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UA - 367화 횃불의 전야
367화 횃불의 전야
문밖의 자그마한 소란에 루드거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예나 지금이나 성격은 그대로로군. 저 뻔뻔할 정도로 멍청한 행동은 변하질 않았어.’
“리더. 죄송해요.”
아르파는 문을 닫아 버린 루드거를 보며 침울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루드거는 고개를 저었다.
“되었다.”
“제가 가장 조심해야 할 사람에게 문을 열어 줘 버린 거잖아요.”
“저쪽이 이렇게 당당하게 다가오리라 예상하지 못했는데, 누구의 잘못이 있겠나.”
루드거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아르파는 여전히 죄송함을 억누르지 못했다.
“그래도, 방금 대화를 나누면서 정체를 들켰을지도 모르잖아요.”
“그럴 일은 없을 거다. 반응을 들어 보니, 수상함을 눈치챈 것 같지는 않으니까.”
아르파는 청력을 집중해 문 너머의 소리를 엿들었다.
루드거의 말대로, 예카테리나 여왕은 루드거가 잘생겼다느니 감탄만 할 뿐, 정체를 알아차린 것 같지는 않았다.
“그보다, 저분은 원래 저런 성격인가요?”
분명 처음 호텔 로비로 들어올 때의 예카테리나는 저런 이미지가 아니었다.
무표정한 얼굴에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던 사람이다.
첫인상은 말 그대로 북부의 차가운 빙하를 보는 것 같았다.
고고하고, 차갑고.
유타 왕국의 지도자이자 서리여왕이라는 별명이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바깥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를 들으면, 실제 성격은 로비에서 보여 준 것과 정반대였다.
“예전에는 더 심했다.”
“더, 심했다고요?”
“그때는 지금처럼 고고한 척조차 하지 않았으니까.”
“예카테리나 여왕은 그러면 어떤 사람인가요?”
아르파가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묻자 루드거는 흠 하고 손끝으로 턱을 쓸었다.
예카테리나 볼스바야.
처음 그녀를 봤을 때 루드거가 품은 첫인상은 간단했다.
이 사람. 유타 왕국이 아니라 두르망 왕국 출신이었으면 단두대에 목이 잘려 나갔을 것이다.
웃음소리부터 전형적인 나쁜 영애 같다고 해야 할까.
아름다운 보석에 환장하고 사치를 부리는, 딱 그런 사람이었다.
물론 몇 번 대화하면서 실제 성격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걸 알게 됐지만 말이다.
다만, 그걸 감안해도 예카테리나를 향한 루드거의 평가는 썩 좋지 않았다.
“아둔하고 멍청했지. 지도자로서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네? 그런 사람이 어떻게 내전을 승리로 이끈 건가요?”
“본인의 주위에 훌륭한 사람들이 많았으니까. 그녀는 그런 사람이다. 뛰어난 사람을 모으는 기묘한 힘이 있지. 알렉세이 왕자가 그 유리한 상황에서도 이를 악물고 그녀를 찾아다녔던 건, 그런 부분을 걱정해서였던 걸지도 모르겠어.”
“훌륭한 사람이라면, 리더를 포함해서요?”
“그럴 리가. 나는 별로 한 것이 없다.”
내전을 승리로 이끈 용병이 별로 한 것이 없다니?
아르파는 그 말이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그냥 그러려니 하기로 했다.
한스 씨가 귀에 녹이 슬도록 말해 줬다.
리더는 자신의 업적을 너무 폄하하는 버릇이 있으니, 그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굳이 트집을 잡지 말라고.
아르파는 상식이 부족할 뿐, 가르침은 금방 실천하는 편이라 한스의 말대로 행동했다.
“그래도 뭔가 의외네요.”
“뭐가 말이지?”
“리더라면 오히려 저런 사람은 선택하지 않았을 것 같았어요.”
저런 사람이라니.
한 나라의 여왕에게 하는 말치고는 지독히도 가차 없는 평가였다.
