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UA - 360화 그늘 속 추적자들 (2)
◈ 360화 그늘 속 추적자들 (2)
판토스의 등장에 엘프 암살자들은 당황했다.
‘어떻게? 주위 사람들이 볼 수 없도록 결계까지 펼쳤는데.’
루드거와 주고받은 그 치열한 싸움 속에서도 주변에서 아무런 반응이 없던 것이 그런 이유였다.
그런데 저 수인은 그런 결계를 손쉽게 뚫고 들어왔다.
또 놀라운 것은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엄청난 속도였다.
지휘관인 여성 엘프는 이를 악물었다.
‘단순히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우리가 전부 떠밀려 날아갔다.’
대체 저 살집 가득한 몸으로 어떻게 그런 움직임을?
뚱뚱해 보이는 것은 겉모습일 뿐이고, 사실 안쪽은 전부 근육으로 가득 차 있기라도 한 것인가?
엘프들의 추측은 놀랍게도 정확했다.
그러나 그것을 알았다고 해서, 그들의 미래가 바뀌는 것은 아니었다.
“언제까지 그렇게 가만히 있을 거냐?”
긴 백발을 산발로 기른 거구의 수인.
판토스가 엘프들을 도발했다.
“겁이라도 집어먹은 건가? 역시 너희 귀쟁이들은 사냥할 가치도 없을 정도로 겁쟁이로군.”
“……!”
그 말에 엘프들이 발끈했다.
감히 냄새나는 짐승 놈이, 고귀한 엘프를 모욕해?
심지어 이 자리의 엘프들은 가장 극성맞은 자들이 모인 쉐이드워든 가문 출신.
누구보다도 엘프들에 대한 선민사상이 가득한 자들이었다.
판토스의 도발은, 그 효과가 기대 이상으로 작용했다.
“흠.”
엘프들에게서 용솟음치는 전의를 마주하면서도, 판토스는 눈에서 실망의 기색을 지우지 못했다.
아직도 부족했다.
그것은 매우 거만한 행동이었다.
적들을 눈앞에 두고도 긴장조차 하지 않다니.
하지만 루드거는 그런 판토스를 질책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그럴 자격이 있었으니까.
“죽어!”
가장 먼저 엘프 검사 한 명이 판토스를 향해 달려들었다.
양손에 엘븐소드를 쥐고 등 뒤로 바람의 정령을 불러 속도에 박차를 가했다.
검 끝에 은은하게 어리는 것은 숙련된 검사만이 사용할 수 있다는 희미한 오러.
그만큼 상대방을 반드시 죽이겠다는 의지가 돋보였다.
둘의 거리가 삽시간에 좁혀지고, 엘프의 검이 판토스의 피부에 닿으려는 순간.
퍼억!
엘프의 머리가 깔끔하게 날아갔다.
목 위로 아무것도 남지 않은 엘프 검사의 몸이 실 끊어진 인형처럼 볼품없이 쓰러졌다.
“어?”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동료 엘프들이 얼빠진 소리를 냈다.
그들이 봐야 할 풍경은 분명 쌍검에 난도질당해야 할 판토스의 모습이었다.
실제로 검이 몸에 닿기 직전까지도 판토스는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그런데 결과는 오히려 그 반대였다.
그 찰나의 순간, 판토스의 주먹이 엘프 검사의 머리를 먼저 부숴 버린 것이다.
“이, 이게 무슨.”
“…….”
당황하는 엘프 검사들과 궁수들.
그중 유일하게 입을 열지 않고 식은땀을 흘리는 엘프 여성이 있었다.
판토스의 시선이 그 엘프에게 닿았다.
몸을 흠칫 떠는 엘프를 무시하며 판토스가 중얼거렸다.
“한 놈인가?”
쳐들어온 놈이 거의 스물은 되는데, 그중 자신의 움직임을 본 녀석이 한 명뿐이라니.
판토스는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싸움이 있다고 해서 냉큼 달려왔는데.”
판토스가 불만 어린 시선으로 루드거를 응시했다.
고작 이런 녀석들을 상대할 거면, 왜 자신을 불렀냐는 것이다.
“너 말고는 없었다.”
“알렉스도 있지 않았나.”
“그놈은 예쁜 여자 있으면 제대로 안 싸워.”
