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UA - 366화 신비의 땅에서 (2)
366화 신비의 땅에서 (2)
선두에 선 이는 사람들의 눈에 확 띄는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허리까지 흘러내리는 푸르스름한 빛이 섞인 은발.
도도한 발걸음과 당당한 태도, 푸른색의 드레스가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었다.
주변의 반응에 개의치 않고, 오로지 정면만 바라보며 걷는 그 모습은 고귀한 백조를 연상케 했다.
그런 여성의 좌우를 보필하듯 보좌관이 따라붙고, 그 뒤를 호위하며 기사들이 따라오고 있었다.
“와. 왕족인가 봐요. 옆에 기사도 있네요.”
“…….”
아르파가 천진난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법사들이 모이는 곳에 기사를 호위로 대동하는 것은 보통 왕족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
투숙객들이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루드거는 그런 아르파의 말을 받아 주는 대신, 자연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르파. 일어나라. 최대한 여기서 자연스럽게 벗어나야 한다.”
“네?”
아르파는 갑작스러운 루드거의 행동에 의아해하면서도 명령을 거부하지 않았다.
때마침 로비의 직원이 열쇠를 가지고 돌아왔다.
열쇠를 받아든 루드거는 아르파를 데리고서 빠르게 자리를 벗어났다.
최대한 저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해서.
“리더. 갑자기 왜 서두르시는 거예요?”
“조금 전 로비에 들어온 자들이 누구인지 알아보겠나?”
“음. 잠시만요.”
아르파는 조금 전 보았던 광경을 다시 떠올려 보았다.
일반인은 몇 초 전의 풍경도 일부를 제외하면 흐릿하게 기억하는 것이 전부.
하지만 아르파에게는 그 광경이 방금 찍은 사진처럼 생생했다.
“아. 신문에서 본 얼굴이 있었어요. 가장 선두에 있던 사람이 그 여왕이죠?”
“예카테리나 볼스바야.”
“맞아요. 그런 이름이었어요.”
아르파는 그 이름을 들어 봤다는 듯 손뼉을 짝 하고 쳤다.
“유명인이잖아요! 그 유타의 여왕이니까요!”
유타 왕국의 여왕.
그 말에 아르파는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그냥 여왕도 아니다. 북부 유타왕국의 내전을 승리로 이끈 주역. 한때는 왕녀였지만, 폭정 알렉세이 왕자를 몰아낸 구세주. 본국의 사람들에게는 횃불여왕, 혹은 차리차(Tsaritsa)로 불리는 사람이다.”
루드거의 입에서 술술 나오는 정보에 아르파가 감탄했다.
“와. 리더는 그걸 어떻게 다 아시는 건가요?”
“내가 어떻게 알 것 같나?”
“아. 그러고 보니 리더는 제국에 오기 전까지 용병으로 내전에 뛰어들었다고 하셨죠.”
“뛰어든 게 아니다. 휩쓸린 거지.”
“음. 리더가 내전을 승리로 이끈 주역 중 하나라는 것은 저도 들어서 아는데. 그래도 왜 자리를 벗어나려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아요.”
루드거는 너무나도 당연한 질문을 하는 아르파를 질책하지 않았다.
대신 그 이유를 말해 줄 뿐.
“유타 왕국에서 벗어나기 위해 죽은 척을 했다. 저쪽은 내가 철석같이 죽은 줄 알고 있지. 그런데 내가 살아 있다는 걸 들킨다면 어떻게 되겠나.”
“음…….”
일반 상식이 부족한 아르파는 답을 쉽게 내놓지 못했다.
한참을 고민한 끝에 아르파가 답했다.
“화를 내겠죠?”
“……충분한 심사숙고 끝에 훌륭한 답을 내놓았구나. 그래. 화를 내겠지. 그리고?”
“그리고…… 엄청나게 화를 내겠죠?”
“화내는 것 말고는 없는 거냐.”
“으음. 잘 모르겠어요. 화를 내지만, 그래도 반가움이 더 크지 않을까요? 그야 그럴 것이 리더는 사실상 내전을 승리로 이끈 주역 중 하나잖아요.”