하지만 순수한 시선으로 사람을 바라보기에 저렇게 말을 할 수도 있었다.
실제로 아르파의 말마따나 루드거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까.
“예카테리나 여왕을 선택하셨을 정도라면 왕자 쪽은 훨씬 더 심각했던 건가요?”
“굳이 따지자면, 겉보기로는 알렉세이 왕자가 훨씬 더 나은 사람이었지. 예카테리나와 반대되는 사람이었으니까.”
항상 이상한 웃음을 흘리고 철부지처럼 행동하는 예카테리나 왕녀와 달리, 알렉세이 왕자는 차분하고 지적이며 달변가였다.
사회적으로도 명망이 있었으며 대외적인 활동을 꾸준히 하며 여러 사람에게 착한 이미지를 각인시켰다.
“어. 그렇다면 오히려 왕자 쪽이 더 나았던 거 아니었나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
“그런데 리더는 반대의 선택지를 고르셨네요. 그 이유가 있나요?”
“아르파. 세간의 평가라는 것은 그렇게 쉽게 내릴 수 없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가면을 쓰니까.”
“가면이요?”
“알렉세이 왕자는 겉으로는 선량한 사람처럼 보였지만, 그 내면에는 타인을 이해하거나 공감하지 못하는 사이코패스적인 면모가 강했다.”
그가 세간에 보여 주는 이미지는 전부 만들어진 것.
실제 알렉세이 왕자는 잔혹한 성격이었다.
필요하다면 선량한 시민들을 죽이는 걸 망설이지 않으며, 자신을 믿고 따르는 부하들은 도구로만 취급했다.
유타 왕국에서 내전이 벌어졌을 때, 민간인의 피해가 가장 컸던 이유는 왕자 파벌의 무분별한 강제 징용.
그리고 그것을 따르지 않은 사람들을 본보기로 숙청했기 때문이다.
“반대로 예카테리나 왕녀, 아니 지금은 여왕이로군. 그녀는 겉보기에는 전형적인 거만한 귀족이었지만, 그 속에는 누구보다도 남을 아끼는 따스한 마음을 지니고 있었지.”
루드거의 말에 아르파는 조금 전 예카테리나가 보좌관들과 나누던 대화를 떠올렸다.
보좌관을 대하는 예카테리나의 태도는 상하로 구성된 위계질서와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오히려 친근한 가족, 혹은 친구를 대하는 태도에 가깝지.
확실히 일국의 여왕이 보여 주는 행실로는 어울리지 않지만.
그렇기에 뭔가 동화에서나 볼 법한 이상적인 존재처럼 느껴졌다.
“그렇기에 나는 그 차가운 땅에서 그녀의 손을 들어주기로 한 것이다. 그녀는 마치 불꽃과도 같았거든.”
“불꽃이요? 어떻게 사람이 불꽃이 될 수 있죠?”
“……비유적인 의미다.”
혹독한 추위로 가득한 환경 속에서, 예카테리나의 존재는 강렬한 횃불과도 같았다.
사람들은 그 불길에 홀린 듯 이끌렸다.
한 치 앞도 내다보기 힘든 눈보라 속에서, 주홍색 불길의 존재는 선명했으니까.
훌륭한 인재들이 그녀의 곁에 모이는 것은, 어쩌면 필연의 흐름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내전 초기에는 알렉세이 왕자가 유리했다고 들었어요.”
“실제로도 그랬다. 내전이 벌어지기 전까지 세간의 평가는 알렉세이 왕자에 치중되어 있었으니까. 사실 그마저도 알렉세이 왕자가 사전에 물밑 작업을 통해 만들어 낸 상황이었고. 그는 처음부터 내전을 상정하고 움직이고 있었어.”
유타 왕국 내전이 발발했을 때, 호사가들은 입을 모아서 떠들고는 했다.
이 싸움은 무조건 알렉세이 왕자가 이길 거라고.
그러니 향후 유타 왕국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알렉세이 왕자에게 줄을 대야 한다고.