“아…….”
하긴. 엘프들은 미모 하나만큼은 탁월한 종족이다.
게다가 지금 쳐들어온 엘프 중 절반은 여성이기도 했다.
엘프들은 성별을 타고나지 않은, 아니 오히려 여성들이 더 강력한 권력을 지니는 일종의 모계 사회였다.
당연히 그런 엘프들을 상대해야 하는 입장에선, 알렉스는 별로 좋은 선택지가 아니었다.
“게다가 그쪽이 요즘 너무 몸을 안 움직여서, 혹시라도 녹이 슬지는 않았는지 확인해 보고 싶었거든.”
루드거의 말에 판토스의 머리 위에 달린 새하얀 귀가 쫑긋 움직였다.
“본인의 감이 무뎌진 것 같나?”
“……내 감각은 예전부터 항상 그대로였다. 아니, 오히려 전보다 더 예리해졌지.”
판토스가 주먹을 으득 말아 쥐었다.
“고작 날벌레 몇 마리 잡는 거로 증명하기엔 한없이 부족하지만, 보여는 주겠다.”
“그거 마음에 드는 대답이군.”
“대신 다음번에는 조금 더 보람이 있는 사냥감 녀석을 불러 줬으면 좋겠군.”
“노력해 보지.”
실없이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을 보며 멍하니 있던 엘프들이 정신을 찾았다.
“우리를 앞에 두고 실없이 이야기나 나눈다고?”
“우리가 누구인지 알고!”
아직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젊은 엘프들이 특히 감정적으로 굴었다.
엘프들의 대장은 그런 부하들을 말려야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목소리가, 안 나와.’
조금 전 판토스의 움직임을 두 눈으로 똑똑히 목도한 그는 전의를 완전히 상실했다.
저 뚱뚱한 수인은 겉보기엔 우스꽝스럽지만, 상상을 초월하는 괴물이었다.
루드거 첼리시라는 인간도 상대하기 껄끄러운데, 저런 괴물까지 나선다면 이쪽의 승산은 없다.
당장 지휘관으로서 후퇴를 명령해야 했다.
하지만 몸이 말을 듣질 않았다.
의지의 통제를 벗어난 육체는 포식자 앞에 얼어붙었다.
‘뭔가 이상해! 설마, 저 수인이?’
과연 이 자리에서 가장 뛰어난 실력자답게, 그녀는 판토스가 자신에게 무언가를 했다는 걸 눈치챘다.
‘다른 동포들 모르게 나에게만 기운을 집중하고 있어!’
소스라치게 놀랄 일이다.
한 개체로서 지니고 있을 강자로서의 기세가 단 한 명을 노리고 뿜어낼 수 있는 것이었던가?
아무리 이를 악물어도 덜덜 떨리는 손은 어찌할 줄 몰랐고, 방황하는 동공은 갈 곳을 잃었다.
판토스는 지휘관에게 기세를 계속 가하면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온다!”
상대의 강함을 아직 명확히 모르는 엘프 전사들이 자세를 잡고 판토스를 상대할 준비를 했다.
그러나 그들의 노력은 의미 없는 발악이었다.
판토스가 한 걸음을 내디딘 순간, 멀리 떨어진 그의 모습이 지척까지 다가왔으니까.
“어?”
그런 소리와 함께 엘프 검사의 목이 부러졌다.
그가 자신의 죽음을 채 인지하기도 전에 다른 엘프들이 하나둘씩 픽픽 쓰러졌다.
찰나의 순간 판토스가 엘프들을 모두 스쳐 지나갔고.
엘프들은 거의 동시라고 해도 좋은 타이밍에 쓰러졌다.
살아 있는 엘프는, 판토스가 기세로 찍어 누르는 엘프 지휘자 빼고는 없었다.
“이제야 정리됐군.”
판토스가 손을 가볍게 털었다.
동시에 뿌렸던 기세를 회수하자 생존자 엘프가 기침을 토하며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커헉! 허억.”
공포에 잠식된 몸은 숨을 쉬는 것조차 까먹고 있었다.
엘프 지휘관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판토스를 올려다보았다.
“어, 어떻게. 수인이 그런 힘을. 그런 건 대족장이나 가능한 거라고…….”
판토스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몸을 옆으로 돌려 길을 터 주었을 뿐이다.
