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UA - 349화 울타리 너머의 승냥이 (2)
◈ 349화 울타리 너머의 승냥이 (2)
알현실에 들어온 파시우스가 아일린 앞에 무릎을 꿇었다.
가만히 앉아 있던 아일린은 한 손으로 턱을 괴며 물었다.
“소식은?”
“브레투스의 사절단들은 현재까지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고 있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저쪽도 저희를 자극할 생각이 없어 보입니다.”
“그렇다고 방심하지 말도록. 놈들이 언제 갑자기 무턱대고 움직일지 모르니까.”
“예. 알겠습니다.”
현재 제사장 렘리아를 필두로 한 사절단은 지하 수로를 돌아다니며 악마의 흔적을 찾으려 들고 있었다.
그렇다고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지만, 브레투스 성국이라면 또 무슨 짓을 몰랐다.
아일린은 어떻게든 그들이 지하 공동으로 가지 못하도록 막고 있지만, 그것은 단순히 시간 벌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잘 알았다.
애초에 마음에 들지 않는 놈들이었기에, 아일린은 최대한 방해를 할 생각이었다.
‘악마가 나타났다는 것을 빌미로 제국에 터무니없는 요구를 모르니까.’
놈들이 귀찮게 파문이라도 들먹이게 된다면 문제가 생긴다.
아일린이 견제하는 것은 그들이 국제적으로 지닌 정치력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
놈들은 대륙 국가들의 의지와 별개로, 정말 한 나라의 왕족들을 ‘파문’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진행되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제국이 생기기 전 왕국이 그렇게 바뀌었다고 하니까.
‘일단은 얌전히 있어 주니 신경 쓸 일이 줄어서 다행이다만. 그렇다고 방심할 수는 없지.’
아일린은 렘리아와 사절단을 향한 경계를 철저히 하겠다고 다짐하며 파시우스에게 물었다.
“그래. 그것 말고 이렇게 직접 보고를 하러 온 걸 보면, 또 다른 무언가가 있는 거겠지?”
“역시 황녀님이십니다. 눈치가 정말 귀신같군요.”
“시답잖은 잡설은 됐고, 어서 말해 보거라.”
“제 선임으로부터 전언이 왔습니다.”
“그 남자가?”
루드거에게 연락이 왔다는 말에 아일린의 눈동자에 흥미가 돌았다.
그 남자가 세오른에 돌아간 지 그렇게 오랜 시간이 흐르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자신에게 연락을 취하다니.
“이유가 무엇이더냐?”
“자금을 지원해 달라고 합니다.”
“뭐?”
순간 아일린은 자신이 뭘 잘못들은 줄 알았다.
“뭘 달라고?”
“돈을 달라는군요.”
“……장난치지 말고 토씨 하나 남김없이 똑바로 고해라.”
아일린의 따끔한 지적에 파시우스는 그제야 태도를 달리했다.
“최근 세오른에 재미있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 아십니까?”
“모른다.”
“어, 정말요?”
“내가 왜 거기에 신경을 써야 하느냐. 당장 처리해야 할 일들이 산더미이거늘.”
“그래도 세오른은 저희 황실에서도 자금을 지원해 주는 곳이니, 알아 두실 필요는 있지 않습니까.”
“그걸 대신 알아 와서 내게 고하는 것이 그대의 역할 아니었나?”
그건 그랬다.
파시우스는 어쩔 수 없다며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설명을 이어 나갔다.
“최근 세오른에 막대한 자금을 지원해 주는 투자자들 사이에서 수상한 움직임이 보인다고 합니다.”
“투자자들이?”
“예. 세오른으로부터 여러 특허와 이권을 받아 가는 기업들이 주가 되어 저들끼리 합심을 해서 세오른을 압박하는 중이라더군요.”
아일린이 흥미롭다는 듯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그거 재미있구나. 이번 사건으로 세오른이 흔들리니, 그 균열을 비집고 돈에 미친 하이에나들이 이빨을 비집어 넣으려는가.”
“기업이라는 것이 항상 이윤을 추구하는 자들 아닙니까.”
