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UA - 335화 백의의 사자 (3)

 335화 백의의 사자 (3)




루드거와 마주하기 약 15분 전.




제사장 렘리아는 대리인의 안내를 따라 황성의 복도를 걸었다.




“실로 건방진 자들입니다. 감히 본국의 제사장을 이렇게 홀대하다니.”




아일린 1황녀는 대면 이후 떠나는 그들을 배웅하지도, 안내인을 붙여 주지도 않았다.




이쪽이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라는 걸 명백히 하고 있었다.




“제사장님. 어찌하시겠습니까. 곧바로 사건이 벌어졌다는 현장으로 가시겠습니까?”




대리인은 렘리아의 기분을 맞춰 주기 위해 최대한 정중한 어조로 물었다.




렘리아는 고개를 저었다.




“곧바로 갈 필요는 없어 보이네요.”




“하지만 저희가 조금이라도 늦게 갔다간, 그 사이에 불경한 제국이 증거를 인멸하려 들지도 모릅니다.”




“진정으로 그릇된 존재는 그 위로 아무리 두껍게 모래를 덮는다고 하더라도 형상이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그들이 숨기려고 하면 할수록, 저희로선 오히려 더 찾기 쉬워지겠죠. 그러니 괜찮습니다.”




“그, 그렇지만.”




“게다가 모처럼 황실에 들어오게 되었는데, 그 유명한 전경을 구경하지 않는 것도 아까운 일이잖아요?”




렘리아는 천연덕스러운 미소를 머금으며 그렇게 물었다.




누구도 그 말에 반박하고 나서지 못했다.




대리인을 통해 대부분의 일을 처리하던 렘리아가 자신의 의견을 직접 피력했다.




이 자리에서 가장 높은 권위를 지닌 그녀의 제안을 거절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 리가 없었다.




“이곳에서 한동안 머물러도 된다는 본국의 허가도 떨어졌으니, 그 유명하다는 드발크 황성 내부를 둘러보도록 해요. 예전부터 궁금했거든요.”




“예, 알겠습니다. 그러면 제가 안내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렘리아의 변덕으로 인해 브레투스 사절단은 황성 바깥으로 향하던 방향을 다른 곳으로 틀었다.




그것은 아일린도 예상하지 못한 돌발 행동.




황성 내부를 돌아다니며 신기하게 구경하던 렘리아는, 저 맞은편에서 다가오는 한 남성을 발견했다.




이곳까지 오면서 많은 사용인과 수호기사단을 스쳐 지나갔다.




렘리아는 그럴 때마다 그들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다.




하지만 저 남자는 달랐다.




신을 제외한 모든 타인에게 무감각한 렘리아마저도 자기도 모르게 시선을 잡아끄는 매력이 있었다.




아니, 그걸 넘어 마력(魔力)이라 불러도 좋았다.




‘누구지?’




생긴 모습은 그야말로 당대 최고의 조각가가 혼신을 기울여 깎아 낸 것 같은 미남이었다.




그럼에도 단순히 ‘잘생겼다’라는 것을 넘어서 주위로 특유의 카리스마와 분위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순간이지만 아일린과 같은 황실의 핏줄이라고 착각했을 정도로.




하지만 머리색이 달랐고, 황가의 사람이 저렇게 혼자 돌아다닐 이유도 없었다.




그렇다면 외부의 손님이거나 이곳의 사용인이라는 말인데.




때마침 남자도 이쪽을 발견하더니 발걸음을 일순 멈췄다.




그 행동은 찰나였지만, 렘리아는 거기서 묘한 기색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다시금 발걸음을 옮기는 남자가 이쪽을 스쳐 지나갈 때.




렘리아는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당신은 누구인가요?”




* * *




“딱 자신에게 어울리는 수하를 데리고 다니는군.”




순간 대리인은 루드거가 무슨 말을 한 건지 이해하지 못했다.




“뭐, 뭐? 네놈, 지금 뭐라고 한 거냐.”




대리인인 그렇게 물었지만, 루드거는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그 날카로운 눈빛은 조금 전부터 제사장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으니까.




또다시 무시를 받았다는 사실에 대리인은 주먹을 까득 말아 쥐었다.




루드거의 행동에서, 조금 전 1황녀에게 당했던 모욕이 겹쳐 보였다.