기업들, 유력 귀족들, 군부의 장성들.
모두가 그렇게 생각을 했다.
실제로 상황은 그런 결말을 향해 흘러가려 했고.
“그러나 승리는 결국 왕녀의 것이었다. 북부를 집어삼키려던 왕자의 차가운 야망은 뜨거운 불꽃에 녹아 사라졌지.”
내전의 막바지, 유타 왕국의 깃발을 들고 최전선에서 싸우던 예카테리나는 매우 유명한 일화 중 하나였다.
그때 종군 기자에게 우연히 찍힌 흑백 사진은 예카테리나라는 사람에 대한 인식을 크게 뒤바꾸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신문의 1면에 사진이 도배되다시피 했으며, 유타 왕국의 내전에 겁에 질린 시민들이 용기를 내서 왕녀를 지지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유타 왕국의 내전, [서리와 횃불의 전쟁]은 예카테리나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결국, 정의가 승리한 것이네요.”
“그래. 올바른 것이 승리했지.”
루드거는 마치 남 일처럼 말했다.
하지만 루드거는 그날의 일을 추억처럼 되새겼다.
그 치열한 전장의 나날을 추억이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한 나라의 운명을 바꾸는 만남은 분명 기억에 남길 만했으니까.
─당신이 그 용병이죠?
장총을 품에 안은 채 가만히 불을 쐬고 있던 루드거에게 다가왔던 예카테리나.
─저는 예카테리나 볼스바야라고 해요. 사람들이 말하길, 폭정과 사치의 왕녀라고 하죠.
도망자의 신세이면서 자신의 정체를 감출 생각도 하지 않는다.
예카테리나는 당당하고 올곧은 눈동자로 루드거를 바라봤다.
─당신의 힘이 필요해요.
루드거는 예카테리나의 태도에 어처구니가 없었다.
도망자 신세에, 따르는 세력도 거의 없다시피 하면서 무슨 낯짝으로 힘을 빌려달라고 하는가.
애초에 그는 진짜 용병도 아니었다.
유타 왕국에서 렐릭의 파편을 찾고자, 활동하기 편한 신분으로 위장을 했을 뿐이다.
그에겐 용병으로서 예카테리나의 편에 서서 싸울 의무 따윈 없었다.
오히려 진짜 용병이었다면, 차라리 여기서 예카테리나를 팔아 알렉세이에게 넘기는 것이 나았지.
대꾸할 가치도 없는 말이었고, 당연히 무시하는 것이 옳았다.
하지만 루드거는 자기도 모르게 물었다.
─나는 용병이다. 의뢰를 요청하고 싶다면 대금을 지불해. 그렇게 하면 의뢰를 받아 줄 수도 있다.
─없어요. 지금의 저에겐 돈이 한 푼도 없답니다.
루드거는 그 말에 벙찐 얼굴이 되고 말았다.
─뻔뻔하군. 그런데도 도와달라고? 오히려 여기서 내가 그쪽을 왕자에게 넘기면 더 많은 돈을 받을 수 있을 텐데.
─그러실 건가요?
─못할 것도 없지. 그래도 후회하지 않나?
─오호호! 그렇다면 제가 보는 눈이 없던 거겠네요!
용감한 건지 멍청한 건지.
예카테리나는 왕족의 앞에서도 경의를 표하지 않는 용병에게 어떠한 질책도 하지 않았다.
단지 유쾌하게 웃어넘겼을 뿐.
─하지만 후회는 없어요!
─왜지?
─이 모든 것은 제가 선택한 일이니까요. 잘못된다면 책임 또한 온전히 저의 것. 실패하면 안타깝지만, 그러니까 실패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하지 않겠어요?
─…….
─그러니 저는 이 길을 그대로 밀고 나갈 뿐이랍니다.
그렇게 선언하는 예카테리나에게는 왕족으로서의 면모는 눈곱만큼도 보이지 않았다.
굳이 따지자면 이상과 꿈에 젖어 있는 몽상가다.
