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UA - 337화 성국의 흔적 (2)

 ◈ 337화 성국의 흔적 (2)




“아무리 봐도 편안하게 지내신 모양입니다만.”




“이렇게 보여도 마음은 편치 않았느니라.”




그란데르는 꽤 지루한 모습이었지만, 이곳에 오래 머문 것치고는 매우 얌전했다.




평소의 그란데르였다면 지루하다며 무슨 짓을 벌였을 텐데, 이렇게 얌전하다는 건.




쌓였던 스트레스를 충분히 풀 기회가 있었다는 뜻이다.




루드거는 스트레스 때문에 몸 곳곳의 털이 뭉텅 빠진 한스의 모습을 떠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적당히 하시지 그러셨습니까. 싫어하는 거 뻔히 아시면서.”




“이게 다 어떤 불경한 녀석이 이 스승을 오랫동안 기다리게 해서 그렇다.”




“누가 보면 제가 스승님께 기다려 달라고 간절히 부탁이라도 한 줄 알겠습니다. 제가 오라고 한 것도 아니고, 멋대로 따라오셨으면서 그런 말씀 하시는 겁니까?”




그란데르가 루드거를 찌릿 노려보았다.




비겁하게 조곤조곤 있는 사실만 말하니 열이 오른 것이었다.




“……알았습니다. 알았으니까 그렇게 노려보지 마십시오. 왜 화를 내고 그러십니까.”




“화 안 났다.”




“이미 잔뜩 난 모양입니다만.”




“안 났다니까! 진짜로 화내 줄까?”




“참아 주시죠.”




루드거는 결국 먼저 백기를 들었다.




그래, 불초 제자가 먼저 고개를 숙여 줘야지 뭐 어쩌겠는가.




루드거가 한발 물러서니, 그란데르도 화를 삭였다.




그란데르도 자신이 좀 지나친 감이 있다고 생각은 하는지 투덜거리듯 중얼거렸다.




“그보다 그 한스라는 아이, 키메라까지 변신이 가능하다니 참 특이한 체질을 타고났더구나. 일반 짐승만 되는 줄 알았거늘.”




“더한 거로도 변신할 수 있습니다.”




한스가 키메라로 변한 것은 새삼 놀라울 것도 없었다.




제보당의 괴수로 변할 수 있던 시점에서 어렴풋이 예상은 하고 있었으니까.




그란데르는 그 말에 호기심을 해결하고자 하는 지식의 욕구를 드러냈지만 애써 억눌렀다.




지금은 그런 걸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일 처리는 다 끝낸 모양이구나.”




“예.”




“보아하니 고생깨나 한 모양이고.”




“그걸 아셨으면 좀 도움 좀 주시지 그러셨습니까.”




그 말에 그란데르가 핫!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도와? 내가 널 그렇게 약하게 가르쳤더냐.”




“적어도 악마와 싸우는 법은 가르쳐 주시지 않으셨죠.”




“지금 반항하는 거냐? 흔히들 말하는 사춘기가 왔나 보구나.”




“제 나이가 몇인데 사춘기가 오겠습니까. 당연한 항변을 하는 겁니다.”




“내가 가르치지 않아도 혼자서 알아서 잘 상대하지 않았더냐. 그거면 된 거지.”




“결과론적인 이야기입니다. 여러 번 위험하기는 했습니다만.”




“엄살 부리기는.”




이쪽의 투정이 씨알도 먹히지 않는 그란데르의 모습.




루드거는 애초에 기대도 하지 않았기에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래서 어땠습니까.”




“뭐가 어땠냐는 거냐. 제대로 말하지 않으면 나는 모른다.”




“모르는 척하지 마십시오. 제가 과연 얼마나 잘 싸우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오신 거잖습니까.”




애초에 그란데르가 순수한 흥미와 재미 때문에 수도까지 따라올 리가 없었다.




아니, 따라올 수는 있지만, 지루함을 감내하면서 이곳에 머무르는 것은 필시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다.