이쪽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오는 남자를 본 엘프 지휘관은 아연한 표정이 되었다.
그림자를 두른 루드거는 어두운 밤에서도 뚜렷이 보였다.
촤아아.
구둣발이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몸에 두른 그림자가 불씨처럼 흩어진다.
주변의 결계도 사라지고, 밤하늘에 떠오른 달빛이 루드거의 뒷모습을 비추었다.
역광으로 인해 얼굴이 가려졌지만, 그 푸른 눈동자는 도깨비불처럼 선명했다.
실수였다.
이 남자를 건드려서는 안 됐다.
멀리서 지켜만 보고 본대에 연락을 취해야 했는데, 오만함에 눈이 멀어 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후회한들 늦었다.
이미 자신의 부하들은 모두 죽었고, 두 괴물 앞에선 도망조차 칠 수 없었으니까.
“그래. 이제야 차분히 대화를 나눌 수 있겠군.”
툭.
루드거가 지팡이 끝으로 지면을 치자 땅이 불쑥 솟아올랐다.
루드거는 거기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난데없이 나를 습격한 이유가 무엇이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내가 엘프들에게만큼은 원한을 살 만한 짓을 하지 않았는데 말이야.”
다른 종족과는 접점이 그다지 없다시피 한 루드거다.
그나마 가능성 있는 일이라면, 일전에 벨라루나가 경고했듯 세계수 해킹 관련일 텐데.
‘벨라루나를 찾아온 것도 아니고, 곧바로 나를 노렸다. 다른 무언가가 있다는 건데.’
하지만 루드거의 질문에도 엘프는 입을 꾹 다물기만 했다.
뭐, 쉽게 대답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루드거가 판토스를 향해 말했다.
“그녀를 데려와라.”
“…….”
판토스는 눈빛으로 ‘내가?’라고 물었지만, 루드거의 단호한 시선을 보는 순간 마지못해 자리를 떠나고 말았다.
홀연히 사라진 판토스를 본 엘프 지휘관은 대체 루드거가 누구를 부른 건지 의문이 들었다.
그것은 금방 알 수 있었다.
“히에에엑!”
사라졌던 판토스는 금방 돌아왔다.
옆구리에 무언가를 하나 끼고서 말이다.
철푸덕.
바닥에 쓰러진 벨라루나는 아픈 엉덩이를 매만졌다.
“이, 이게 갑자기 무슨 일이죠? 갑자기 들이닥쳐서 저, 저를 이런 곳까지 데려오다니.”
“벨라루나. 네 도움이 필요하다.”
“네?”
“여기 이 엘프의 자백을 받아 낼 필요가 있어서 말이지.”
루드거의 말에 벨라루나는 그제야 엘프 지휘관을 발견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쉐, 쉐이드워든?”
엘프 지휘관의 녹색 로브에 새겨진 문양을 알아본 벨라루나는 목소리를 떨었다.
당혹스러운 것은 엘프 지휘관도 마찬가지였다.
“왜 동포가 여기에……?”
“리, 리더! 왜 이분이 여기에 있는 거죠?!”
벨라루나가 자세한 설명을 바란다는 시선으로 루드거를 돌아봤다.
루드거는 어깨를 가볍게 으쓱였다.
“나도 모른다. 멋대로 나를 찾아와 결계에 가두고, 습격한 것은 이 녀석들이었으니까.”
“그런…….”
“오히려 내가 묻고 싶군. 너는 추격자들이 오는 것은 꽤 나중의 일이라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생각보다 빨리 왔군.”
“저, 저도 그런 줄 알았는데…….”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던 엘프 지휘관이 입술을 일그러뜨렸다.
“그랬군. 신수에 몰래 숨어들어 온 건방진 침입자가 바로 너였어! 이 일족의 배신자!”
“히익!”
벨라루나는 판토스의 등 뒤로 후다닥 숨었다.
엘프 지휘관은 그런 벨라루나를 찢어 죽일 듯 노려보았다.
루드거는 턱을 쓸었다.
“흐음. 그렇다는 건 딱히 벨라루나 때문에 나를 노린 것이 아니란 소리인데. 다른 이유가 있다 이거로군.”
“…….”
엘프 지휘관은 다시 입을 다물었다.
