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UA - 363화 악마의 어울림 (1)
◈ 363화 악마의 어울림 (1)
헬리아의 손길이 더욱 요염해졌다.
입술은 촉촉해지고, 눈망울에는 미묘한 색기마저 담겼다.
주위에 분홍빛 기류가 흐른다.
동시에 뇌를 녹이는 것 같은 짙은 향기마저 풍겨 온다.
“어때? 관심 있지 않아?”
“…….”
옷깃을 타고 올라가던 손은 목으로 올랐다.
“나는 되게 관심이 많은데.”
그 기세를 이은 손이 루드거의 뺨에 닿으려는 순간.
“손 치우지.”
탁.
루드거는 헬리아의 손을 가볍게 쳐 냈다.
“관심 없다.”
동시에 주변에 가득했던 분홍빛 기류도, 코를 간질이던 향기도 모두 사라졌다.
헬리아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믿기지 않는다는 시선으로 루드거를 응시했다.
그녀는 뒤늦게 평소와 같은 장난스러운 미소를 머금으며 샐쭉 웃었다.
“후후. 이렇게 남자에게 거부당한 것은 오랜만이네.”
“평범한 유혹도 아니고, 환각으로 인간의 오감을 모조리 자극하니 어지간한 사람이라면 다 정신이 나가 버리겠지.”
“맞아. 그냥 몇 번 말만 걸어 줘도 정신을 못 차리더라고. 그런데 역시 당신은 다르네. 이렇게 자비 없이 차일 줄이야. 솔직히 자존심이 상하는걸. 이쯤 되니 오기가 생기는 거 같기도 하고?”
“진심이 아닌 행동은 아무리 겉이 두꺼워도 무게가 가벼울 수밖에 없지.”
“진심은 무거운 닻과도 같지. 어디론가 향하고 싶어도 묶여서 이도 저도 하지 못하게 되니까.”
헬리아는 양산을 빙그르르 돌린 뒤 바닥을 툭 하고 쳤다.
“그럴 바에는 바람 가는 대로, 물 흐르는 대로 자유롭게 사는 것이 훨씬 더 낫지 않아?”
뿌옇고 얇은 유리 같은 장막이 숙소를 돔 형태로 뒤덮었다.
“뭘 할 생각이지?”
“당연히 이야기지. 물론 이야기는 안에서 들어가서 하면 안 될까? 그래도 손님인데.”
“…….”
“에이. 설마 조금 전 장난 때문에 화가 난 거야?”
“……들어가지.”
루드거가 허락하자 헬리아는 발랄한 발걸음으로 안으로 들어왔다.
“으음? 안에는 생각보다 뭔가 별로 없네? 뭔가 잡다한 거로 다 꾸며 놨을 줄 알았는데.”
“있어 봤자 좋을 것이 없는 곳이니까. 여기 앉아라.”
헬리아는 시키는 대로 앉았다.
“아, 혹시 커피 같은 거 있어? 비싼 거로.”
“혹시 겸양이라는 단어에 대해서 알고 있나?”
“겸양, 겸손, 겸허. 나만큼 그런 단어에 어울리는 사람이 있을까? 아니지. 너희에겐 악마겠구나.”
헬리아는 스스로 말해 놓고 재미있는 농담을 했다는 듯 배를 잡고 깔깔 웃었다.
루드거는 그 모습에 대꾸조차 하지 않고 그녀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어? 커피는?”
“없다.”
사실은 있다. 세디나로부터 원두를 조금 받아 왔으니까.
하지만 곧 죽어도 눈앞의 이 악마에게는 그 귀중한 커피를 내주고 싶지 않았다.
“에이. 뭐야. 재미없어라.”
“그래서 여기까지 나를 따로 찾아온 이유는 뭐지? 단순히 재미 삼아 온 것은 아닐 텐데.”
“뭐, 목적이야 많지. 제로 오더 녀석이 관심을 갖고 있는 세오른이 어떤 곳인지도 알아보고, 내가 차지하게 된 빈자리의 전 주인이 누구인지도 보고 싶었고.”
“셀리나를 보러 간 건가?”
