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UA - 350화 란팔츠 (1)

 ◈ 350화 란팔츠 (1)




“화려하게 저질러 주셨네요.”




엘리사가 총장실로 루드거를 불러서 한 말이었다.




다만, 질책하는 말투와 다르게 그녀의 표정은 너무나도 개운해 보였다.




평소에 짓는 가식적인 미소가 아닌, 기쁨의 감정이 순수하게 가미된 미소였다.




“어땠습니까?”




“어땠냐뇨. 덕분에 아주 곤란하게 됐어요. 기존에 세오른의 대형 투자자들이 일시에 물갈이가 됐으니까요. 밖에서는 벌써부터 시끄럽다고요.”




“그렇습니까.”




“안 그래도 그거 때문에 평소 친하게 지내던 기자들이 얼마나 달라붙어서 들들 볶아 대던지. 제가 다 피곤할 지경이었다니까요?”




“그래서 기자들에겐 뭐라고 대답하셨습니까?”




“뭐 있겠어요? 그냥 있는 사실을 그대로 말해 줬을 뿐이죠. 친절한 기부자께서 새로이 투자자가 되셨다고 말이죠. 여러모로 급작스러운 개혁이었네요.”




루드거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진심은 어떻습니까?”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에요.”




이번에는 총장으로서 의례상 하는 말이 아닌, 엘리사라는 한 명의 인간으로서 한 말이었다.




“안 그래도 예전부터 외부에서 세오른을 쥐고 흔들려던 놈들, 눈에는 밟혀도 어떻게 할 수 없었는데. 이번 기회에 일거에 쓸어 내니 이보다 더 시원할 수가 있을까요?”




“기뻐 보이시니 다행입니다.”




루드거가 예의를 차리며 답하자 엘리사는 그런 루드거를 빤히 응시했다.




양손을 턱에 괸 채, 루드거를 바라보는 그녀의 황금빛 눈동자가 평소와 자못 다르게 더 반짝인다.




“흐음. 이거 참 신기하단 말이죠.”




“무엇을 말입니까.”




“루드거 선생님, 나이가 몇이셨죠?”




“올해로 27살 됩니다.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그래서 놀랍다는 거예요. 하는 행동은 이미 40줄에 접어든 사람 같잖아요.”




빈말이나 놀리기 위해서 하는 말은 아니었다.




루드거의 행보는 그 나이의 사람과는 차원이 달랐다.




재능? 혹은 다른 무언가의 영역?




엘리사는 처음에는 그것을 경계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상대의 실력이 뛰어나면 뛰어날수록, 언젠가 폭발할지 모르는 시한폭탄의 위력은 더 강하다는 걸 모르지 않았으니까.




엘리사는 사람을 쉽게 믿지 않는다.




총장이 되기 전부터 그랬고, 총장이 된 이후에는 인간을 더 철저하게 의심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루드거가 보여 준 헌신적인 모습은 그런 엘리사의 의심마저 씻어 낼 정도였다.




물론 엘리사는 모든 경계심을 완전히 걷어 내지는 않았다.




단지 누그러뜨린 정도.




하지만 지금 이 비즈니스적인 관계를 유지할 동안에는, 상대방의 실력은 확실히 믿고 맡길 수 있다는 건 확실했다.




‘흐음. 아쉽네. 신분만 뭔가 더 깨끗했다면 조금 더 믿고 맡길 수 있을 텐데.’




루드거는 이미 충분한 직책을 담당하고 있었지만, 엘리사가 생각하는 것은 그 이상이었다.




기획처장도 세오른에서는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직위지만.




루드거의 실력이라면 거기서 멈추지 않고 그 이상도 가능했다.




‘가령, 차기 세오른의 총장 자리라거나.’




루드거는 젊고 능력이 있다. 자신의 욕망대로 살지 않으며 학생을 생각하는 마음도 있다.




본인은 아니라고 한사코 부인하지만, 엘리사의 눈은 속일 수 없었다.