‘그래. 전혀 왕족 같지 않았지.’
만에 하나라도, 이런 사람이 내전에서 승리를 쟁취하면 유타 왕국의 여왕이 될 것이다.
위엄도 없고, 누군가의 위에 군림하지 않는 왕이라니.
그런 사람이 이끄는 나라가 제대로 될 리가 있나.
하지만.
그것이 실존한다면, 분명 동화에나 나올 법한 따뜻한 나라겠지.
─예카테리나 왕녀라고 했지.
─예. 맞아요.
─왕이 되기 위해서는, 그쪽은 먼저 군주론부터 배워야 할 필요가 있겠어.
─네? 그게 무슨…….
─의뢰를 받아들이겠다는 소리다.
루드거는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작게 타오르는 모닥불을 중심에 두고, 예카테리나가 루드거와 눈을 마주하며 물었다.
─갑자기 마음이 바뀌시기라도 한 건가요?
─왜. 싫나?
─싫지는 않답니다. 뛰어난 인재가 도와준다면 저로서는 환영할 일. 다만, 태도가 바뀌었기에 혹시라도 이유가 있을까 싶어서 물어본 거예요.
─보고 싶어졌거든. 그쪽이 왕이 된다면 만들게 될 나라가.
피식 웃으며 말하는 루드거의 모습에 예카테리나 또한 미소로 응수했다.
─그래서, 그쪽의 이름은 뭐죠?
그 말에 루드거의 표정을 구겼다.
─내 이름도 모르면서 용병 의뢰를 부탁했다고?
─이름이 중요한가요? 능력이 중요하지.
─틀린 말은 아니다만…….
─하지만 이제 함께 싸우게 될 사이인데, 이름 정도는 들어 둘 필요가 있어 보여서요. 예의 그 군주론이라는 것도 궁금하고요.
─마키아벨리.
루드거는 장총을 챙겨 들고 눈보라가 몰아치는 오두막 바깥으로 향했다.
─마키아벨리라 불러라.
두 사람의 만남.
그것은 한 나라의 운명을 뒤바꾸는 분기점이 되었다.
* * *
그날을 떠올린 루드거는 흘러나오는 실소를 참을 수 없었다.
‘훌륭한 군주가 되라고 열심히 잔소리했건만, 예나 지금이나 전혀 변하지 않았군.’
하지만 변하지 않았기에 그녀답다.
오히려 변했더라면 실망했으리라.
자신이 떠난 뒤에도 잘 지내는 것 같아서 마음이 놓였다.
저 쌍둥이 남매 보좌관은 사이가 안 좋은 건 여전한 것 같고.
‘작별 인사라도 제대로 해 둘 걸 그랬나.’
물론 그런 생각을 하기엔 이미 늦었다.
루드거는 전투 중에 죽은 척하며 신분을 바꾸고 도망쳤다.
이쪽이 살아 있다는 소식을 접한다면, 저들은 기뻐하기보다는 오히려 배신감과 당혹감을 느낄 것이다.
그럴 바에는 그냥 서로 없는 사이처럼 지내는 것이 가장 나았다.
“이만 자도록 하지. 내일은 일찍 움직여야 하니까.”
루드거는 그렇게 말하며 소파에 누운 채로 눈을 감았다.
곧바로 루드거의 호흡이 고르게 변하며 순식간에 잠에 빠졌다.
아르파는 그런 이야기를 떠올렸다.
숙련된 사람은 5초 안에 잠이 들며, 2시간만 숙면을 해도 컨디션이 최고를 유지할 수 있다고 말이다.
‘그런데 보통 그런 건 기사 정도 되는 사람들만 가능하다 들었는데.’
아르파는 또다시 호기심이 일었지만, 대답해 줄 수 있는 루드거는 숙면 중이었다.
아르파는 아쉬움을 뒤로하며 침대에 누웠다.
내일이 바로 「신비의 밤」 당일이었다.
Komentar
Posting Komenta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