“직접 마주하지는 않았어. 그냥 멀리서만 살짝 지켜본 것뿐. 사실 에스메랄다 시절에도 본 적은 있어서 환영으로 살짝 흉내를 냈지만, 대면한 적은 없었거든.”
직접 셀리나와 접촉하지 않았다는 말은 놀랍게도 거짓이 아니었다.
물론, 헬리아 본인은 딱히 큰 관심이 없어서 셀리나에게 다가가지 않았다고 말했지만.
‘그럴 리가 없잖아.’
셀리나는 헬리아가 보기에도 퍽 신기한 존재였다.
원래 육신의 주인은 에스메랄다였다.
하지만 그녀는 사라졌고, 당연히 영혼을 잃은 육신은 그대로 생명 활동이 멈춰야 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녀는 살아 있었다.
에스메랄다가 아닌, 셀리나라는 존재로서.
‘신기해서 구경하려고 다가가 볼까 생각도 했지만. 「그런 것」이 옆에 붙어 있다면, 아무리 나라도 다가가기 꺼림칙하단 말이지.’
에스메랄다의 곁에도 비슷한 녀석은 있었다.
불의 정령 「콰지모도」라고 했던가.
‘그렇게 뒤틀린 것을 정령이라 불러도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콰지모도는 꽤 강력한 존재였다. 괜히 그 힘으로 퍼스트 오더의 자리에 올라간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콰지모도조차 헬리아에게 위협을 가할 정도는 아니었다.
반면 셀리나에게 붙어 있는 그것은, 오랜 세월을 지내 온 악마인 헬리아조차도 본능적인 거리낌을 느낄 정도.
‘뒤틀려서 정령인 척을 하는 콰지모도보다 더 정령 같지 않은 정령이라니. 하지만 녀석이야말로 진짜에 가깝겠지. 그러니 피하는 게 나아. 함부로 다가갔다가는 괜히 피만 보지.’
그 사실을 굳이 루드거에게 설명해 줄 필요는 없었다.
“그것 말고도 나를 찾아온 걸 보면 따로 전할 말이라도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래, 맞아. 그렇지 않았다면 애초에 주위에 장막을 치지 않았겠지. 혹시라도 우리 둘의 대화가 바깥으로 흘러가면 곤란해지잖아?”
“대충 무엇 때문에 찾아왔는지는 알겠군. 오더 시노드 때문인가?”
“뭐야. 너무 쉽게 맞추잖아?”
헬리아는 팔짱을 끼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조금은 더 몰라 줬으면 했는데.”
“애초에 제로 오더가 곧 오더 시노드가 있을 거라고 말해 주지 않았나.”
“그래. 그래서 불만이야. 이런 귀중한 정보를 멋대로 풀어 버리다니 말이야.”
“제로 오더는 오더 시노드를 유일하게 개최할 수 있는 존재다. 그렇게 따진다 한들 소용없어.”
“마치 제로 오더에게 충성하는 사람처럼 말하네. 내 앞에서는 그 [존 도우]라는 녀석처럼 행동하지 않아도 돼.”
헬리아가 상반신을 앞으로 숙여 한 손으로 자신의 턱을 괴었다.
의도한 건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자신의 육감적인 몸매를 은근하게 자랑하듯 드러내면서 헬리아가 장난스럽게 물었다.
“아니면, 아직 나를 경계하는 거려나?”
“악마를 경계하는 것은 사람으로서 당연한 반응이지.”
“하하하! ‘사람으로서’라니. 생각해 보면 맞는 말이야. 내가 그런 취급 받는 것도 새삼 놀라울 것도 없어. 그래도 궁금하지 않아?”
“뭐가 궁금하다는 거지.”
“제로 오더 말이야. 그 녀석과 내가 어쩌다 알게 됐는지.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라던가?”
“…….”
확실히 궁금한 내용이다.
그것도 헬리아가 지금까지 보여줬던 모든 행동 중에서 아주 매혹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하지만 루드거는 섣불리 듣고 싶다고 말하지 않았다.
이것이 일부러 이쪽의 속마음을 떠보려는 것일 수도 있거니와, 헬리아가 말해 주는 것이 전부 진실이리라는 보장도 없다.
애초에 둘은 같은 악마가 아닌가.