정체가 불분명하다는 것, 최소 범법자들과 엮여 있다는 부분이 변수이자 걸림돌이지만.




그런 것조차 오점이 되지 않을 정도로 완벽한 사람이다.




‘위장 신분이 문제이지만, 들키지 않는다면 상관없지 않을까? 안 들키면 위장 신분이 아니라 진짜 신분이잖아?’




세오른의 총장으로서 해서는 안 될 생각마저 들 정도.




그 정도로 루드거는 자신의 차후 후임으로 적격인 사람이었다.




‘물론 나도 아직 젊고, 쉽게 은퇴할 수 없는 사람이지만.’




엘리사에겐 꿈이 있다.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에게 자리를 넘겨준 뒤, 은퇴해서 여생을 보내는 것.




세오른 총장 자리에서 물러나도 그녀는 렉서러 등급의 마법사이며, 어디를 가도 대접을 받을 테니까.




하지만 엘리사의 꿈은 그것마저 거부했다.




그녀는 말 그대로 조용히 사는 걸 원했다.




일을 그만두고, 벌어 둔 돈으로 돈 많은 백수의 삶을 살고 싶었다.




물론, 혼자는 외로우니 참한 남자를 만나서 결혼을 하는 것까지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그마저도 까다로웠다. 엘리사의 높은 눈높이에 차는 사람이 없으면 이뤄질 수 없는 꿈이었으니까.




으레 꿈이란 것이 그런 것 아니던가.




엘리사는 그 이뤄질 수 없는 꿈을 마음 깊은 곳에 품고 있었다.




소중한 보물 상자에 넣은 뒤 마음이라는 대해의 아래 돌과 함께 가라앉혔다.




언젠가 다시 이것을 꺼낼 수 있기를 바라면서.




감정이 닳고 닳아 메마른 총장 엘리사가 아닌.




한 명의 사람으로서.




그런데 요즘 들어 그 꿈이 다시금 깊은 바닷속에서 부상해서 고개를 짓쳐 들려는 낌새가 보이기 시작했다.




전부 눈앞의 남자 때문이었다.




엘리사는 루드거에게 총장의 자리를 넘기고 은퇴하는 삶을 그려 보았다.




살짝 애매했다.




아니면 차라리 결혼을 해?




엘리사의 시선이 순간 날카로운 짐승처럼 변했다.




루드거는 자기도 모르게 몸을 바르르 떨었다.




“……?”




루드거는 갑자기 든 오한에 당황했다.




뭐지? 혹시 스승님이 또 무슨 이상한 변덕을 꾸미고 있는 건가?




그 제멋대로인 성격을 감안한다면 그럴 가능성이 넘치고도 남았다.




그때 엘리사가 물었다.




“루드거 선생님은 결혼 계획 있으세요?”




“……다시 한번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루드거는 순간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고 다시금 물었다.




자기도 모르게 본심이 살짝 튀어나온 엘리사는 아차 싶어서 말을 바꿨다.




“계획 있으시냐고 물었어요.”




“계획이라면…….”




“있잖아요. 새로운 투자자를 구한 것까진 좋지만, 기존에 둥지를 틀고 있던 하이에나들이 그렇게 쉽게 수긍하지는 않을 테니까요.”




“확실히 그건 그렇군요.”




루드거가 수긍하자 엘리사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화제를 자연스럽게 돌리는 데 성공했다.




“기존에 쥐고 있던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욕심을 더 부리려던 자들이에요. 눈뜨고 자신의 밥상을 빼앗기게 생겼으니, 눈이 뒤집혔겠죠. 당장은 자기들의 과실이 있으니 조용히 있겠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물어 늘어질 거라는 말씀이군요.”




“척하면 척이네요. 바로 그거예요. 직접 세오른에 찾아오겠죠. 음험한 뒷거래를 제안하기 위해서요.”




“뻔뻔하군요.”




“뻔뻔하죠. 그래서 그 자리에 오른 거고요. 루드거 선생님. 그걸 아셔야 해요. 세오른을 노리는 하이에나들은 절대 자신의 행동을 부끄럽다고 여기지 않는다는 거.”