“그 수준이 과하다는 거다. 감히 삼킬 수 없는 걸 삼키려 하는 꼴이 뱀과도 같구나”
“아무튼, 이대로라면 세오른의 재정이 매우 큰 구멍이 날 것으로 보입니다.”
아일린이 턱에서 괴고 있던 손을 뗐다.
“단순한 협박이 아니라, 정말로 강하게 나가려는 거로 보아 이번 일을 허투루 벌이려는 것이 아니겠군.”
“무려 재정 전체의 3할을 담당하는 자들이 일시에 동맹을 맺었더군요.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다고 생각한 거겠죠.”
“흐음. 그래서 그 남자가 내게 도움을 요청한 건가?”
“어쩌시겠습니까?”
파시우스가 아일린의 의중을 물었다.
어떠냐고 한다면, 아일린은 굳이 세오른을 도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쪽이었다.
세오른은 제국의 영토에 있지만, 제국의 영향권을 벗어난 별개의 존재.
아일린 또한 언젠가는 세오른조차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자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견고한 성은 아무리 흔들고자 해도 절대 흔들리지 않는다.
그런 성이 지금 다른 적들에 의해서 위기에 처했다고 한다면, 오히려 도와주기보다는 중립을 유지하며 지켜보는 것이 나은 선택지다.
그럼에도 루드거는 아일린에게 도와달라고 연락을 보냈다.
“그 남자가 내게 부탁을 한 이유가 있겠지?”
“사실 부탁도 아니었습니다. 단지 제안일 뿐이죠.”
“제안? 이 상황에서? 그거 재미있구나.”
“루드거 씨가 말하기를, 세오른에 황성의 영향력을 더 늘려 주겠다고 합니다.”
“영향력을?”
“그걸 바라던 것이 아니냐고 묻더라고요.”
“하하하!”
아일린은 그 말을 듣는 순간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 승냥이 놈들을 처리하기 위해서, 제국의 호랑이를 부르겠다 이건가! 참으로 거만한 남자로다. 감히 황실을 감당할 자신이 있다는 건가?”
“꼭 그렇지만도 않겠지만요.”
“하지만 고작 부탁이라는 말로 세오른 재정의 3할을 채워 달라는 것은 너무 과하구나. 아무리 나라도 세오른 아카데미가 1년에 얼마나 되는 예산을 필요로 하는지는 어렴풋이 알고 있으니까.”
물론 황실의 비고를 개방한다면, 한 번 정도는 지원해 주는 것이 가능했다.
하지만 아일린은 철저한 계산주의였다.
“만약 도움을 준다면, 그는 내게 뭘 해 줄 수 있지?”
“루드거 첼리시 씨가 말하기를, 이것은 단순한 도움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하. 황실의 지원을 바라면서 도움을 구하는 것이 아니다?”
“3할을 전부 다 황실에서 감당해 줄 필요가 없다더군요.”
“뭐?”
아일린의 눈썹이 미묘하게 휘었다.
파시우스는 자신이 들은 것을 그대로 고했다.
“구멍이 난 30%의 예산 중, 황실에 요청한 금액은 고작 5%에 지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고작 5%.
물론 세오른의 1년 예산을 생각하면 그 5%마저도 절대 적은 금액이 아니다.
하지만 아일린에게는 본래 생각했던 금액이 6분의 1로 내려간 터라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렇다면 나머지 25%나 되는 자금을, 따로 충당할 방법이 있다는 말인가?”
“예. 단지 이렇게 연락을 보낸 것은, 이 기회에 욕심만 많은 놈을 몰아낼 필요가 있어서라고 하더군요.”
아일린은 이번엔 웃지 않았다.
그 대신 손가락으로 팔걸이를 툭툭 치며 고민에 들어갔다.
파시우스는 아일린이 지금 진지하게 저울질을 하고 있다는 걸 알았기에 가만히 기다려 주었다.
침묵이 얼마나 지속됐을까.
계산을 끝마친 아일린의 선홍빛 입술이 움직였다.
“우리에겐 나쁠 일이 전혀 없겠군.”
“예. 그렇겠죠.”
파시우스는 아일린의 말에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세오른이 위기에 처한 순간 황실이 돈을 더 풀어서 지원해 주면, 그것은 고스란히 황실의 이득으로 돌아간다.