그들은 서로 다른 악마에 동료애 따윈 없다고 하지만, 적어도 인간의 관점에서는 그렇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일단은 서로 손을 잡은 사이니까.
“흐음. 역시 경계하는구나?”
“대놓고 그렇게 나오는데 경계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지.”
“아하하. 그것도 그러네. 그렇다면 모처럼 특별 서비스로 정보를 하나 줘 볼까?”
“뭐?”
또 무슨 장난을 칠 셈이냐고 묻기도 전에 헬리아가 정보를 읊었다.
“그거 알아? 제로 오더 녀석은 아주 오래전, 루멘시스교단의 성녀와 싸웠어.”
“싸웠다? 크게 보면 이상할 것도 없는 일이군.”
“그렇지. 악마가 성녀와 싸운다는 것은 뻔한 일이니까. 하지만 제로 오더는 성녀에게 패배했어. 그것도 수차례나. 패배한 그는 계속 도망을 쳐야 했지.”
그 제로 오더가 싸움에서 패배한 것도 모자라 도망까지 쳤다고?
“성녀가 그만큼 강했던 건가?”
“그것도 맞지만, 사실 제로오더는 과거에 그렇게 강한 사도가 아니었거든.”
“지금 검은 여명회를 이끄는 자가 강한 사도가 아니었다니. 너희 악마들은 저마다 권능을 타고나지 않았나?”
루드거는 헬리아의 환영과 바사라의 정신파를 떠올렸다.
그 자체만으로 인류에게 치명적인 힘.
그것이 악마가 지닌 권능이었다.
“으음. 뭐라고 해야 할까. 녀석에게도 권능은 있어. 그건 우리 사도들에게 주어진, 일종의 특혜니까. 완전히 죽어 버린 바사라는 인간의 정신을 뒤흔들고, 나는 물리력을 지닌 환각을 펼칠 수 있지. 다른 녀석들도 마찬가지야. 이런 말이 안 되는 힘을 그냥 쉽게 다뤄 버린단 말이지.”
“자신의 힘이 말이 안 된다는 것은 제대로 자각하고 있었군.”
“그런데 제로 오더는, 그런 게 아니었어. 권능인데 권능이 아닌 느낌? 남들이 다 100부터 시작한다면, 녀석은 완전히 0부터 시작하는 느낌이었지.”
“그런데도 권능이라 부르나?”
“그렇겠지 아마? 「배울 수 있는 권능」이라는 것도 권능일 테니까.”
배울 수 있는 권능이라니.
실로 표현이 포괄적이고 명료하지 않다.
다른 악마라 해도 알고 있는 건 고작 둘뿐이지만, 바사라와 헬리아가 지닌 권능과 비교하면 확실히 이질적이다.
“그러다 보니 제로 오더 녀석은 유독 열심히 싸웠지. 그 대상이 성녀였고. 사실 성녀가 제로 오더를 제거하기 위해 부단히도 움직이고, 녀석은 패배 끝에 가까스로 도주한 거지만 말이야.”
“그 제로 오더가, 지금 성녀의 흔적을 찾고 있다는 것은 그런 이유인가?”
“그렇겠지 아마? 제로 오더는 저렇게 보여도 매우 음흉한 녀석이야.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지 않거든.”
“그건 봐서 알고 있다.”
“그런데 이미 전 성녀는 죽었잖아? 성녀라 해도 결국에는 인간이니까 늙을 수밖에. 제로 오더는 악마라서 계속 살아있고. 그런데 패배의 기억은 계속 남아 있을 수밖에 없지.”
“성녀에게 복수하기 위해, 그 후계자를 없애려고 한다는 건가?”
“아니면 루멘시스 교단을 욕보이기 위해, 성녀의 힘을 오히려 빼앗는다거나? 일단 내 추측은 그래.”
“추측이라니.”
“어쩔 수 없는걸. 그 음흉한 녀석은 나에게도 속내를 전혀 보여 주지 않으니까. 나라고 그런 것까지 전부 아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 보니 조금 열 받네? 내가 그렇게 신뢰도가 없는 걸까. 같은 사도끼리 말이야.”
자신의 머리카락 끝을 손가락으로 배배 꼬며 투덜거리는 헬리아.