“악마가 갑자기 등장한 것은 스승님께도 예상 밖의 일이었겠지만 말이죠.”




“하여간 눈치 하나는 귀신같이 늘었구나.”




“제가 스승님과 함께 산 지 10년이 넘었습니다.”




“세월이 벌써 그렇게 됐나?”




“햇수로만 따지면 약 13년이로군요. 제가 7살이 넘어갈 때 스승님이 저를 주워 키우셨으니까요.”




“그래. 내가 애지중지 너를 길렀지. 그때의 너는 완전 맹랑한 꼬맹이였어. 그런데 이제는 다 컸다고 스승님에게 반항도 하는구나. 슬프구나 슬퍼.”




“애지중지라니 말은 똑바로 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누구보다도 험하게 키우셨지.”




“그래서 이렇게 강해지지 않았더냐.”




그란데르는 뻔뻔하게 나가기로 했다.




으레 그렇듯 그란데르가 저런 방식을 고수하면 먼저 백기를 드는 것은 루드거였다.




이쪽도 똑같이 뻔뻔하게 나가면, 그때는 정말 대판 싸울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예전에 한번 욱해서 그랬던 적이 있었는데.’




그때 그란데르가 불같이 화를 내던 걸 생각하면 아직도 등골이 오싹하다.




목숨이 위험하다거나 그란데르의 기세에 질렸다거나 하는 것이 아니다.




진짜 두려운 건, 그란데르가 눈물을 글썽이며 아이처럼 화를 낸 뒤 방에 틀어박혀 얼굴도 보려고 들지 않을 때다.




아주 예전에, 그러니까 루드거가 이곳의 나이로 17살 정도 되었을 때다.




그때 루드거는 그란데르의 제멋대로인 행동에 크게 짜증이 일어서 그녀의 모든 말에 조목조목 따지며 반박했다.




스승님에게 두들겨 맞을 각오로 한 말이었다.




그 모든 걸 각오하고서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속이 풀리지 않을 정도로, 당시 루드거도 짜증이 난 상태였다.




그때 그란데르의 반응이 참 볼 만했다.




눈을 부릅뜨며 주먹을 불끈 쥐고는 몸을 바르르 떨었으니까.




평소대로 제자를 놀려 먹었는데, 제자 놈이 눈에 불을 켜고 따지고 드니 여간 당황스러웠던 것이 아니리라.




루드거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제 마법 훈련을 핑계로 또 얼마나 자신을 두들겨 팰까.




적당히 끝나면 좋겠다고 바라는 순간.




그란데르가 눈물을 글썽이더니 방 안에 틀어박혀 버렸다.




그건 루드거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태였다.




무슨 어린아이도 아니고, 방문을 걸어 잠그고 말도 섞지 않는단 말인가.




그 행동에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루드거는 차라리 다행이구나 싶었다.




더는 자신을 괴롭히고 방해하는 스승님의 잔소리를 듣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것이 한 달 동안 지속되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때 얼마나 틀어박혔지? 한 달은 그냥 넘었는데.’




그란데르는 오래 살아온 흡혈귀라 시간관념이 인간과 많이 어긋나 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꿍했던 마음이 풀리는 데 짧아도 반나절, 길어 봤자 3일 정도 걸린다.




사람에 따라 다르다 해도, 보통 일주일을 넘어가진 않는다.




하지만 그란데르는 그것이 두 달은 넘게 지속됐다.




루드거도 처음 며칠은 스승님이 화가 나도 단단히 났구나 싶었더랬다.




하지만 1주일 2주일이 지나도 아무런 반응이 없자 슬슬 걱정이 들었다.




그 괴물 같은 스승이 죽었으리란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뭔가 심적으로 큰 문제를 달고 있는 건 아닌가 싶었으니까.




미우나 고우나 자신을 키워 준 스승님이 아니던가.




하지만 또 묘하게 미리 차려 놓은 요리는 와서 먹고 다시 쌩 사라지고는 했다.




스승님이 워낙 성격이 고집스러워서 남들에 비해서 좀 오래 가는구나 싶었다.




