“짧건 길건 결국 일어났다는 게 중요한 일이죠. 그래서 그 검은 폭풍이 무엇인지 알고는 있습니까?”
“그 끔찍한 사건이 끝난 지 이틀밖에 되지 않았다. 무언가를 알아내기엔 턱없이 짧은 시간이지.”
“알면서도 묵과하고 있는 것은 아니고요?”
제사장 대리의 말은 어떻게 보면 제국이 그 검은 폭풍과 관련이 있는 게 아니냐고 의심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 말을 들은 수호기사단은 화를 내기보다는 오히려 당황스러워했다.
상대방의 말이 선을 넘어도 보통 넘은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싸아아아.
과연 그 도를 넘은 무례함 때문인지 아일린의 표정이 삽시간에 차갑게 가라앉았다.
수호기사단의 압박에도 꿈쩍하지 않았던 제사장 대리는 아일린의 표정을 마주하는 순간 등골이 싸늘해지는 걸 느꼈다.
마치 눈빛이 물리력을 지니고서 자신의 몸을 날카롭게 헤집는 것 같다.
시선이 닿는 부위가, 옷을 껴입고 있음에도 차갑고 서늘했다.
얼음의 송곳이 피부 위를 쿡쿡 찌르는 느낌.
아무리 겁을 상실한 제사장 대리라 하더라도, 아일린이 싸늘하게 쏘아보는 시선은 견디기 힘든 것이었다.
“한 번.”
“…….”
“조금 전 그대의 무례를 이번 한 번만 넘겨주겠다. 하지만 명심해라. 다음은 없다는 걸.”
단순한 허세가 아닌 진심으로 무언가 저지를지도 모른다는 목소리.
제사장 대리는 자신이 겁먹었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고개를 차분하게 끄덕였다.
물론 그것은 본인의 생각일 뿐, 창백한 안색과 흐르는 식은땀, 떨리는 눈동자가 그가 겁에 질렸다는 걸 여실히 보여 주고 있었다.
“아무튼. 그 검은 폭풍이 발생한 이유는 우리도 모른다. 해방군 놈들이 흑마법사와 손을 잡았으니, 놈들이 무언가를 저질렀을지도 모르지.”
“흑마법사가 그런 위험한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오히려 반대로 묻고 싶군. 그대들은 흑마법사 놈들을 너무 우습게 여기는 것이 아닌가?”
“……하. 정말 끝까지 한 마디도 안 지려고 하시는군요.”
“아무렴. 차기 황제인데, 어찌 제사장 대리 따위에게 밀려서야 되겠느냐.”
아일린의 통렬한 일침에 제사장 대리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더니 이내 낮게 깐 목소리로 읊조렸다.
“알겠습니다. 제국에서 이토록 비협조적으로 나오니, 저희가 따로 알아보는 수밖에요.”
“마음대로 하도록. 우리는 그대들을 이곳까지 들여보내 준 것만으로도 우리는 너그러운 자비를 베풀어 준 셈이니까.”
“……본국이 이 이야기를 들으면 가만히 있을 것 같습니까?”
“본국? 네놈은 제사장의 대리지, 브레투스 성국의 대리가 아니지 않은가. 그럼에도 국가의 이름을 입에 담는 건가? 실로 오만한 말이구나.”
그 말에 제사장 대리는 사색이 되었다.
반쯤 협박을 위해 한 말을, 아일린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자신의 무례함으로 되돌려 버린 것이다.
제사장 대리가 다급한 시선으로 옆에 앉은 제사장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은 자신이 절대로 그런 의미로 한 말이 아님을 다급하게 피력하고 있었다.
“과연, 차기 황제는 매우 강인하고 아름다우며 총명하다고 하더니. 그 말이 전혀 허언됨이 없네요.”
놀랍게도 입을 연 것은 지금까지 가만히 앉아만 있던 제사장 본인이었다.
“말을 못 하는 줄 알았다.”