당장 나한테 그 이야기를 다 까발린 시점에서 너의 신뢰도는 이미…….
루드거는 차마 그 말은 하지 못했다.
일단 이쪽은 정보를 받은 입장이니까.
실제로 헬리아가 준 정보는 꽤 고급 정보였다.
제로 오더가 과거에 성녀와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것을 전부 믿을 수 있냐는 차치하고서.
최소한 그가 지닌 권능에 대한 건 거짓이 아닌 것 같았으니까.
‘배울 수 있는 권능인가.’
배운다는 것은 참 포괄적이다.
저 앞에 ‘무엇을’이 없다는 점에서 더더욱.
검을 배우고자 한다면 배울 수 있을 것이며.
마법을 배우고자 한다면 배울 수 있을 것이다.
헬리아는 말했다. 제로 오더는 초기에 그렇게 강하지 않았다고.
배울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 숙달 속도가 생각보다 빠르진 않다는 것이리라.
하지만 그마저도 인간의 삶을 아득히 뛰어넘는 시간이 주어진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범인의 재능으로도 검을 500년 이상 수련하면 그 자체만으로 하나의 경지에 들 수 있다.
마법도 마찬가지다.
사람을 다루는 법, 간계를 꾸미는 법, 조직을 꾸리는 방법, 뒤에서 일을 벌이는 법, 세상에 혼란을 초래하는 법.
그 모든 것을 배움이라는 권능으로 치환하고, 그 기간을 최소 500년 이상으로 잡는다면.
제로 오더.
지금의 그는 오히려 어떤 악마보다도 가장 무시무시한 존재나 다름없다.
“뭐, 잡설은 여기까지만 하고. 이제 슬슬 회의하러 가야지?”
“그래. 그러도록 하지.”
“아. 참고로 내가 너를 따로 만났다는 것은 제로 오더에게도 비밀이야. 알겠지?”
소파에서 일어난 헬리아가 루드거를 향해 한쪽 눈을 찡긋 감아 보였다.
설마하니 정말로 독단 행동이었을 줄이야.
루드거는 알겠다며 손을 휘휘 저어 보였다.
그 태도에 기분이 상할 법도 한데 헬리아는 고양이 같은 미소를 지으며 그 자리에서 신기루처럼 증발했다.
그와 동시에 숙소 주위로 펼쳐졌던 결계도 사라졌다.
참 이상한 녀석이 다 있군,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며 루드거는 준비해 둔 반지를 손에 끼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가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는 예전에 한 번 찾아온 드림랜드의 표층세계에 있었다.
* * *
“이번에는 조금 늦었군.”
표증세계에 세워진 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오자 레슬리가 가장 먼저 한 말이었다.
이전에도 봤다시피 퍼스트 오더들은 전부 검은색 불덩어리 모습 그대로였다.
“바빴다.”
루드거는 짧게 대꾸하며 주어진 자리에 앉았다.
다른 퍼스트 오더는 전부 다 와 있었다.
평소와 다른 부분이라면, 가장 시끄럽게 떠들어야 할 사람이 유난히 조용하다는 점이었다.
‘니콜라이.’
그의 성격을 생각하면 지금 당장이라도 수도에서 벌어진 일들에 대해서 실컷 떠들었을 것이다.
그러지 않았다는 것은 그만큼 본인이 그런 이야기를 할 심기가 아니라는 것이겠지.
‘몰래 주도했던 일이 처참히 실패했으니 당연할 수밖에.’
그때 니콜라이가 루드거를 이글거리는 시선으로 주시했다.
수도에서 벌어진 일을 알고 있다면, 루드거가 자신의 계획을 방해했다는 것도 인지하고 있을 터.
“존 도우.”
딱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니콜라이가 입을 열었다.
“최근 꽤 재미난 일을 하던 것 같던데. 수도에서 벌어진 테러를 저지했다지?”
“그렇다만.”
“하. 그렇다만? 웃기네. 설마 너, 진심으로 세오른의 교사 일을 하고 있는 거냐?”
다른 퍼스트 오더들의 시선이 전부 루드거에게 쏠렸다.
Komentar
Posting Komenta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