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UA - 336화 성국의 흔적 (1)
◈ 336화 성국의 흔적 (1)
“어디서 만났냐니. 딱 종교를 권유하기 위한 얄팍한 질문이로군.”
“아, 죄송해요. 그런 의미로 한 말은 아니었어요. 단지 제가 어디서 뵌 것 같은 기억이 있어서요.”
“다른 누군가와 착각을 했겠지.”
루드거의 그 말에 렘리아가 소박하게 웃었다.
“어쩜, 농담도 재미있으시네요. 제가 한 말은 그러니까…… 루드거 씨가 혹시 저희 본 성국에 방문하신 적은 없는지 물었던 거예요.”
“…….”
본 성국이라.
렘리아가 저렇게까지 직설적으로 말하니 의도적으로 화제를 전환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게다가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물어보는 걸 보면, 나에게서 무언가를 알아냈다는 건가.’
하지만 단언컨대 루드거는 렘리아를 처음 봤다.
제사장이라 알아차린 건 그런 직위가 있다는 걸 알았으니 유추한 것일 뿐.
‘적어도 내가 브레투스 성국에서 아는 사람은…….’
없는 것은 아니다.
어린 시절의 루드거라고 성국에서 마냥 적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대부분 적이었지만, 친하게 지낸 사람이 한 명 있었다.
단 한 명.
성국 전체를 기준으로 친다면 너무나도 적은 숫자다.
하지만 적어도 루드거는, 그 치열했던 어린 시절 그 사람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다.
루드거의 표정이 무거워지자 렘리아가 은근하게 물었다.
“아, 혹시 뭔가 떠오르는 것이 있나요?”
“하나 있기는 하군.”
“와, 정말요? 뭔가요?”
“이와 비슷한 말을, 다른 곳에서도 들었다는 거지.”
루드거는 자신이 레더벨크에서 교구장을 만나 들었던 이야기를 렘리아에게 말해 주었다.
‘여기서 노골적으로 반발하면 오히려 의심을 사게 될 것이다.’
렘리아가 초면인 자신에게 저렇게까지 집요하게 묻는 걸 보면, 무언가를 느꼈음이 분명했다.
그런데도 확인하듯 물어봤다는 것은, 확실하지 않기 때문이리라.
‘제사장은 나를 의심하고 있다. 하지만 말 그대로 심증적인 의심일 뿐이야.’
그렇다면 대응하는 방법은 정해졌다.
강한 부정을 내비치기보다는, 반쯤 수긍하며 비슷하게 겪었던 일을 설명하면 그만이니까.
진실의 사이에 거짓을 교묘히 섞어 넣는다.
상대방의 의식을 다른 곳으로 자연스럽게 돌리는 것은 어렵지 않다.
“레더벨크의 교구장도 저와 비슷한 걸 봤나 보네요.”
과연 의도가 먹혀들었는지 렘리아는 자신과 비슷한 사람이 있다는 말에 손뼉을 짝 하고 쳤다.
“그녀는 내게 신기가 약간이지만 있다고 했다. 아마 그쪽도 비슷한 기운을 느낀 거겠지.”
“흐음. 그런 걸까요? 이상하네요. 저는 뭔가 다른 걸 생각했거든요.”
렘리아는 무언가 더 고민하려고 했지만, 마땅한 해답이 떠오르지 않는지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아무래도 나중에 본국에 돌아가면 자매들에게 물어봐야겠어요.”
이건 좀 낭패로군.
루드거는 표정을 관리하며 자연스럽게 물었다.
“자매? 가족이 있었나.”
“네. 저에게도 당연히 가족은 있답니다. 아주 소중한 가족이지요.”
“그렇군.”
“물론 저를 낳아 주고 길러 주는 혈육은 없어요. 저는 교단에서 주워 온 고아니까요. 대신 제가 말한 가족은, 저와 같은 자매들을 말하는 거랍니다.”
“자매라면…….”
“제사장들을 말하는 거랍니다.”
렘리아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뒤에서 가만히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사제들이 화들짝 놀랐다.
“레, 렘리아 제사장님!”
말하면 안 되는 정보였는지 사제들이 기함했다.
렘리아는 전혀 신경 쓰는 눈치가 아니었다.