“대충 이해는 갑니다.”




루드거는 인간의 욕망을 많이 봐 왔다.




이미 쥐고 있는 것만으로도 부족하게 여겨, 더 많은 것을 거머쥐려는 자들.




그런 사람들의 욕망 때문에, 힘없는 서민들은 빼앗기고 짓밟힌다.




“그래도 걱정하지 마세요. 찾아오면 제가 아주 혼쭐을 내서 쫓아낼 테니까요.”




“그러시지 않아도 됩니다. 차라리 저에게 넘기십시오.”




“네?”




“어차피 이번 일은 예산을 담당하는 저희 기획처에서 손봐야 할 일입니다. 그러니 그들이 무언가를 따지려고 한다면, 총장님이 아닌 저를 찾아와야 하는 것이 순리 상 맞는 일이죠.”




“그 사람들이 그런 수모를 견딜까요?”




무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세오른에 막대한 자금줄을 대던 자들이다.




총장도 아니고 난데없이 일한 지 1년 차도 되지 않은 새파란 기획처장을 만나라고?




보통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 아닐 것이다.




“수모를 못 견디면 그치들이 뭐 어쩔 겁니까.”




루드거의 대답은 간단하면서도 통쾌했다.




저들이 불만이면 뭐 어쩔 건가.




어차피 지금 주도권을 쥐고 있는 것은 이쪽이다.




“푸훗. 그것도 그러네요. 암, 아쉬운 사람이 알아서 고개를 숙여야죠. 그러면 믿고 맡길게요.”




“저도 그들의 저열한 행태에 적지 않게 짜증이 난 상태이니, 봐주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렇게까지 말씀해 주면 저야 든든하죠.”




루드거는 엘리사에게 인사를 건넨 뒤 총장실을 떠났다.




다만, 밖에 나가기 전에 엘리사에게 넌지시 물었다.




“총장님.”




“네. 혹시 뭐 또 궁금한 거 있나요?”




“혹시 결혼 계획 잡으십니까?”




“……!”




루드거의 그 말에 엘리사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입술을 벙긋거렸다.




동시에 조금 전 자신이 했던 실언을 루드거가 제대로 들었다는 걸 깨달았다.




엘리사의 뺨이 약간이지만 붉게 상기되었다.




“뭐…… 그런 나이시니까 이해 못 할 건 아닙니다만.”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루드거를 향해 엘리사가 빽 외쳤다.




“그런 거 아니거든요!”




* * *




루드거는 엘리사에게, 투자자들에게서 연락이 오면 전부 자신의 관할로 돌려 달라고 말했다.




그것을 충실히 이행했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손님이 찾아왔다.




그는 기획처실에 다짜고짜 찾아와 루드거를 만나고자 했다.




그 모습에 직원들은 당혹스러워했지만, 자연스럽게 루드거가 있는 곳을 안내해 주었다.




사전에 루드거가 이런 사람이 올 거라고 언질을 줬기 때문이었다.




란팔츠 기업에서 온 손님, 모르도 앤슨은 씩씩거리며 자신의 앞에 앉은 남자를 노려보았다.




그는 자신이 찾아왔음에도 조금 전부터 진행하고 있던 서류 작업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애초에 이쪽에 관심을 주는지도 궁금할 지경이다.




‘손님이 왔는데, 대꾸도 안 해?’




게다가 자신이 누구인가.




무려 그 란팔츠에서 온 사람이다.




레더벨크를 넘어 엑실리온 제국에서 손에 꼽히는 거대 기업.




그곳에서 찾아온 손님을, 일개 아카데미 사람이 푸대접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안 그래도 모르도는 이번 일 때문에 잔뜩 열이 오른 상태였다.




그는 모든 일의 총책임자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낮은 직위에 있는 사람도 아니다.




이런 대접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 뭐 하는…….”




모르도가 루드거에게 따지려는 순간, 루드거가 검지를 들어 올렸다.




쉿─.




