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UA - 382화 숨겨진 공간 (2)

 ◈ 382화 숨겨진 공간 (2)




다른 것은 다 먼지가 가득한데 유독 책만 깨끗하다.




루드거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숨겨진 방에 한눈팔려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발자국.’




다른 사람들의 출입이 있었음을 보여 주듯, 이 숨겨진 공간에 발자국이 여럿 찍혀 있었다.




기존에 쌓인 먼지와 발자국을 비교하면 최근은 아니다.




하지만 생긴 지 그렇게 오래되지도 않았다.




“아르파. 나가서 혹시라도 누가 온다면 최대한 시선을 끌어라.”




“네, 알겠습니다.”




아르파를 내보낸 루드거는 책을 펼쳐서 내용물을 빠르게 훑었다.




책은 저택을 물려받은 남자가 남긴 기록이었다.




‘과연. 저들은 이 내용을 통해서 저택의 문을 걸어 잠근 거였군.’




책에는 저택에 존재하는 신비의 종류, 마법 함정, 저택 자체의 기능을 다루는 방법이 적혀 있었다.




그중에서 검은 여명회가 저택의 문을 걸어 잠근 것은 저택에 존재하는 기관을 건드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굳이 왜 문을 잠그기만 한 거지? 저택의 신비를 역으로 이용할 줄만 알면, 굳이 이런 귀찮은 일을 벌일 필요도 없을 텐데.’




루드거는 곧바로 이유를 깨달았다.




놈들은 다른 방법을 취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하지 못한 것이지.




‘그렇군. 이 내용도 결국엔 고대어로 기록됐기에 아무리 검은 여명회라 하더라도 이걸 전부 해석하지 못한 거야.’




그나마 해석한 부분이 저택의 기관에 관한 내용이라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놈들이 만약 저택의 마법 함정과 신비에 대해서 개입했다면, 그때는 이곳은 비밀의 저택이 아니라 지옥의 저택이 됐을 테니까.




페이지를 빠르게 넘기던 루드거는 집무실 책상에 놓인 다른 책에 저도 모르게 눈길이 가고 말았다.




‘이건?’




가죽으로 덧대어진 책은 서재에 존재하는 다른 책들과 비교하면 조촐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책의 중요한 것은 겉모습이 아닌 안쪽에 적힌 내용이었다.




서고에 꽂혀 있지 않고 이 숨겨진 공간에 있다는 점에서, 절대 평범한 책이 아닐 터.




책을 집어 든 루드거는 서두에 적힌 글귀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이 모든 지식은 허무의 저주를 받은 자들을 위해 남긴다. 부디 도움이 되기를.]




‘허무의 저주?’




무언가 기시감을 느낀 루드거는 곧바로 다음 장으로 넘겼다.




[선택받은 자들임에도 축복과 은총을 발현하지 못하는 자들. 오히려 몸이 망가지며 채 서른을 넘기지 못하는 자들. 그들이 지닌 미지의 은총은, 본인들에게 있어 저주나 다름없다.]




그래서 붙은 이름이 허무의 저주.




루드거는 이 증상이 무속성 마력을 지닌 사람들과 매우 흡사하다는 걸 깨달았다.




흡사한 것을 넘어, 여기서 말하는 허무의 저주는 무속성 마력이 분명했다.




‘드디어 찾았다.’




루드거는 이곳에 온 목적 중 하나를 달성했다는 생각에 약간의 고양감을 느꼈다.




하지만 아직 기뻐하기엔 이르다.




‘이 책의 내용이 과연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는 읽어 봐야 알겠지.’




루드거는 정신을 집중해서 조심히 페이지를 넘기려 했다.




그 순간 바깥에서 요란한 신호가 들려왔다.




“아! 벌써 다 돌아보시고 오신 건가요?”




아르파가 의도적으로 목소리를 올리며 루드거에게 신호를 보냈다.




벌써 왔다고?




루드거는 손에 쥔 책을 잠시 망설임 어린 시선으로 내려다보았다.




곧바로 책을 덮은 루드거는 그것을 책상 위에 놓은 뒤, 숨겨진 방을 나섰다.