“음. 아, 말하면 안 되는 거였던가요? 죄송해요. 그렇지만 루드거 씨가 물어보니 대답을 안 해 줄 수가 없어서요.”
렘리아는 스스로가 그런 행동을 해 놓고 본인이 왜 그랬는지 잘 이해하지 못했다는 반응이었다.
루드거는 그런 렘리아 제사장의 모습에 눈을 가늘게 좁혔다.
‘분명 나를 처음 보는 걸 텐데도 거짓말을 하거나 진실을 숨기지 않는다? 본인도 자각하지 못한 걸 보면,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못한 거다.’
렘리아 본인을 포함한 브레투스 사절단들은 모르는 눈치였지만.
루드거는 그녀가 왜 저런 반응을 보이는 건지 단번에 눈치챘다.
‘본능적으로 내가 지닌 태생에 반응하고 있다.’
루드거가 지니고 있는 브레투스 성왕의 피.
렘리아는 이 저주받은 피에 반응하는 것이 분명했다.
‘렘리아 제사장과 그 자매들은 성국에서 새로운 제사장 직위를 유지하기 위해 키워 낸 사람들.’
아이들을 가르치며 교묘한 세뇌가 이뤄졌을 가능성이 컸다.
성국의 어두운 면을 생각하면 ‘반드시’라고 해도 좋았다.
그중 제사장 정도 되는 사람이라면, 더 강하고 확실한 주박이 걸려 있으리라.
가령.
위대한 성왕의 혈육에게는 절대로 거짓을 고할 수 없다거나.
설령 세뇌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런 암시를 받은 것은 분명해 보였다.
‘아마 내게서 무언가를 느끼고 말을 건 것도 그런 이유일 터.’
자신이 모시고 섬겨야 할 핏줄을 발견했으니 본능적으로 관심이 생긴 것이다.
썩 좋은 상황은 아니었다.
렘리아가 자신의 앞에서 이상한 행동을 보일수록, 함께 딸려 온 사절단이 이쪽을 의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자리를 뜨자니, 렘리아가 자꾸 이쪽을 의식하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이대로라면 본국에 돌아갔을 때, 자신을 만난 이야기를 전할지도 몰랐다.
‘만약 제사장에게 세뇌나 암시가 걸려 있다면.’
오히려 그걸 역으로 이용한다면 어떨까.
루드거는 머릿속의 생각을 바로 행동으로 옮겼다.
“이야기는 잘 들었다.”
“아, 그런가요?”
이쪽에게 칭찬을 받았다고 생각하는지 렘리아의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가 맺혀 있었다.
“하지만 방금 말했다시피 나는 신을 믿는 것에 전혀 관심이 없다.”
“그건 아쉽네요. 왠지 잘 어울릴 거 같았는데.”
“그리고 내게는 해야 할 일이 있다. 그건 그쪽도 마찬가지 아닌가?”
“네. 잊고 있었는데 뒤늦게 떠올랐네요. 알려 주셔서 감사해요.”
“피차 바쁜 입장이니 이만 가 보도록 하겠다. 아, 그리고.”
루드거는 렘리아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오늘 있었던 일은 그냥 조용히 넘기면 좋겠군.”
그러고는 확인 차 렘리아에게 물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넌지시 던지는 질문.
하지만 상대방에게 암시가 걸려 있다면.
이것은 단순한 질문이 아니라 명령이 된다.
“네, 그렇겠네요.”
렘리아는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본인은 자신이 고개를 끄덕였다는 것도 인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루드거는 그 모습에 자신의 추측이 맞아떨어졌음을 확인했다.
동시에 꾹 눌러 담았던 브레투스 성국을 향한 혐오감이 밀려왔다.
놈들은 자신이 머물던 과거에도.
그리고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지금도.
전혀 변하지 않은 채 물밑에서 끔찍한 일들을 벌이고 있었던 것이다.
가증스럽고 역겨운 놈들.
하지만 더욱 루드거를 무참하게 만드는 것은 당장에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는 현실이었다.
‘지금은 그냥 넘어가겠다.’
하지만 이쪽이 원하는 것을 다 모으고 모든 준비가 갖춰진다면.
‘그때는 반드시…….’
이 모든 그릇된 것들을 바로잡겠노라고.