자금은 꽤 많이 들겠지만, 그 이상으로 세오른의 최대 투자자의 자리에 오르며 동시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기기 때문이다.
사실 이 기회는 아일린에게 매우 매혹적인 먹잇감이었다.
지금의 황제인 아일린의 아버지는 세오른에 일정 돈을 지원해 주기만 하지, 그들에게서 충성이나 복종을 바라지 않았다.
아일린은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무릇 통치자라고 한다면 만인의 우러러봄을 받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호시탐탐 기회만 생긴다면 어떻게든 자신의 영향력을 높이고자 했다.
‘그러나 세오른은 수많은 자가 어떻게든 포크와 나이프를 들이밀고자 혈안이 된 곳.’
아무리 황실이라 하더라도 억지로 비집고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러던 차에 기회가 생겼다.
큼지막한 고기가 남은 것이다.
‘그런데 썩 마음에 들지는 않는구나.’
아일린은 이런 기회는 자신의 힘으로 쟁취해야 성이 차는 성격이었다.
누군가 보란 듯이 밥상을 차려 준 것을 입에 대는 건 오히려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번 건은 자존심을 부리기에는 너무 탐스러웠다.
‘참으로 빈틈없고 교활한 남자다. 내게 기회를 달라고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기회를 주는 입장으로 제안을 내걸다니.’
자존심이 상하지만, 그 모든 것을 감안하고서도 매혹적인 제안이다.
“그래. 5퍼센트 정도야 내 개인적으로도 얼마든지 지원해 줄 수 있지.”
“괜찮겠습니까?”
“아바마마라도 같은 결정을 했을 테니까. 이런 흔치 않은 기회를 놓칠 수도 없고 말이지. 마음에 들지 않지만 말이야.”
“그렇다면 승낙한 것으로 알고 답신을 보내겠습니다.”
“그보다 궁금하군. 내 도움을 받지 않겠다고 한다면, 세오른의 남은 예산의 25퍼센트는 어디서 충당을 하겠다는 거지? 어디서 기인이라도 구했나?”
“아, 그거요?”
파시우스가 별거 아니라는 어투로 말했다.
“본인이 내겠다는데요?”
“뭐라?”
* * *
“어떻게 한 거예요?”
다음날.
기획처장실에서 서류 작업을 하던 루드거에게, 엘리사 총장이 다짜고짜 찾아와 물은 말이었다.
“무엇을 말입니까?”
루드거가 서류에서 시선을 뗀 뒤, 눈에 쓴 무테안경을 벗으며 말했다.
“아. 안경은 계속 쓰셔도 돼요.”
“왜입니까?”
“보기 좋거든요. 이런 지적인 모습도 괜찮네요.”
“농담이십니까.”
“농담은 아니었어요. 아무튼, 그거 어떻게 한 거예요?”
“그렇게 에둘러서 물으시면, 저도 마땅히 대답을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만.”
“그거 말이에요 그거! 투자자!”
아.
루드거는 그제야 총장이 자신을 찾아온 이유를 깨달았다.
“제가 투자자를 구할 수 있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루드거는 순수하게 물었다.
이미 다 끝난 이야기인데, 왜 이제 와서?
엘리사는 진심으로 물어보는 루드거의 모습에 기가 찼다.
이 사람, 일부러 이러는 건가?
“네. 구하겠다고는 했죠.”
“그래서 구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면 끝난 문제라고 봅니다만.”
“그걸 하루 만에 할 줄은 몰랐죠. 게다가 무려 올해 예산의 25퍼센트를 한 번에 충당하다니.”
엘리사는 답지 않게 표정에서 감정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며 물었다.
“대체 이 ‘올리버’라는 사람은 누구인가요?”
“최근 급성장한 로열 스트리트의 주인으로, 레더벨크에서 가장 빠르게 부유해진 남자입니다.”
“로열 스트리트요? 그 가면을 쓴 오너라는 사람이 올리버인가요?”
“아시는군요.”
“인근 도시의 소식은 저도 들으니까요. 그래서 이 사람이 저희 세오른을 후원하겠다, 이거죠?”
“예. 무슨 문제 있습니까?”
“문제라고 할 것까진…….”
문제라고 할 것은 없었다.
