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UA - 379화 폐쇄된 문 (1)

 ◈ 379화 폐쇄된 문 (1)




‘이건 꽤 흥미로운 내용이군.’




엘프와 손을 잡고 세계수를 키웠다.




루드거는 악마 바사라가 봉인되어 있던, 죽어 버린 세계수의 밑동을 떠올렸다.




[우리는 루멘시스 교단에 저항하기 위해서 그림자 속에서 칼을 갈았다. 신의 눈이 닿지 않는 깊고 어두운 곳에서, 확실하게 찌르기 위해서. 그러나 운명은 우리의 의지를 거부했다.]




[우리가 어둠에 숨어들자, 더 깊은 어둠 속에 숨어 있던 존재가 반응했다. 우리와 똑같이 신의 눈을 피해 숨어 있던 존재. 그것은 우리가 악마라 불렀던, 세상의 적이었다.]




악마 바사라.




루드거의 머릿속에서 상황이 그려졌다.




이 책의 저자를 포함해서 루멘시스 교단에 저항하고자 한 조직이 존재했다.




그 조직은 단순히 특정 사람들의 모임에서 그치지 않은 국가 단위의 규모를 지녔다.




지금의 엑실리온 제국이 들어서기 전 존재했던 전대 왕국.




그들은 지하에 거대한 시설을 만들었다.




일전 해방군이 차지한 곳이 바로 거기였으리라.




그리고 엘프들, 정확히는 당대 최고의 권력을 지닌 플란테 가문이 그들과 협력했다.




‘그리고 이어진 것은 바사라의 침공이었나.’




[악마는 루멘시스 교단을 증오했다. 우리 또한 그러했지만, 서로가 손을 잡는 일은 없었다. 악마에겐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모든 인류를 증오했으니까. 그렇게 우리는 싸웠다.]




[무수한 전사와 선택받은 자가 쓰러져 나갔다. 악마의 권능은 너무 강력했고, 그 앞에서 우리는 무력했다. 그러나 누구도 포기하는 사람 하나 없었다.]




[결사의 항쟁 끝에 악마는 세계수의 뿌리에 봉인되었다. 그러나 우리 중 누구도 그걸 승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겠지.




몰래 일을 처리해야 하는 입장에서, 갑자기 사고가 나 버린 것이다.




하물며 그 과정에서 정예 병력이 바사라에 의해서 쓸려 나갔을 테니.




이들이 입은 물질적인 손해만 놓고 봐도 조직을 유지하는 것이 힘들 지경이었으리라.




[더러운 루멘시스 교단이 냄새를 맡았다. 그들은 발 빠르게 움직였고, 왕을 파면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도망쳐야 했다. 나 또한 그러했다. 하지만 어디로 가도, 루멘시스 교단은 우리를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 이단심문관들은 사냥개처럼 집요했다. 대륙 어디에도 안전한 곳은 없었다.]




루드거는 페이지를 다음으로 넘겼다.




[이 기록을 남기는 와중에도, 놈들의 추적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오직 하나뿐이다. 그 누구도 돌아온 적이 없는 금기(禁忌)의 땅으로 가는 것이다. 때마침 오늘은 그 땅에 일어나는 신비의 힘이 약해지는 날이다. 지금이 아니면 기회는 없으리라.]




루멘시스 교단에 의해 쫓기던 자는 벼랑 끝에 몰렸기에 이 신비의 땅인 카사르 분지로 도망쳐 왔다.




루드거는 책의 페이지가 거의 다 됐음을 깨달았다.




루드거는 몇 장 남지 않은 책을 세심하게 읽었다.




[금기의 땅은 과연 그 이름에 걸맞게 위험한 곳이었다. 나와 함께 온 동포들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다. 그 끔찍한 추적 속에서도 살아남았던 동포들이, 금기의 땅에서 벌어지는 재해에 의해 힘없이 죽어 나갔다. 우리는 지쳐 갔다. 이대로라면, 기록조차 남기지 못하고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생겼다.]




팔락.




루드거는 쉬지 않고 페이지를 넘겼다.