하지만 그것이 한 달을 넘어가는 순간 루드거는 이건 뭔가 잘못됐음을 느꼈다.




결국 그란데르가 마음이 풀리고 루드거에게 평소처럼 말을 건 것은, 두 사람이 싸우고 난 뒤로부터 두 달 하고도 21일이 지난 일이었다.




그래.




거의 3개월이나 걸린 것이다.




그때를 떠올리면 아직도 아찔하기만 하다.




차라리 시원하게 화를 내면 모를까, 전혀 상식 밖의 행동으로 보여 주니 오히려 루드거가 초조해진 것이었다.




‘그래서 그 이후로 절대 스승님께는 일정 선 이상 따지지는 않게 됐지.’




결국, 그날의 일탈이 루드거의 처음이자 마지막 반항이었다.




아직도 그날의 기억은 루드거의 뇌리에 깊게 각인되어 있었다.




“왜 나를 그런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이냐?”




“……아닙니다.”




“아니기는. 누가 봐도 다루기 곤란한 어르신을 귀찮아하는 보호자의 표정인데.”




“…….”




과연 함께 10년을 넘게 산 것은 그란데르도 마찬가지인지, 그녀는 루드거의 무표정한 얼굴에서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곧바로 알아차렸다.




루드거가 부정하지 않자 그란데르의 눈매가 살짝 휘었다.




재미있어서 웃는 것이 아니라 불쾌할 때 가끔 짓는 표정이었다.




루드거는 차분하게 화제를 전환했다.




“루멘시스 교단이 움직였습니다.”




“그놈들이 움직이는 거야 하루 이틀이 아니지 않느냐.”




그란데르는 알면서도 일부러 넘어가 주겠다는 듯 루드거의 말을 받아 주었다.




“이번엔 경우가 다릅니다. 근처 지부에서 파견된 것이 아니라 본부에서 직접 나왔으니까요.”




“본부? 브레투스 성국에서 왔다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놈들은 문을 걸어 잠근 거로 아는데.”




20년 전의 일을 가지고 얼마 전이라고 하다니.




“놈들이 다시 움직인 것은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최근에 다시 활동하기 시작했죠.”




“그렇다면 놈들은 이번 사건을 조사하러 온 거겠구나. 제국의 수도에 악마가 강림했으니까.”




“예. 무려 제사장이 직접 찾아왔습니다.”




“제사장?”




그란데르는 루멘시스 교단의 사람의 직위가 어떻게 되는지 모른다.




애초에 알 필요가 없었다.




그녀에겐 상대가 누구라 하더라도 다 똑같은 신을 추종하는 버러지들일 뿐일 테니까.




“제사장은 교단 내에서도 매우 높은 직책을 지닌 사람입니다. 신과 가장 가까운 인간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죠. 성황과 그를 보필하는 대주교조차 함부로 못 하는 자입니다.”




“신과 가장 가까운 인간이라니, 건방진 칭호로구나.”




“성국 내에서도 엄선해서 키운 인재입니다. 무엇보다, 미세하지만 세뇌까지 걸려 있더군요. 성왕의 피를 이은 자의 명령은 거부할 수 없도록 말입니다.”




그란데르가 루드거를 빤히 응시했다.




“그렇게 말하는 걸 보니 제사장과 마주쳤구나.”




“예.”




“정체는?”




“아직 들키지 않았습니다.”




“세뇌가 걸려 있다는 걸 눈치챈 걸 보면, 그걸 이용해 먹기라도 한 모양이지?”




“제가 건 것은 사소한 암시였을 뿐입니다. 주위에 보는 눈이 많았거든요. 하지만 시간 벌기밖에 되지 않을 겁니다.”




“암시로는 부족하다는 거로구나. 어쩌다 마주치게 된 거냐.”




“마주한 것은 우연이지만, 접촉은 그쪽이 먼저 다가왔습니다. 아마 본능적으로 제가 지닌 성왕의 피를 감지했기 때문이겠죠.”