검은돈도 아니고, 정당한 사업을 통해 벌어들인 자금이라 혹시라도 받은 뒤에 책잡힐 일도 없었다.
황실에서 남은 부족한 자금까지 지원해 주겠다는 확답까지 받은 이상, 그 가증스러운 승냥이들의 농간에 놀아나지 않아도 됐다.
하지만 엘리사는 옷 위에 달라붙는 기묘한 이질감을 씻어 낼 수가 없었다.
마치 뿌연 새벽의 안개처럼, 서서히 옷을 적시며 스며드는 기분.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분명 좋게 풀리는 이 상황을 기뻐해야 했지만.
오랫동안 총장의 자리를 지켜 온 그녀의 본능은 그러지 못했다.
“그 사람이 바라는 것은 뭐죠?”
“순수한 호의, 라고 하면 믿지 않으시겠죠.”
“세상에 그런 건 없으니까요.”
“기존의 투자자들이 맡고 있던 마법 물품의 독점과 특허권에 대한 허가와 세오른과의 긴밀한 협업을 요청했습니다.”
“그거야 뭐, 나쁘지 않네요. 전 또 무리한 조건을 말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기존에 하이에나들이 뜯어 가려는 것보다는 적게 바라네요?”
“나머지는 총장님의 재량에 맞춰서, 무엇을 더 줄 수 있는지 물어봤습니다.”
“남은 선택지는 제게 맡기겠다, 이건가요. 노골적으로 제 기분을 상하지 않으려는 의도가 보이는데요.”
“그래서 싫으십니까?”
엘리사가 안색을 싹 바꾸며 말했다.
“어머. 싫다니요. 그래도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순수한 호의보다는, 이렇게 서로 주고받는 것이 훨씬 더 나은 거 아니겠어요?”
“그거 다행이군요.”
경계심을 한층 누그러뜨린 엘리사가 피식 웃으며 물었다.
“웃기죠? 누군가의 호의를 함부로 믿지 못하는 모습이라니. 혹시 실망이라도 하셨나요?”
“실망할 것이 뭐가 있습니까. 총장님은 세오른을 책임지는 가장 높으신 분입니다. 그에 따른 책임감이 막중하니,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당연합니다.”
“이해해 줘서 고맙네요. 이해심이 깊은 건지. 아니면, 저와 같이 책임져야 할 사람들이 많아서 그런 거려나?”
총장의 장난스러운 물음에 루드거 또한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사람은 누구나 책임감을 지닌 채 삽니다. 직책이 높고 낮고는 상관없는 일이죠.”
“하지만 그러지 않은 사람도 있잖아요?”
“그러니 깨닫게 해 줘야 합니다.”
안경 너머 루드거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책임을 등한시하고, 자신의 처지를 망각하면 어떻게 되는지 말이죠.”
* * *
큰손은 자신의 화려한 자택에서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며 와인을 음미했다.
‘엘리사 총장이 아무리 발을 빼려 해도 이것마저 거부할 수는 없겠지.’
그는 낮게 웃음을 흘렸다.
‘알아서 고개를 숙여서 서신을 보낼 걸 생각하니, 벌써부터 흥이 돋는군.’
큰손은 잔에 남은 와인을 한꺼번에 머금었다.
평소에 술을 멀리하지만, 오늘 같은 날은 기분 좋게 취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저, 회장님.”
“왜 그러지?”
갑자기 자신의 비서가 찾아오지 않았다면 말이다.
“세오른에서 급보라도 보내왔나? 조건을 받아들이겠다고?”
“그, 그것이…… 반대입니다. 오히려 저희의 조건을 거부하고, 이대로 계약을 파기하겠다고 합니다.”
“……총장이 정신이 나가기라도 한 건가? 이 정도의 투자자들이 한 번에 빠지면 불리한 건 본인일 텐데?”
“그, 구했다고 합니다.”
“구해? 뭘 구했다는 거냐? 똑바로 말해!”
“투자자, 투자자 말입니다. 저희가 빠진 자리를 대체할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이제 저희와의 계약이 필요 없다고…….”
“뭐?”
쨍그랑.
큰손이 쥐고 있던 와인 잔이 바닥에 떨어지며 산산조각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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