무슨 짓을 해도 정보를 발설하지 않겠다는 태도.
“외부의 문제를 제거하기 위해 보낸 추격자이니, 어지간한 육체적인 고통으로는 입을 열지 않겠지. 그러니 서로에게 좋은 방법으로 가자고.”
루드거가 벨라루나에게 턱짓을 했다.
“벨라루나.”
“네, 네!”
“이 엘프가 입을 열 수 있도록 만들어라.”
“제, 제가요?”
“그러라고 너를 부른 거다.”
“강제로 끌고 온 거잖아요.”
벨라루나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 시선은 엘프 지휘관에게 떨어질 줄 몰랐다.
그녀의 눈빛에 이채가 맴돌고, 입가에 조금씩이지만 미소가 맺혔다.
“그, 그래도 리더의 명령이라면…….”
“뭐, 뭐냐. 뭘 할 생각이냐!”
불안감을 느낀 엘프 지휘관이 몸을 떨었지만, 루드거가 마력으로 몸을 속박하자 꼼짝도 할 수 없게 됐다.
벨라루나는 엘프 지휘관에게 다가가며 파우치에서 시약을 하나둘 꺼냈다.
“헤, 헤헤. 거, 걱정하지 마세요. 고통을 줄 생각은 없으니까요.”
“그, 그건 뭐냐!”
“그냥 먹으면, 솔직해지는 약이에요. 진실의 약이라고도 하죠.”
“가, 같은 동포에게 이래도 되는 건가!”
죽이러 온 입장에서 할 말은 아니었지만, 상황이 이러니 그냥 나오는 대로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그 말에 벨라루나는 잠시 멈칫했다.
엘프 지휘관은 그 모습에 같은 동족으로서의 정이 먹힌 건가? 하고 희망을 품었지만.
벨라루나의 모습을 보고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그녀는 웃고 있었다.
동공이 풀어지고, 입가는 히죽 찢어졌으며 어딘가 정신이 나간 사람 같이 헤프게 웃고 있었다.
“헤, 헤헤헤. 저, 저 사실 궁금했거든요. 저랑 같은 엘프들에게도, 과연 제가 만드는 약이 통하는지 말이죠.”
순수한 광기에 지휘관은 압도되었다.
이 미친 엘프는, 같은 동족조차도 실험체로 쓰는 데 거리낌조차 없었다.
“자. 시원하게 들이키세요오.”
“으읍! 읍!”
벨라루나는 한 손으로 엘프의 양 뺨을 움켜쥔 뒤, 뚜껑을 뽑은 시약병을 벌어진 입 안으로 부었다.
“흘리면 안 돼요.”
전부 약을 부은 벨라루나는 두 손으로 입을 꾹 막은 뒤 그녀의 고개를 뒤로 확 젖혔다.
엘프 지휘관은 어떻게든 저항하려 했지만, 의미 없는 짓이었다.
약효는 곧바로 돌았다.
엘프 지휘관의 눈빛이 흐리멍덩해지더니 반응이 잠잠해진 것이다.
“됐어요. 이제 물어보는 것은 아는 선에서 다 말할 거예요.”
벨라루나의 말에 루드거는 확인차 물었다.
“이름은?”
“갈리엔 쉐이드워든.”
“여기엔 무슨 목적으로 왔지?”
“신수에 몰래 숨어든 일족의 배신자를 처단하기 위해서.”
“어떻게 이렇게 빨리 움직일 수 있었지?”
“당시 신목을 관리하고 있던 것이 뿌리 가문의 리프레 가주님이셨다. 그분께서는 침입자를 직접 마주하고 분노하시어, 가주의 권한으로 우리 쉐이드워든을 호출했다.”
“…….”
루드거가 날카로운 시선으로 벨라루나를 흘겨봤다.
벨라루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루드거의 시선을 피했다.
“……그런데, 나를 직접 공격한 이유는 뭐지?”
갈리엔이 멍한 목소리로 답했다.
“너에게, 플란테 가문의 기운이 느껴졌다.”
플란테?
루드거는 그것이 무엇인지 금방 떠올렸다.
플란테 가문은 과거 세계수를 관리 담당하던 엘프 원로 가문 중 하나.
그리고 지금은 완전히 사라져, 멸망해 버린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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