조용히 하라는 제스처.




그 어처구니없는 행동에 모르도는 화를 내야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오히려 자기도 모르게 입을 다물고 말았다.




이쪽에 눈길조차 주지 않는 루드거의 모습은 무어라 말하기 힘든 위압감이 있어서였다.




만나는 순간 온갖 불만의 말을 쏟아 내려 했던 모르도는 가만히 루드거를 지켜봤다.




사락. 사락.




루드거가 서류를 넘기는 소리만이 조용한 공간에 주기적으로 울려 퍼졌다.




모르도는 자신이 마치 허깨비에 홀린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서류 확인이 끝났는지, 루드거가 서류 뭉치를 책상 한쪽에 놓았다.




“그래서, 요즘 같은 바쁜 시기에 어쩐 일로 찾아왔습니까?”




루드거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최면이 탁 풀리기라도 한 것처럼, 모르도의 정신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는 자신이 찾아온 목적을 상기하며 입을 열었다.




“루드거 첼리시 기획처장. 당신이 이번 일의 책임자 맞나?”




“예. 제가 이번 투자자들의 후원 예산과 명단을 관리하는 책임자입니다.”




루드거가 쉽게 수긍하자 모르도가 코끝을 씰룩였다.




“지금 이게 뭐 하자는 짓인가! 어찌 우리 란팔츠가 후원자 명단에서 사라진 거지?”




“그걸 왜 저에게 묻는 겁니까. 란팔츠는 최근에 후원직을 그만두겠다는 의사를 비치지 않았습니까.”




루드거는 새벽의 고요한 호수와도 같은 눈동자로 모르도를 응시했다.




“그런데 다짜고짜 찾아와 이렇게 성을 내시니, 저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군요.”




“우리가 언제 그만두겠다고 했나! 그저 조건을 조금 더 올려 달라고 제안했을 뿐이지!”




“예. 그리고 그 조건에 응하지 않으면, 후원자로서 손을 떼겠다고 했죠. 그리고 저희는 그 조건에 응하지 않기로 결정을 내렸습니다. 이제 이해가 가십니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런 큰일을 멋대로 처리해도 되는 건가! 절차라는 것이 있지 않은가, 절차라는 것이!”




란팔츠는 애초에 루드거를 설득할 생각이 없었다.




그는 어떻게든 억지를 부려, 이번 일을 없던 것으로 무마하려는 속셈이었다.




루드거는 그 노골적인 속내를 읽고는 조소를 지었다.




총장은 이들이 어떤 교활한 방법으로 회유를 할 거라 말했지만 그건 틀렸다.




그들은 생각 이상으로 더 막무가내였다.




“게다가 우릴 쫓아내고 받은 후원자가 뭐? 어디서 굴러먹다 온 건지도 모를 가난뱅이 거리의 주인 놈을 데려와서는……!”




이대로 놔두면 제 분을 못 이겨 계속 시끄럽게 소리를 지를 것 같았다.




루드거는 곧바로 중재에 들어갔다.




“조용히 하지.”




“뭐, 뭐? 지금 뭐라고…….”




“조용히 하라고 했다.”




존대조차 집어치운 고압적인 말.




모르도는 입술을 벙긋거리다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지금 손님에게 그게 무슨 예의란 말인가……!”




“그건 이쪽이 할 말이지. 멋대로 업무를 보고 있는 사람에게 찾아와 시끄럽게 구는 것은, 이미 이쪽이 눈감아 줄 수 있는 무례를 아득히 벗어난 일이 아닌가.”




루드거가 모르도를 향해 손짓했다.




“대접받는 귀빈조차 이곳에서는 정숙을 유지해야 하거늘, 그조차 되지 못하면서 이곳에서 언성을 높여?”




그의 몸에서 새어 나오는 가공할 마나가 공간을 잠식했다.




“세오른이 우스웠나?”




루드거의 눈동자에서 푸른 불꽃이 튀었다.




“나를 만나려 했으면, 감히 너 따위가 아니라 회장이 직접 왔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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