“그랬지. 하지만 나에게는 해야 할 일이 있었고, 나는 유타 왕국을 떠나야 했다. 반대로 저쪽 사람들은 나를 보내 주고 싶어 하지 않았지.”
“왜죠?”
“내가 승리의 주역 중 하나였으니까. 한 명뿐이라도 국가에 그런 사람이 있고 없고의 차이는 크다. 특히나 내전으로 인해 상처가 깊어진 나라일수록 더욱.”
“아. 그랬군요.”
아르파는 이런 부분까지는 알지 못했기에 순수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고 내가 저들에게 떠나겠다고 말을 할 수도 없는 노릇. 그래서 죽은 척을 했다. 그것이 서로에게 깔끔한 이별 방법이었으니까.”
“그렇다면 지금 다시 마주쳐도 상관없는 일 아닌가요? 어차피 리더는 변장해서 정체를 숨기고 있었잖아요.”
“그때는 그랬지. 하지만 아르파. 세상일은 모르는 법이다. 이 자리에서 과거의 인연을 우연히 마주치게 된 것처럼, 우연히 정체가 탄로 나게 되는 경우도 있지. 그렇게 되면 절대 좋은 일은 벌어지지 않겠지.”
“으음. 어렵네요.”
“아르파. 더 많은 사람과 만나고 경험을 쌓다 보면 너도 이해하게 되는 날이 올 거다. 사람마다 의견이 다르고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거든.”
“그래도 서로 의견의 차이가 있어도, 대화로 열심히 풀어 나가면 좋을 거 같아요.”
루드거는 아르파의 말에 눈을 크게 떴다.
아르파가 하는 말은 그야말로 순수하기에 할 수 있는 이상적인 소리였다.
의견의 차이를 대화로 풀어 나간다니.
그게 쉬운 일이었다면 인류는 지금까지도 무기를 들고 계속 싸우지 않았을 것이다.
노동자와 공장주, 귀족과 평민, 부유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
계층은 확고했고, 그들은 서로를 이해하려 들지 않았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아르파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온 것이다.
전쟁을 위한 도구로 만들어진 오토마톤이.
그것은 오토마톤의 의견일까.
아니면 저 몸에 깃든, 그 아이의 영혼이 내놓은 의견일까.
“……그래. 언젠가 서로를 완전히 이해할 날이 오면 좋겠구나.”
다만, 하고 루드거가 말을 이었다.
“내가 예카테리나 여왕을 마주치지 않으려는 것은, 지금 처한 상황도 있지만 다른 이유도 하나 있어서다.”
“그게 뭔데요?”
“그녀는 성격이 이상하다.”
“성격이요?”
“그것도 여간 이상한 게 아니라서 말이다. 같이 있으면 매우 피곤해지거든.”
루드거는 그때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아파 왔다.
* * *
랜드리버 호텔의 최상층.
VIP룸에 들어온 예카테리나는 창가에 서서 그 너머의 풍경을 응시했다.
투명한 유리 너머로 도시의 전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도시를 살펴보는 예카테리나의 모습은 그 자체만으로 한 폭의 그림과도 같았다.
굳게 다물어진 입술과 속을 알 수 없는 눈동자.
그 모습으로 가만히 서 있으면 그녀가 어째서 ‘서리여왕’이라 불리는지 납득하고 만다.
차갑고, 고고하며 아름답다.
그녀를 향한 별명은 순수한 경의(敬意)로 가득한 상찬의 말이었다.
이윽고 예카테리나의 입술이 벌어지며, 그녀의 청아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오호호호홋─!!!”
오른 손등을 자신의 입가에 대고, 왼손은 허리에 척 얹으며 힘껏 외치는 웃음소리.
그 무뚝뚝해 보이고 서리여왕이라는 별명을 지닌 사람의 웃음소리가 맞나 싶을 정도로, 그녀의 웃음은 차원이 다른 경박함을 뽐냈다.
“다들 들으셨나요? 사람들이 저를 칭찬하는 그 말을! 듣기만 해도 정말 기분이 좋아지네요!”