“당장 대답하지 못해?!”




그 외침에 루드거는 그제야 대리인을 돌아보며 물었다.




“시끄럽구나. 나는 이 여자에게 말을 걸었지, 네놈을 보고 한 말이 아니다.”




“하. 이 무례한 놈. 두 눈 똑바로 뜨고 봐라. 나는 여기 계신 고귀하신 분의 대리인이다! 이분께 말씀을 올리고 싶다면, 나에게 먼저 보고를 해야 한다는 말이다!”




대리인은 자부심이 가득한 목소리로 외쳤다.




자신이 제사장의 대리임에 한 치의 부끄러움도 느껴지지 않는 태도였다.




정작 루드거의 반응은 심드렁하다 못해 차갑기까지 했다.




“대리인? 고작 남의 말과 행동을 대신하는 거로 그렇게 잘난 척했던 건가.”




대리인의 자부심에 가득 찬 표정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나는 평범한 대리인이 아니다! 감히 이분이 누구인지는 알고 지껄이는 거냐!”




“내가 그걸 알아야 하나?”




“……뭐?”




루드거가 너무 당당하게 묻자 제사장 대리는 오히려 당황스러웠다.




알아야 하냐고? 무슨 당연한 질문을 하고 있단 말인가.




“그, 그러면 이분이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감히 그런 망발을 지껄였다는 거냐?”




“그건 잘못된 말이로군.”




루드거는 냉소를 날렸다.




“망발을 먼저 지껄인 건 내가 아니라 그쪽이지 않나.”




“이, 이 건방진 놈! 감히 황성에서 머무는 일개 고용인 주제에!”




“고용인? 그러는 그쪽도 내가 누구인지 모르면서 그런 망발을 지껄인 거였군.”




고용인이 아니었다고?




그렇게 묻는 대리인의 표정을 보고도 루드거는 굳이 정정해 주지 않았다.




“네 말마따나 여기 있는 사람이 정말로 대단한 사람이라고 치지.”




“있다고 치는 것이 아니라 진짜로…….”




“하지만 권위는 단순히 말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지. 대리인을 자처하는 네놈이 목에 핏대를 세워 소리를 지른다고 해서 없는 권위가 나오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그런 것도 배우지 못한 건가?”




싸늘한 시선과 함께 날아오는 비수와 같은 말이, 대리인의 몸을 후벼 팠다.




“그리고 나는 신분상 제국의 시민으로서, 황제를 제외한 누구에게도 고개를 조아릴 의무가 없다. 설사 타국의 사절단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강요해서는 안 되고.”




“이, 이분은 브레투스 성국의 제사장님이다. 평범한 사절단과는 다르단 말이다!”




대리인은 나오지 않는 말을 억지로 내뱉듯 비루한 변론을 주장했다.




본인이 생각해도 루드거의 말은 틀린 것이 없었지만, 이렇게라도 따지고 들지 않으면 안 될 거라는 위기감이 들었다.




“제사장?”




“그래. 제사장님은 브레투스 성국에서 성인(聖人)의 가호를 받은 자만이 오를 수 있는 영광스러운 자리다. 네놈이 감히 함부로 말을 섞으실 분이 아니란 말이다.”




브레투스 성국이 비록 오랜 세월 동안 타국과의 교류를 끊다시피 한 것은 맞다.




하지만 오랜 역사 동안 대륙을 호령한 만큼 그들의 위세는 여전히 존재했다.




무도한 것들은 그 세월 동안 자신들의 처지를 망각해, 감히 본국의 위상을 다시금 의심하며 넘보려 드는 모양이지만.




그것은 감히 올려다봐도 안 될 나무였다.




대리인은 의기양양하게 말하며 루드거의 표정을 살폈다.




이제야 네 주제를 자각했냐고.




그렇게 물으려던 그는, 루드거의 변함없는 안색을 보는 순간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제사장이라는 직위를 말했음에도, 루드거의 얼굴에는 ‘그래서 뭐?’라는 기색이 가득했다.




“그래서, 네가 제사장인가?”




“나는 그분의 대리다!”




“그래. 대리인. 남의 말과 행동을 대신 말하며, 자신의 줏대도 없는 앵무새 놈들. 잘 알지. 그래서 뭘 어쩌라는 건가.”