루드거는 마음속 깊이 다짐했다.
* * *
“렘리아 제사장님. 괜찮으십니까?”
루드거와 헤어진 뒤, 아직도 멍하니 자리에 가만히 서 있는 렘리아에게 사제 한 명이 다가가 물었다.
그들이 보기엔 오늘 렘리아가 보여 준 행동은 평소답지 않았다.
혹여 지체 높은 제사장의 신변에 무언가 문제라도 생긴다면, 이 자리에 모인 자들은 질책을 피하기 힘들어진다.
“네. 전 괜찮답니다.”
“그렇다면 다행입니다만, 어째서 조금 전 저 남자에게 그렇게 관심을 보이신 건지……. 그래 봤자 마법사 나부랭이 아닙니까.”
“그냥요.”
“예?”
“그냥 그러고 싶은 기분이 들었어요. 이상한가요?”
“아, 아뇨 그러지는 않습니다.”
사제는 그렇게 둘러댔지만, 이상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어린 시절부터 철저한 교육을 받아 오며 교단의 성자가 된 사람이 렘리아다.
그런 사람은 렘리아 혼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다른 제사장들도 다 그녀와 똑같았다.
본교에 충성하며 교리를 설파하고, 삿된 감정을 품지 않는다.
그것은 브레투스 성국 내에서 불변의 진리처럼 알려진 바이기도 했다.
“알아요. 제 행동이 오늘은 좀 많이 제멋대로였다는 거.”
렘리아도 그 미묘한 이질감을 느끼기 충분했다.
난데없이 목적지를 바꿔서 길을 돌아가질 않나, 자신과 함께해 온 대리인을 즉석에서 쫓아내질 않나.
‘대리인은 언젠가 교체해야겠다고 생각을 했으니까 크게 개의치는 않지만.’
중요한 것은 루드거 첼리시라는 남성이었다.
자신을 세오른의 교사라고 말한 그는, 보는 순간 이상하리만큼 관심이 갔다.
하지만 왜 그랬냐고 이유를 묻는다면 렘리아도 차마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영혼의 깊은 곳에 각인된 본능 같은 것.
이성으로 판단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루드거 첼리시라고 했죠? 조금 전의 그 남성분 말이에요.”
“예? 예 그렇습니다. 제사장님께서는 듣지 못하셨겠지만, 마법사들 사이에서는 꽤 이름이 도는 모양입니다.”
“확실히 첫인상부터 그런 느낌이 들기는 했어요. 확인해 보면 알겠지만, 필시 범상한 사람은 아니겠죠.”
렘리아의 입가에 지어진 미소가 일순간 지워졌다.
“확인해 주세요.”
“루드거 첼리시라는 사람에 대해 말입니까?”
“네. 대신 아주 조용히요. 다른 사람에게는 알리지 말아 주세요. 제 자매나 본국도 마찬가지예요. 특히 저희 큰언니에게는 더욱요.”
“네? 하, 하지만…….”
“할 수 있죠?”
다시금 웃으며 묻는 렘리아의 물음에 사제는 난처함을 드러내면서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이 자리에서 그의 직속상관은 렘리아다.
렘리아가 평소와 다르게 뭔가 이상하다 하더라도, 저렇게까지 직접적으로 부탁하면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그 입이 가벼운 대리인 놈이라면 진작에 떠벌리고 다녔겠지만, 사제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렘리아도 그걸 알기에 사제에게 부탁한 것이었다.
“고마워요.”
사제의 긍정적인 반응에 렘리아는 감사한 마음을 담아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사제는 오히려 그 미소에 안도감은커녕 섬뜩함마저 느꼈다.
사제가 고개를 숙이고 뒤로 물러나자 렘리아는 자리에 가만히 서서 무언가 고민을 하는 듯하더니, 이윽고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뒤를 사절단들이 자연스럽게 따라붙었다.
렘리아는 티아라 너머로 황성 내부의 풍경을 보면서도 조금 전 루드거와의 만남을 머릿속에서 계속 떠올렸다.
‘루드거 첼리시. 무언가 있는 사람이라는 것은 분명해.’
평소의 자신이었다면 하지 않았을 말까지 자연스럽게 꺼내고 말았다.
더 놀라운 것은 그 당시 상황에서 렘리아 본인은 이상함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는 것이다.