예카테리나는 호텔 로비에 들어왔을 때부터 사람들이 자신에게 보인 관심을 떠올리며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런 예카테리나의 두 보좌관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
“여왕님. 제발 입 좀 다물어 주십시오. 누가 볼까 봐 걱정입니다.”
“여왕님. 오늘도 정말 아름답고 고아한 웃음이십니다. 실로 어울리시는군요.”
두 보좌관은 그렇게 동시에 말하고는 서로를 찌릿 노려보았다.
예카테리나를 질책하는 쪽은 남자인 바탈리.
예카테리나를 찬양하는 쪽은 여자인 바렌치나.
보좌관은 놀랍게도 서로 닮아 있었다.
아닌 것이 아니라, 두 사람은 쌍둥이 남매였다.
“바렌치나. 그게 무슨 헛소리냐. 아무리 여왕님이라 하더라도 체통은 지켜야 하는 것을. 네가 그런 식으로 하니까 여왕님이 저러시는 거 아니냐.”
“바탈리. 너야말로 그게 무슨 헛소리지. 여왕님은 그 자체만으로 모두의 귀감이 되시는 분. 그 진실된 모습으로 만백성을 귀화시킬 분이시다.”
두 남매는 단순히 말로만 싸우지 않았다.
대화를 나누면서도 서로를 향해 손을 날렸고, 그것을 방어하며 반격을 날렸다.
파바바밧!
단순한 손동작 같지만, 그것이 기사급 신체 스펙이 벌이는 짓이라면 그 자체만으로 흉수(兇手)가 된다.
결국, 먼저 포기한 것은 바탈리 쪽이었다.
“후우. 여왕님의 본 모습이 사실 저렇다는 소문이 퍼지게 된다면, 국가적인 망신이야.”
“그걸 감추는 것이 우리의 임무지. 나는 마음 같아서는 모두가 여왕님의 저 모습을 보길 바라지만.”
“그런 악몽에서 나올 법한 말은 하지 말아 줄래?”
바탈리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예카테리나를 향한 충성심은 누구에게도 밀리지 않았다.
“자! 두 분도 어서 푹 쉬도록 하여요!”
예카테리나는 정작 그런 보좌관들의 고생도 모르는지 오호호 웃으며 두 사람에게 휴식을 권했다.
“저희는 괜찮습니다. 여왕님께서 푹 쉬시길.”
“저야 여기까지 오면서 누구보다도 편하게 왔는데, 더 쉴 게 뭐가 있겠어요? 자자. 그러지 마시고 푹 쉬세요! 이건 명령이에요.”
명령이라고 단호하게 말하는 예카테리나의 모습에 바탈리와 바렌치나 남매는 결국 소파에 궁둥이를 붙일 수밖에 없었다.
“모처럼의 여행이니, 따분한 집무는 다 놓고 피로부터 풀도록 하죠.”
예카테리나의 그런 속 편한 말에 바탈리가 곧바로 입을 열었다.
“여왕님. 죄송하지만 저희는 지금 놀러 온 것이 아닙니다. 「신비의 밤」에 참석해서 마법사들과 친분을 쌓아서 좋은 관계를 만들기 위해 온 것이 아닙니까.”
“물론 마법사 친구를 사귀는 것도 필요하죠. 하지만 신비의 밤은 내일 열리잖아요? 그러니 오늘은 굳이 그런 일을 신경 쓸 필요가 없지요.”
“바꿔 말하면 지금 이 호텔에도 많은 유명 인사들이 모여 있습니다. 그들도 여왕님과 뵙기를 간절히 바라는 모양이니, 오히려 지금이 적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흐음. 이 혐오감 드는 오빠의 말은 동의하고 싶지 않지만,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저 또한 극히 인정하는 바입니다.”
바렌치나까지 가세하자 예카테리나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뭔가요 정말.”
“여왕님의 심정은 이해하지만, 입장이 바뀌었습니다. 이제 당신은 공주님이 아닌 한 나라를 이끌어야 하는 여왕입니다. 당연히 그에 걸맞은, 본인이 하기 싫었던 일이라 하더라도 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거지요.”
“그 남자가 했던 말처럼요?”
“…….”
그 남자라는 말에 바탈리가 입을 다물었다.