루드거는 자신의 피를 경멸하지만, 그렇다고 그 존재마저 부정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렘리아 제사장에게 역으로 암시를 걸었던 것처럼, 써먹을 수만 있다면 사용하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다.




“암시를 통해 저와 만난 일은 누구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했습니다. 다만, 같이 대동했던 사절단 중 보는 눈이 많았습니다. 대화마저 다 듣지는 않았지만, 무언가 있다는 것은 눈치챘을 겁니다.”




“사절에게 암시를 걸 수는 없었고?”




“제사장에게만 먹히는 거였습니다. 그들도 우선 자신들이 모셔야 할 제사장이 가만히 있으니 입을 다물고 있겠지만, 소문이 새어 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겠죠.”




“그러게 다 죽여 버렸으면 편하지 않느냐.”




루드거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눈을 끔뻑였다.




“진심이십니까? 황궁 내부에서 다 죽이라고요?”




“쯧. 모자란 녀석. 그럴 깡도 없다는 게냐.”




“스승님이 너무 막 나가시는 겁니다.”




“나는 할 수 있는데?”




“대륙 최고의 마법사니까 그렇죠. 게다가 제사장 본인도 저에게 수상함을 인지했을 겁니다. 암시를 걸었다고는 하나 제가 방지한 것은 바깥으로 떠벌리는 것. 본인이 묘한 위화감을 품는 것까지는 막을 수 없습니다.”




그란데르가 의외라는 눈빛으로 물었다.




“상대를 매우 높게 평가하는구나.”




“상대가 멍청하면 이런 걱정도 의미가 없는 것이니 차라리 다행일 겁니다. 하지만 제사장은 성국에서 심혈을 기울여 만든 사람입니다. 그 자리까지 올라간 시점에서 실력이 모자라지는 않다는 걸 방증하는 겁니다.”




“아아. 그래. 어렴풋이 기억이 나는구나. 교회는 부모가 없는 아이들을 지원이라는 명목하게 데려가서 수상한 짓을 많이 하고는 했지.”




브레투스 성국에서 가장 미쳤다고 평가받는 이단심문관.




신앙을 넘어서 광기를 지닌 그들은 성국에서 데려온 고아들을 키워서 만든 조직이었다.




“예. 아이들의 수준에 따라서 성국은 그에 걸맞은 자리를 부여하죠.”




능력이 부족하다면 적당한 사용인이나 하인으로.




그보다 조금 뛰어나면 사제나 시스터로.




그보다 더 뛰어나면 성기사나 이단심문관으로.




제사장의 자리에 오른 자매들은 그중에서도 손에 꼽는 가능성을 지닌 아이들이었다.




‘뛰어난 재능을 지닌 아이들인가.’




루드거는 자신이 세오른에서 가르치는 학생들을 떠올려 보았다.




마법에 재능을 지닌 아이들.




그러나 마냥 재능만 믿는 것이 아닌, 스스로 노력을 하는 학생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 세오른에 입학한 신입생 중 마법에 재능이 없었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어쩌면.




브레투스 성국에서 데려가는 아이 중 하나가 되지 않았을까.




루드거는 먼 20년 전 과거를 떠올렸다.




하얀 의복을 입은 채, 사제의 인도에 따라 말없이 따라다니던 무표정한 아이들의 모습.




옹기종기 모인 그 모습이 마치 실험용 쥐를 보는 것만 같았다.




문득, 루드거는 한 소녀를 떠올렸다.




성국에서 데려온 아이 중 특별함이 없던 평범한 아이.




배우는 것도 늦고 성격이 모질지 못해, 배움의 흡수가 늦어 자주 사제에게 엄격한 회초리를 맞고는 했다.




동시에 루드거가 성국에서 유일하게 마음을 터놓고 지낼 수 있는 사이였다.




‘그 아이는 어떻게 됐을까.’




마음도 여리고 재능도 뛰어나지 않았기에, 다 자란 지금은 평범한 사제나 수녀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캐서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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