당연히 대리인은 알아서 숙이길 바란 거지만, 루드거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원래부터 구역질 나는 놈들인데, 그런 놈들에게 숙이는 것은 죽는 것보다 싫다.




“무엇보다 대리인을 자처할 거면 적어도 그 역할에라도 충실해야지. 정작 그쪽은 대리인으로서 본분도 제대로 못다 하고 있지 않나.”




그 말은 대리인을 자처하며 자신의 사심을 드러내는 그를 은연중에 비꼬는 것이기도 했다.




“진정 자신이 누군가를 제대로 섬기고 있다고 생각하면, 그에 걸맞은 행동거지부터 배우도록. 네 주인을 개망신시킬 게 아니라면 말이야”




그 말에 대리인의 얼굴이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당장이라도 주먹을 휘두를 것처럼 불끈 쥐었지만, 루드거는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대접만 받으며 살던 녀석이라 그런지 자신의 처지를 잘 모르는군.’




호가호위의 전형적인 예시다.




아마 누구도 그를 정면에서 힐난하려 들지 않았으리라.




제사장의 대리인이라는 것 하나만으로도 저 머저리는 비슷한 대우를 받았을 테니까.




상대방이 고개를 조아린 권위는 자신이 아닌 제사장에게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처지를 망각하고, 권력의 단맛에 뇌가 절고 말았다.




‘본래라면 자신의 대리인이 저렇게 설치는 것을 본래 주인이 가만히 내버려 둘 리가 없을 텐데.’




정작 사건의 큰 핵심인 제사장 본인은 가만히 사태를 관망하고 있었다.




자신의 직속 부하가 무슨 추태를 부려도 신경도 쓰지 않는다.




마치 자신은 이 일과 전혀 연관이 없는 사람 같았다.




저쪽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기에 말리지 않는 것인가, 아니면 관심이 없어서 내버려 두는 것인가.




‘뒤에 도열한 사제와 성기사들의 표정이 안 좋은 걸 보면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닐 테고.’




이 멍청한 대리인에게 제사장의 목줄을 쥘 무언가가 있을 리도 없으니, 결과는 하나뿐이었다.




말 그대로 제사장은, 자신의 아랫것이 무엇을 하는지 관심 자체를 갖지 않은 것이다.




주체도 없고 의지도 없다.




그야말로 살아 숨 쉴 뿐인 인형이었다.




그야말로 루멘시스 교단의 제사장에 어울리는 행동이구나 싶었다.




그렇기에 루드거는 대리인을 노골적으로 무시하며, 제사장 본인을 향해 말했다.




“그쪽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어디 이렇게까지 말하는데도 반응을 하지 않는지 볼까.




뒤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사제들과 성기사단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어졌다.




그들이라고 대리인의 저 행패를 고깝게 여기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외부인이 제사장을 향해 대놓고 직설적으로 발언하는 것은 문제의 소지가 있었다.




“네. 그렇네요.”




그러나 더 놀랍게도 제사장인 렘리아가 그 말에 대답한 것이다.




그것도 수긍이라는 형태로.




“제, 제사장님?”




대리인이 주인에게 버려진 강아지와 같은 황망한 얼굴이 됐다.




그러나 렘리아는 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자신을 보필해 온 최측근이 얼마나 놀라는지 관심조차 없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저를 보필해 와서 그런지 적극적이고 열정적인 면모는 있었는데, 언제부터인가 선을 넘기 시작했죠.”




렘리아 본인이 그 행동을 묵과함으로써 여기까지 오게 된 책임이 있었지만.




누구도 그녀를 탓하지 못했다.




그녀에게 책임을 물을 사람은 이 자리에 없었으니까.




“제, 제사장님. 아닙니다. 제가 어찌 감히…….”




대리인이 항변하려 하자 제사장은 새하얀 티아라 너머로 자신의 부하를 응시했다.




눈빛이 보이지 않을 텐데도 대리인은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그동안 너무 오랫동안 저의 일 처리를 도맡아 주시느라 고생이 많았어요. 이제 푹 쉬셔도 될 거 같아요.”