아르파의 목소리는 이곳에서 보이지 않는 책장 너머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하지만 거리는 그렇게 멀지 않았고, 지금도 더욱 가까워지고 있었다.




루드거는 숨겨진 방의 문을 닫았다.




어떠한 소음도 없이 스르륵 닫히는 책장을 확인한 루드거는 곧이어 이쪽을 찾아온 사람을 맞닥뜨렸다.




“생각보다 빨리 오셨군요.”




아르파와 함께 온 림레이를 보며 루드거가 가볍게 말했다.




그의 손에는 방금 막 책장에서 뽑아 든 책 한 권이 자연스럽게 쥐어져 있었다.




“맡으신 구역은 전부 다 확인하셨습니까?”




“그래. 마땅히 쓸모 있는 내용은 없었다. 나는 허탕을 쳤으니, 그래도 네놈은 뭔가를 좀 알아냈나 싶어서 왔는데.”




림레이는 그렇게 말하며 주변을 쓱 훑었다.




“뭐 없었냐?”




“없었습니다.”




“쯧. 이래서야 어떻게 바깥으로 빠져나가려는지.”




“다른 사람들은 어디에 있습니까?”




“아직도 자기 구역에 있겠지. 시간이 좀 걸릴 거다. 나야 내 [책 고르기] 마법 때문에 금방 확인했지만, 녀석들은 아니니까.”




“그렇다면 도우러 가죠. 저도 막 이쪽의 탐색을 끝냈으니 여유가 생긴 참입니다.”




루드거는 자연스럽게 림레이를 이끌어 로이나, 셈파스와 합류했다.




“소득은 있었습니까?”




“없었어요.”




“이쪽도.”




“흐음. 그거참 곤란한 상황이군요.”




루드거는 그렇게 말하며 턱을 쓰다듬었다.




다른 사람들은 그것에 아쉬워했지만, 오직 아르파만이 가만히 루드거를 바라볼 뿐이었다.




이제 어쩌면 좋을지 다들 고민하던 찰나, 닫혀 있던 서재의 문이 열렸다.




“서재다! 여기 서재가 있어!”




“드디어 제대로 찾았군!”




열린 문을 통해 들어온 사람들은 나이가 지긋한 노인들이었다.




루드거와 림레이의 표정이 굳었고, 로이나는 노골적으로 싫다는 얼굴이 됐다.




그럴 것이 지금 서재에 들어온 무리는 가장 마주치기 싫은 [진리학파] 마법사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서재를 찾겠다고 돌아다닌 건가.’




저들의 평소 언행을 생각하면, 저택을 탈출하기 위해 서재를 찾았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모두가 루드거와 비슷한 생각으로 진리학파를 바라볼 때, 진리학파의 마법사들 또한 루드거 일행을 발견했다.




“뭐냐?”




선두에 선 노인이 인상을 찌푸렸다.




비쩍 마른 그 얼굴은 매우 신경질적이었다.




루드거를 향한 그의 시선은 썩 곱지 않았다.




일단은 마주치게 됐으니, 루드거는 예의상 인사를 먼저 건넸다.




“반갑습니다, 선배님들. 서재에 오셨군요.”




“네놈은 뭐냐?”




다짜고짜 뭐냐고 묻는 그 행동은 매우 무례했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그걸 전혀 무례하다고 여기지 않는 듯싶었다.




“대체 이 서재를 어떻게 찾아온 거지? 우연히 들어오기라도 한 건가? 아니. 그게 무엇이든 상관없다. 여긴 우리가 왔으니 너희는 썩 꺼지도록 해라.”




그 말에 로이나가 울컥해서 외쳤다.




“그게 지금 무슨 말씀이세요! 여긴 저희가 먼저 들어와 있었다고요!”




“뭐? 지금 감히 누구 앞에서 그렇게 시끄럽게 소리치는 거냐!”




오히려 상대가 적반하장으로 나오자 로이나가 어깨를 움츠러들었다.




“저, 저는 6위계 마법사로…….”




“반쪽짜리 6위계 마법사겠지.”




상대는 로이나의 기세가 약해진 것을 놓치지 않았다.