당장에 이 사실을 본국에 알려야 했음에도, 그녀는 알리고 싶은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하지만 개인적인 의문이 샘솟는 것만큼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루드거가 이런 부분은 ‘암시’를 걸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내 안에 담긴 조각이 묘한 반응을 일으켰어.’
자신이 제사장의 자리까지 올라갈 수 있게 만들어 준 조각.
그 조각의 기원이 누구로부터 비롯되었던가.
루드거 첼리시라는 남자에게 조각이 반응했다는 것은, 조각의 기원이 그와 연관이 있다는 소리였다.
‘큰 언니.’
제사장들은 서로를 자매라 불렀다.
그런 제사장들 사이에서 가장 강하며 거대한 신력을 지닌 자가 있었다.
제사장들이 큰언니라고 부르는 사람.
어린 시절부터 성녀의 후보로 길러진 브레투스 성국의 총아.
대제사장 캐서린.
그녀가 바로 조각의 주인이었다.
* * *
황성에 머무르며 몸 상태를 완전히 회복한 루드거는 오랜만에 수도의 거리로 나왔다.
당연히 아일린 1황녀의 허락은 받은 상태였다.
‘어차피 곧 돌아갈 텐데, 뭘 그렇게 붙잡으려 드는지.’
루드거는 수도의 거리를 걸었다.
얼마 전까지 폐허로 변했던 거리는 지난 며칠 사이에 상당히 복구되어 있었다.
어지럽혀진 도로는 깔끔하게 정리됐고, 무너진 집은 전보다 더 튼튼하게 지어지는 중이었다.
사람들도 열심히 땀을 흘려가며 일을 하고 있었다.
‘그만큼 황실에서 구호 자금을 많이 뿌린 덕분인가.’
노동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활기가 넘쳐 보였다.
그날의 슬픔을 다들 이겨 내는 것 같아서 그 광경이 꽤 보기 좋다고 생각했다.
루드거는 한스와 벨라루나, 그리고 스승님이 머무는 간이 아지트로 향했다.
원래라면 루드거가 렐릭의 파편을 얻은 이후 나머지는 레더벨크로 철수해야 했지만.
이쪽이 황실에 붙들려 한스와 벨라루나도 기약 없이 수도에 머무르는 상태였다.
루드거가 아지트의 문을 열기가 무섭게 안쪽에서 거대한 검은 형상이 튀어나왔다.
순간 적습인가 싶어서 경계하려던 루드거는 단번에 상대를 알아보았다.
“한스?”
“혀, 형님!”
한스는 루드거를 알아보자마자 곧바로 눈물을 흘리며 그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질질 짰다.
“왜 이렇게 늦으셨소!”
“일이 있다고 전했을 텐데. 그보다 그 몰골은…….”
루드거는 한스의 상태를 살폈다.
한스의 모습은 평소 그가 변하던 짐승의 형태와는 어딘가 달랐다.
전반적으로 늑대인간과 비슷했지만, 등 뒤에 가시가 자랐고, 꼬리도 2개나 나 있다.
루드거는 그 모습이 꽤나 익숙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닌 것이 아니라 해방군들이 테러를 벌일 때 가장 많이 보았던 존재였다.
“키메라? 너 설마, 키메라의 이빨로 그렇게 변한 거냐?”
“그렇소.”
한스는 훌쩍이며 답했다.
“또 벨라루나가 그런 짓을 한 거냐?”
“아니오. 이번일은 벨라루나가 아니라…….”
“나다.”
한스의 말을 끊으며 어린 소녀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현관까지 들려왔다.
한스는 숫제 귀신을 만난 사람처럼 자신의 털을 곤두세우며 루드거의 등 뒤로 숨었다.
“혀, 형님!”
“알았으니 문부터 닫아라. 이 광경을 다른 사람이 본다면 신고당할 거다.”
그렇게 말했지만, 한스는 여전히 공포에 질려 덜덜 떨고 있었다.
루드거는 한숨과 함께 마력으로 현관문을 닫은 뒤, 목소리가 들려온 거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너는 항상 늦는구나. 기다리느라 목이 빠지는 줄 알았다.”
그란데르는 소파에 인형처럼 누워서 루드거를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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