정중한 어조로 말했지만, 사실상 쫓겨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대리인은 무어라 외치려 했지만, 성기사 둘이 나서서 그를 재빠르게 끌고 가 버렸다.




제사장님! 제사장님!




공허한 메아리 같은 외침과 함께 대리인은 완전히 사라졌다.




렘리아는 오랫동안 함께 해 온 대리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루드거를 향해 방긋 웃어 보였다.




“이제 조용해졌네요.”




“…….”




이쪽이 넌지시 언급하기는 했다만.




설마하니 모두가 보는 앞에서 대놓고 쫓아낼 줄이야.




‘게다가 말하는 것만 보면 오랫동안 자신을 보필해 온 사람일 텐데, 내보내는 데 망설임이 전혀 없군. 애초에 감정이라는 것이 존재하는지도 의문이야.’




지금 짓고 있는 저 미소조차도 밀랍 인형 위에 가면을 씌워 놓기라도 한 것처럼 이질적이다.




“그래서 당신의 이름은 무엇이죠?”




“타인의 이름을 묻기 전, 자신의 이름부터 밝히는 것이 예의라고 생각한다만.”




루드거의 말에 성기사들로부터 살기가 새어 나왔다.




그러나 루드거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어디 칼을 뽑아서 휘두르고 싶으면 그래 보라는 듯, 눈빛으로 성기사들을 도발하기까지 했다.




“그만.”




그때 렘리아가 입을 열었다.




성기사들은 곧바로 기세를 거두었다.




“확실히 제가 예의가 부족했네요. 미안해요. 사람을 대하는 방식이 별로 익숙하지 않아서요. 제 소개부터 할게요. 저는 렘리아라고 해요. 브레투스 성국의 제사장을 맡고 있죠.”




제사장.




‘본국 내에서 채 10명도 되지 않는 제사장이 왔다는 건가.’




게다가 본래 그의 기억 속의 제사장보다 나이가 훨씬 더 어려 보였다.




그가 사라진 사이에 제사장 또한 대대적인 교체가 됐다는 말이었다.




“루드거 첼리시다. 세오른의 교사로서 이곳에 손님으로 머무르고 있지.”




“그러셨군요.”




“궁금한 것은 피차 해결된 거 같으니, 이만 물러나 보도록 하겠다.”




루드거는 저들과 절대로 엮이면 안 된다고 판단했다.




루드거가 더는 대화를 하기 싫다는 태도를 노골적으로 비추며 자리를 벗어나려 하자 렘리아가 자연스럽게 앞길을 막아섰다.




루드거가 눈가를 찌푸렸다.




“지금 뭐 하자는 거지.”




“이름만 들었을 뿐인데 벌써 가시는 건 매몰차다고 생각하지 않으시나요?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조금 더 대화를 나누죠.”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 거 같은데, 나는 별로 그럴 생각이 없군. 그러니 비켜라.”




비켜 달라는 제안도 아닌 확고한 명령조.




대놓고 기분이 나쁘라고 한 말에도 렘리아는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루드거 씨라고 하셨죠. 당신에게서 상당히 특이한 기운이 느껴져요.”




아주 자기 할 말만 하는군.




루드거는 렘리아의 제멋대로인 행동에 짜증이 일었다.




이런 걸 보면 조금 전 쫓겨난 대리인의 성격이 누굴 닮았는지도 알 것 같기도 했다.




“그게 뭐 어쨌다는 거지? 혹시 나더러 신을 믿느냐고 물어보기라도 생각인가?”




“아, 그래도 되나요?”




“안 믿는다.”




“그건 아쉽네요.”




이럴 땐 불경하다고 노발대발해야 할 상황인데도 렘리아는 천연덕스럽게 미소 지었다.




“애초에 특이한 기운이 느껴진다니. 사람을 붙잡으려는 이유치고는 너무 대충이군.”




“아, 그렇게 들리셨다면 죄송해요. 하지만 저는 정말 진심으로 한 말이었거든요.”




“나도 진심으로 답한 거다.”




“게다가 특이한 기운을 넘어서 뭔가 익숙함마저 느껴져서 궁금증을 견딜 수가 없었거든요.”




익숙함이라는 말에 루드거가 입을 다물었다.




렘리아가 은근하게 물었다.




“우리, 혹시 어디서 만나지 않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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