과연 나이를 먹은 노인네답게 그는 교활하게도 로이나의 약점을 후벼 팠다.




“수도에서 벌어진 테러 사건에서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던데, 그야말로 마법사들의 수치 아닌가.”




“그러게 말이야. 위계가 높으면 뭘 하나. 나이도 어리고 경험이 부족하니.”




“심지어 일개 아카데미 교사에게 빌붙기나 하고 말이야.”




한 마디 한 마디가 날아올 때마다 로이나가 몸을 움찔 떨었다.




그녀는 이윽고 고개를 푹 숙였다.




그 모습을 본 셈파스가 눈을 부릅뜨며 기세를 끌어 올렸다.




“이 미친 늙은이들이…….”




셈파스가 무어라 말하려는 순간 루드거가 나서며 그런 셈파스를 제지했다.




“……루드거 첼리시.”




“분노를 거두어라. 여기는 내가 나서지.”




“……저 무례한 늙은이들을 이대로 놔두자고?”




“이런 곳에서 싸워 봤자 서로에게 손해일 뿐이다. 내가 알아서 잘 타이르도록 하지.”




셈파스는 무어라 말하려다가 입술을 깨물며 뒤로 살짝 물러났다.




화는 나지만, 그 이상으로 루드거를 인정하기 때문에 가능한 행동이었다.




싸움밖에 하지 못하는 자신보다는, 더 다재다능한 루드거가 지금 상황에서 대처를 더 잘할 테니까.




셈파스를 진정시킨 루드거는 곧바로 진리학파 마법사들의 앞에 서며 말했다.




“그 입 닥쳐라. 머리가 말라비틀어진 망령들아.”




크흡!




그 파격적인 발언에 셈파스가 자기도 모르게 뿜어 버렸고, 로이나도 숙였던 고개를 치켜들었다.




아니 잘 해결한다면서?




셈파스가 당혹감이 가득한 시선으로 루드거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당혹스러운 것은 폭언을 정면에서 들은 진리학파의 마법사들도 마찬가지였다.




“네놈, 지금 뭐라고 했느냐. 어? 뭐라고 했냐고!”




“늙어서 귀가 막혔나. 입 닥치라고 했다.”




“이……! 이놈이 미쳤구나! 감히 하늘 같은 선배님에게!”




진리학파의 수장은 분노로 수염을 바르르 떨며 마력을 일으켰다.




펑퍼짐한 로브가 펄럭이며 마력이 불꽃처럼 형상화됐다.




그것은 뒤에 도열한 다른 진리학파 마법사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비록 연구에 치중한 마법사들이라 하더라도 오래 살아온 만큼 마법사로서의 위계는 상당한 편이었다.




그러나 루드거는 그 거대한 압박감 속에서도 평정심을 잃지 않았다.




“선배?”




오히려 상대방을 향한 싸늘한 조소를 숨기지도 않았다.




“능력도 없이 권위와 나이에만 기대는 늙은이들이 입은 살아 있군.”




“뭐라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새파란 놈이 정녕 미쳤구나! 내 지금 당장……!”




“당장, 뭐.”




쿠우웅──!!!




루드거가 목소리를 낮게 깔며 마력을 일시에 방출했다.




방대한 마력의 팽창으로 인해 공기가 충돌하며 무언가 폭발하는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봉인술식에 필요한 최소한의 마나를 제외한 모든 마력을 방출한 루드거가, 주위에 푸르스름한 안개를 두르며 말했다.




“지금 여기서, 싸울 생각인가?”




존중도 예의도 없는.




노골적이고 직설적인 말.




그러나 진리학파 마법사는 그 도발에 차마 응할 수 없었다.




겁을 주려던 그들이, 오히려 겁을 집어먹어 버린 것이다.




‘무, 무슨 놈의 마력이……!’




루드거의 주위에는 고밀도의 마나를 제어할 때 펼쳐지는 마력 안개 현상이 일어나 있었다.




진리학파 마법사 중, 저 기예가 가능한 자는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것은 루드거가 마나에 대한 제어력이 어마어마한 데다, 마나 방출을 100%까지 올릴 수 있기에 가능한 일.