[그 순간 우리는 보았다. 이곳에 어울리지 않는 저택을. 처음 보는 양식의 건축물. 그러나 분명 저것은 사람이 지은 것이 분명해 보였다. 우리는 저택으로 향했다. 그리고 만나게 됐다. 저택의 주인이라 불리는 자를.]




‘저택의 주인?’




루드거는 주인이라는 부분에 흥미를 품었다.




이 비밀의 저택은 누가 지었는지도 모를 불가사의 취급을 받고 있다.




‘그래. 분명 누군가는 이 저택을 지었을 테고, 당연히 주인도 있겠지. 이 책은 최소 500년 전에 있는 일일 테니, 당시 저택의 주인이 있어도 이상할 것은 없을 테고.’




그렇게 루드거는 마지막 남은 페이지를 확인했다.




[저택의 주인은 초로에 접어든 남자였다. 그는 이 넓은 저택에 혼자 살았으며, 우리를 환대해 주었다. 우리는 놀랐다. 그는 우리와 같은 선택받은 자였고, 그 이상으로 엄청난 학식과 실력, 은총을 받은 자였으니까.]




[하지만 더욱 놀라운 것은 그가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그것은 이미 죽어 없어진 자의 잔류된 사념이었다. 우리는 놀랐지만, 동시에 적의가 없음에 안도했다. 최소한 우리를 죽이려 들지는 않을 테니까.]




[저택에 지내면서 우리는 각오를 끝마쳤다. 우리는 더는 바깥으로 나가지 못한다. 그러니 우리는 이곳에서 살아야만 했다. 아마 늙어 죽을 때까지, 갇혀 지내는 삶이겠지. 하지만 후회는 없다. 진정으로 후회가 들었다면, 이 모든 기록과 물건들을 소실하는 것일 테니까.]




[저택의 주인으로부터 저택을 일임받은 우리는 준비를 갖췄다. 분명 언젠가 이곳에 들어오는 자들이 나타날 것이다. 선택받은 자들, 신비를 다루는 마법사들은 어느 시대에서나 존재할 테니까. 하지만 반대로 루멘시스 교단의 더러운 들개들도 올 수 있었다. 그것을 위해 우리는 안배를 해야 했다.]




[저택의 힘을 이용해 규칙을 만들고, 진을 설치하며 결계를 펼쳤다. 이 기록이 새겨진 서재에는 함부로 들어가지 못하게 조치를 취했다. 자격이 없는 자는 이 기록을 읽지도 못할 것이다.]




[떠나가기 전 준비는 마쳤지만, 그래도 아쉬움은 어쩔 수 없었다. 가장 중요한 유물은 7개의 조각으로 나뉘었으니까.]




‘유물의 조각?’




루드거의 눈이 크게 떠졌다.




[동포들이 각자 하나씩 들고 세계 곳곳으로 흩어졌지만, 과연 제대로 숨겼을지가 걱정이다. 어쩌면 그 간악한 교단에 빼앗겼을지도 모른다. 엘프들이 가져간 조각도 마음에 걸린다. 당시 그들도 악마와 싸우느라 전력에 큰 손실을 입었으니까.]




[하지만 이렇게 걱정해도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결국 운명은 우리의 손을 들어 주지 않았으니까. 남은 것은 후대에 맡길 뿐이다. 언젠가 우리와 같은 길을 걷게 될 누군가 이걸 읽고 있다면, 부디 알아주길 바란다.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우리의 의지는 아직 죽지 않았다는 걸.]




책은 거기서 끝났다.




루드거는 그럼에도 책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이루 말로 표현하기 힘든 감정이 휘몰아쳤다.




루드거는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안주머니에서 렐릭의 파편을 꺼내 살폈다.




일곱 개의 조각.




곳곳으로 흩어진 파편.




자유를 얻기 위한 수단.




파편을 움켜쥔 루드거는 이 기묘한 운명의 흐름에 기뻐해야 할지, 혹은 화를 내야 할지 갈피를 잡기 힘들었다.




‘세상일이라는 건, 참으로 재미있군.’




파편을 다시 주머니에 넣으며, 루드거는 책을 원래 자리에 꽂아 넣었다.