예카테리나가 지칭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모를 리가 없었다.
그야 그럴 것이, 그 남자는 내전에서 함께 목숨을 걸고 적들과 싸운 전우였으니까.
이제는 만날 수 없는.
그렇기에 누구보다도 기억에 남은 사람.
“예. 그렇다면 이야기가 더 편해지겠군요. 그 또한 비슷한 말을 했으니까요.”
“군주는 여러 덕목을 갖추지 않더라도 갖춘 척을 해야 한다. 실제로 갖춘 것보다도, 그런 척을 하는 것이 훨씬 더 이롭다.”
예카테리나의 입에서 과거 마키아벨리가 했던 말이 술술 나오자 바탈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하고 계시군요.”
“그거 말고도 제게 잔소리처럼 했던 말은 전부 기억하고 있죠.”
“전부 말입니까?”
“어찌 잊겠어요. 일개 용병이라 하지만, 저희 왕국을 위해 헌신해 준 사람인데.”
마키아벨리를 떠올리는 예카테리나의 얼굴에는 미약하지만 수심이 깃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 나약함을 금방 털어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좋아요! 그렇다면 곧바로 새로운 친구들을 만나러 가 볼까요!”
“여왕님. 의지가 넘치시는 것은 좋지만, 친구를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국가 단위의 비즈니스적인 만남일 뿐이죠.”
“이 멍청한 오빠야. 여왕님께서 하신다는 것이 중요하지, 지금 그게 문제야? 여왕님! 저도 따라가겠습니다!”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예카테리나는 두 호위를 이끌고 VIP룸을 나섰다.
복도에서 대기 중이던 호위기사가 따라붙으려 했지만, 바렌치나가 가볍게 제지했다.
신분 증명이 된 사람만이 머무를 수 있는 호텔 내부에서, 딱히 우려하는 문제는 벌어지지 않을 테니까.
“여왕님. 일단 1층으로 내려가시겠습니까?”
“네? 왜 1층으로 가나요?”
“그야 사람을 만나려면 많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가셔야죠.”
“가까운 곳에도 있잖아요?”
예카테리나는 대수롭지 않게 말하더니, 같은 층에 머무는 다른 VIP룸의 문을 두드렸다.
너무 상식 밖의 행동이라 두 남매가 말릴 틈도 없었다.
“누구세요?”
문이 빼꼼 열리더니 한 소년이 얼굴을 드러냈다.
어딘가 화려한 이목구비를 지닌 소년의 모습에 예카테리나가 밝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만나서 반가워요. 저는 예카테리나 볼스바야라고 한답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아르파예요.”
아르파는 순진무구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그보다 무슨 일로 찾아오신 건가요?”
“아, 혹시 동행자나 다른 분은 안 계신 건가요? 그분과 대화를 나누고 싶은데.”
“아, 있어요. 어, 그런데…….”
아르파는 뒤늦게 루드거가 했던 말을 떠올리고는 말끝을 흐렸다.
예카테리나가 그런 아르파의 묘한 낌새에 의아해할 때, 반만 열린 문의 틈새로 새로운 사람이 불쑥 나타났다.
“죄송하지만, 외부인은 사절입니다.”
“어? 자, 잠시만요!”
얼핏 보였던 흑발의 미청년은 더는 듣고 싶지 않다는 듯 문을 쿵 닫아 버렸다.
예카테리나는 자리에 못 박힌 듯 가만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여왕님! 괜찮으십니까?!”
“세상에. 너무 충격을 받으셨나 봐! 여왕님. 괘념치 마십시오. 마법사들이 으레 사회와 담을 쌓아서, 여왕님을 몰라보는 걸 수도 있습니다.”
보좌관 남매가 어찌할 줄 몰라 할 때, 예카테리나가 손을 입가에 가져다 대며 감탄사를 흘렸다.
“어머머. 어머머. 저 사람…….”
“여왕님. 설마, 아는 사람입니까? 그렇다면…….”
“어쩜 저렇게 잘생긴 사람이 있을 수가!”
“…….”
“…….”
예카테리나의 뜬금없는 말에 두 보좌관은 벙찐 얼굴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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