심지어 원래 부족했던 마나를, 최근 영약과 여러 일을 통해 비약적인 상승까지 일으켰으니.




이 순간, 루드거는 기세만큼은 렉서러 등급 마법사 그 이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우, 우리를 건드리면 뒷감당할 자신은 있는 거냐!”




“뒷감당? 어차피 전부 저택에 갇혀서 죽을지도 모르는데, 굳이 그게 필요할지 모르겠군.”




루드거가 그렇게 말하며 한 발 내디뎠다.




그러자 진리학파 마법사들이 일제히 한 걸음 물러났다.




고작 한 명이, 스무 명의 마법사를 압도하고 있는 것이다.




진리학파 마법사들은 그 사실에 자존심이 상해 얼굴이 붉어졌다.




이쪽의 숫자가 더 많은데 뭐가 무섭다고 밀려난단 말인가?




그런 생각으로 더 강하게 나서려는 순간, 먼저 움직이는 사람이 있었다.




“그만하지.”




철그렁.




림레이가 석장 형태의 지팡이를 한 차례 흔들며 루드거의 곁에 섰다.




갑작스러운 렉서러 등급 마법사의 참전에, 반격에 나서려던 진리학파 마법사들의 마력이 주춤했다.




림레이는 그런 진리학파 마법사들을 한심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여기서 멈출 건가. 아니면 끝까지 할 건가. 만일 후자를 고른다면, 나 또한 여기 있는 선생의 일행으로서 가만히 있을 수 없다만.”




현자 림레이가 그렇게 말하니 진리학파 마법사들 사이에서 소요가 일었다.




반대로 그 말에 용기를 얻은 로이나와 셈파스도 앞으로 나섰다.




숫자는 루드거 일행이 더 적지만, 개개인의 무력은 이쪽이 훨씬 더 압도적이다.




진리학파 마법사들도 그걸 모르지 않았다.




괜히 자존심을 부리며 평소처럼 행동하다가 본전도 찾지 못하게 됐다.




“림레이.”




그때 진리학파의 선두에 선 노인이 입을 열었다.




진리학파의 현 수장인 토르테이.




그가 한층 우묵하게 가라앉은 눈동자로 림레이를 응시하며 말했다.




“자네는 아직도 이곳에서 헛된 희망을 찾아 헤매나?”




“…….”




“그렇다면 그건 의미 없는 행동이다. 애초에 우리의 도움도 없이 어떻게 네가…….”




“그만.”




림레이가 토르테이의 말을 끊었다.




그 행동에 화를 낼 법도 한데 토르테이는 입을 다물었다.




그럴 것이, 림레이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평소에도 짜증을 부리고 자주 버럭 하는 림레이였지만, 지금은 그 수준이 달랐다.




얼굴은 얼음장처럼 사나웠으나 눈동자는 활화산처럼 거세게 타올랐다.




그 모습은 루드거도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토르테이는 일그러진 림레이의 표정을 보는 순간 입을 다물었다.




한 마디만 더 하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본능적인 직감이 들었다.




“……흥. 어리석은 놈. 마음대로 해라.”




가자!




토르테이는 그렇게 말하며 일행들을 이끌고 서재의 다른 곳으로 향했다.




이쪽과는 상종도 하기 싫다는 태도는, 자신의 잘못을 절대 굽히지 않으려는 의지마저 엿보였다.




“세상에. 어쩜 저렇게 제멋대로일 수가.”




로이나는 사과조차 하지 않는 진리학파의 태도에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셈파스도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반대로 루드거는, 조금 전 토르테이와 림레이가 나눈 대화를 곱씹었다.




“림레이 현자님.”




“…….”




“진리학파와 아는 사이였습니까?”




그 말에 로이나와 셈파스도 뒤늦게 그걸 떠올리고는 림레이를 응시했다.




자신을 향한 궁금증 가득한 시선에 림레이는 눈썹을 찌푸렸다가 이내 미간에 힘을 풀었다.




“그래. 여기까지 와서 뭘 숨기겠나.”




그는 푸우 하고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과거 진리학파 소속 마법사였네. 그리고 지금 저놈들과는, 아주 불편한 관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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