고작 한 권의 책이었지만, 이 책으로 인해 지금 벌어졌던 많은 일이 깔끔하게 정리가 됐다.




그리고 먼 과거에 벌어졌던 일이, 500년이라는 세월을 뛰어넘어 자신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는 것도.




‘단순한 우연은 아니지. 나는 루멘시스 교단의 가장 깊은 곳에서 태어났고, 내가 이렇게 조각을 모으는 것은 이들의 흔적을 발견했기 때문이니까.’




우연과 필연.




의지와 집념.




여러 요소가 한데 모였기에 여기까지 올 수 있는 것이었다.




루드거는 어째서 자신이 지금까지 신비의 밤에 오지 않았는가 후회가 들면서도, 지금이라도 이렇게 알아서 다행이라는 안도감을 동시에 느꼈다.




‘소득은 또 있다. 아직 미처 찾지 못한 파편의 행방. 그중 하나가 어디에 있는지 알게 됐으니까.’




기록에는 엘프들이 파편 중 하나를 가져갔다고 했다.




그렇다는 것은 그가 찾는 물건은 최소한 엘프 왕국에 있다는 말이었다.




‘차라리 황실의 비고에 하나 더 있었으면 나았을 것을.’




엘프의 왕국이라니.




제국보다 더하지 않은가.




먼 옛날이야 모르겠지만, 지금은 엘프 왕국은 인간은 절대 갈 수 없는 곳이 되었다.




하지만 엘프들과 교류하는 인간들은 있으며, 인간을 마냥 혐오하지 않는 엘프들도 있다.




적어도 숲까지는 갈 수 있으리라.




다만 그것도 숲의 경계선, 숲의 외곽에만 국한됐다.




엘프들이 사는 고향이자 세계수가 자라난 곳.




[르나르-티로네]




그곳에는 인간은 출입이 불가능하다.




‘게다가 현재 르나르-티로네의 지배자인 리프레 가문의 가주는 퍼스트 오더인 벤트민이 지배하는 곳.’




같은 퍼스트 오더니까 출입이 가능하지 않느냐고 하면, 그건 벤트민을 몰라서 하는 말이다.




그녀는 애초에 제로 오더를 제외한 다른 누구에게도 친분을 드러낸 적이 없다.




오히려 같은 퍼스트 오더라도 엘프가 아니니 깔보고 무시하는 쪽이었지.




‘신경 쓸 일이 하나 더 늘었군.’




루드거는 그렇게 생각하며 다른 책을 꺼내 들었다.




이 책에 대한 진실은, 굳이 다른 사람에게 말할 필요는 없겠지.




그리고 그에겐 아직 찾아야 할 자료가 더 남아 있었다.




무속성 마력에 대한 단서.




의도치 않게 파편의 행방을 구했지만, 당초 목적은 이루지 못한 상황이었다.




물론 아직 읽어야 할 책은 많이 남아 있으니, 기회가 영영 없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여전히 읽어야 할 것들이 많이 남아 있군.’




속독으로 빨리 읽고 넘긴다고 하더라도 100권이 넘는 책은 너무 많다.




다른 일행들이 읽는 속도가 현저히 느린 것도 있었다.




심지어 일부 해석이 힘든 경우에는 루드거에게 어떻게 읽는지 알려 달라고까지 하니 더욱 그럴 수밖에.




그러다 보니 진행 과정은 지지부진해질 수밖에 없었고, 결국 쌓아 놓은 책의 절반조차 읽지 못한 채로 끝을 맞이해야 했다.




따르르릉!




림레이의 몸에서 나는 기이한 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림레이는 로브 안에서 기계 태엽으로 이루어진 시계를 꺼냈다.




“시간이 다 됐구나.”




“벌써요?”




로이나가 책에 처박았던 머리를 퍼뜩 들어 올렸다.




서재에는 시계도 창문이 없어 바깥의 시간을 알 수 없다.




이곳에 오고 탐독에만 몰두했으니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체감상 구분이 힘들 터.




그걸 감안했기 때문에 림레이는 미리 시간을 맞춰 놓은 것이리라.