“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 뿐이랍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상대가 상대인 만큼 가만히 있을 수가 없겠네요.”
“하.”
아일린은 그 말에 웃음으로 응대했다.
제사장 본인이 나서기 시작했다는 부분에서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머저리에게 대신 일을 맡기기에는 저쪽도 불안하다는 거겠지.
아쉽게 됐다.
조금 더 골려 줄 생각이었는데.
다만, 아일린의 생각과 다르게 제사장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희는 이만 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이렇게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도, 이 세상 어딘가에는 불온한 무리가 흉계를 꾸미고 있을 테니까요.”
아무렴 너희만큼 불온한 무리가 있겠느냐.
아일린은 그 말을 하려는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껄끄럽고 귀찮은 놈들이 알아서 가 준다고 하니, 이쪽이 고마울 따름이었다.
제사장을 따라 우르르 빠져나가는 루멘시스 교단 사람들을 보며 아일린은 혀를 쯧 하고 찼다.
‘일단은 당장에 급한 불은 끈 것 같다만, 놈들의 반응을 보면 여전히 이쪽을 의심하는 것 같군.’
일단 최대한 숨긴다고 숨겼는데, 저들이 조사를 시작하면 어떤 흔적을 잡아낼지 모른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루드거에게도 그 마수를 뻗게 되겠지.
루드거의 반응을 보면 그는 루멘시스교를 아주 싫어하는 것으로 보였다.
서로 섞이지 않는 물과 기름 수준이 아니라, 닿기만 해도 폭발하는 불과 화약의 관계라면.
갑자기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일단은 그 남자에게 조심하라고 일러 주기 위해 만델리나를 보내기는 했는데.’
눈치가 빠른 사람이니 알아서 몸을 사려 피해 다니겠지.
* * *
루드거는 자신의 정면에서 다가오는 한 무리의 사람들을 말없이 바라봤다.
저들이 누구인지 깨닫는 순간 난처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만델리나가 말했던 브레투스 성국의 사절들인가. 하필이면 여기서 마주할 줄이야.’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일부러 저들이 움직일 만한 길목을 피해서 갔는데 마주치다니.
저들도 딱히 무언가를 노린 것은 아니었다.
그저 지나가던 차에 우연히 마주친 상황.
‘그냥 무시하고 지나가자.’
루드거가 그럴 생각으로 가려는 순간, 가장 선두에서 걷던 티아라를 쓴 여인이 루드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티아라에 가려져 눈빛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는 분명 루드거를 응시하고 있었다.
“당신은 누구인가요?”
“…….”
일부러 무시하려고 했는데, 저쪽에서 말을 걸 줄이야.
루드거는 말없이 티아라를 쓴 여인을 바라봤다.
척 봐도 이 무리에서 가장 높은 직위를 가진 사람이었다.
본국에서 저 정도로 호위를 달고 다닐 정도라면.
‘제사장인가.’
루드거가 그런 생각을 품고 있을 때, 옆에서 제사장 대리가 발끈하며 루드거에게 다가왔다.
“이봐. 이분께서 네놈이 누구냐고 묻고 계시잖아. 귓구멍이라도 먹은 거냐?”
제사장 대리는 지금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아일린 황녀와 대화를 나누며 그녀에게 조롱받고,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것만으로도 수치스러운데 웬 놈이 감히 제사장님이 말을 거는 데 가만히 있으니 짜증이 치밀어 오른 것이었다.
“어이. 귀가 어떻게 되기라도 한 거냐? 아니면 입이 문제인가? 제사장님. 아무래도 이놈은 벙어리라도 되는 모양입니다.”
“제사장이라고 했나.”
루드거는 티아라를 착용한 여인을 빤히 응시하며 말했다.
제사장 대리는 루드거가 갑자기 입을 열 줄 몰랐는지 ‘어, 어?’ 하는 시선으로 바라봤다.
“딱 자신에게 어울리는 수하를 데리고 다니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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