“이제 나가야 한다.”




“아직 미처 읽지 못한 책들이 있는데요.”




“그건 내일 마저 읽으면 되지.”




“오늘 같은 요행이 또 어떻게 있을 줄 알고요.”




“오늘 있었던 이 모든 과정이 전부 요행으로 보였느냐.”




림레이의 말에 로이나의 시선이 아르파를 향했다.




멀뚱멀뚱 앉아만 있던 아르파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지금 나가야 무사히 다른 탐험대와 합류할 수 있을 거다.”




“……살인자가 섞여 있을지도 모르는 탐험대 말이죠.”




서재를 찾느라 뒷전으로 넘겼지만, 아직 저택 내부에는 살인자들이 남아 있다.




로이나는 그것이 못내 걸렸지만, 그렇다고 저택에 남아 있겠다는 간 큰 소리는 할 수 없었다.




일행들은 결국 서고를 뒤로하고 복도로 나왔다.




“나가는 길은 아십니까?”




“저택 내부에서 특정한 방을 찾는 것은 어렵지만, 저택 밖으로 나가는 문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아.”




복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 일은 없으니 그냥 쭉 걷기만 하면 됐다.




그렇게 계속 걷다 보니 다른 마법사의 모습도 더러 보였다.




그들도 루드거 일행을 알아보고는 몸을 흠칫 떨었다.




이쪽을 바라보는 시선에서는 경계의 빛이 가득했다.




‘그러겠지. 저택 내부에서는 서로 지식을 누가 먼저 차지하는지에 대한 경쟁밖에 없을 테니까.’




생각해 보면 살인이 일어나도 이상할 것이 없는 구조였다.




비밀이 많은 저택. 이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바깥에서 알 도리가 없다.




심지어 누군가 죽는다고 하더라도 그 흔적은 저택이 알아서 지워 준다.




그런 상황에서 서로 먼저 지식을 찾기 위해 경쟁한다?




사람 죽기 딱 좋은 환경이다.




어쩌면 이 저택에서 행방불명된 사람 중에서, 꽤 많은 사람이 같은 마법사들에 의해서 살해당했을지도 모른다.




‘모든 마법사가 그런 사이코패스는 아니지만, 그런 사이코패스들의 비율이 마법사에 유독 높은 것도 있으니까.’




거기서 더 나아가면 흑마법사가 되는 거였다.




아무튼, 그런 생각을 품는 것은 다른 마법사들도 마찬가지인지라, 마법사들은 서로 다른 일행을 보면 일단 경계부터 했다.




루드거의 일행도 경계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 저택 내부에 살인자들이 있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지식 때문에 타인을 죽였다고 해도 참작하지 못할 텐데, 심지어 이놈들은 들어오자마자 함께 온 일행들을 살해했다.




지식을 위한 탐구, 혹은 원한 같은 것이 아니다.




모종의 목적을 위해 이 일을 저지른 것이다.




‘그래도 슬슬 저택 내부에 들어온 사람들이 거의 다 모이니, 여기서 무슨 일을 꾸미지는 못할 테지.’




그렇게 마법사들이 저택의 출구에 도착했을 때, 그들이 본 것은 어찌할 줄 모르고 닫힌 문을 바라보는 마법사들이었다.




“무슨 일이 생긴 걸까요?”




로이나가 궁금해하며 물었다.




이 시간이라면 다들 나가도 이상할 게 없었는데, 하나같이 난처한 기색이었다.




“잠깐! 떨어져 있으시오!”




“20명 이상 모이지 마라!”




“거리를 두고 물러나!”




복도와 홀은 룰이 적용되는 공간이다 보니, 안쪽에서 사람들을 만나도 서로 모이면 안 됐다.




결국, 루드거 일행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소식을 접할 수밖에 없었다.




가장 먼저 이야기를 들은 것은 남다른 청력을 지닌 아르파였다.




“뭔가 일이 잘못된 모양인데요?”




모두의 시선이 아르파에게 모였다.




아르파는 일행에게 자신이 조금 전에 들은 사실을 그대로 알려 주었다.




“저택의 문이 잠겨서 열리지 않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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