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UA - ◈ 383화 그림자 괴물 (1)
◈ 383화 그림자 괴물 (1)
“무슨 일이 있던 겁니까?”
“옛날 일이야. 당시 나는 진리학파의 비공식 멤버였다. 명단에 이름도 올리지 않고, 그저 외부 고문으로서 도움을 주는 정도였지.”
“저들이 말하는 것을 보면, 그래도 꽤 중책을 맡으셨던 것 같습니다만.”
“그랬지. 정확히 그건 내가 아니라 내 딸이었지만 말이야.”
딸이라는 말에 로이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딸이 있으셨어요?”
“뭐 이놈아?! 난 결혼도 못 한단 말이더냐!”
림레이가 지팡이를 휘두르려 들자 로이나가 호다닥 아르파의 뒤에 숨었다.
루드거는 그 우스꽝스러운 광경을 지켜보았지만.
솔직히 로이나와 같은 생각이었다.
딸이 있다니, 이 늙은이가 결혼은 했었구나 하고.
림레이는 아르파의 뒤에 숨은 로이나를 찌릿 노려보고는 지팡이를 내렸다.
“……내겐 하나뿐인 딸이었다. 그 아이는 진리학파의 유망주였고, 누구보다도 열심히 신비에 대해 탐구했지.”
“신비에 대한 탐구라니.”
루드거는 림레이와 진리학파의 대화, 그리고 지금 림레이가 하는 말을 통해 그가 카사르 분지에 찾아온 상황을 떠올렸다.
그 모든 퍼즐 조각이 하나씩 끼워 맞춰졌다.
아직 부족한 조각들이 많았지만, 대략적인 그림은 그려졌다.
“설마 림레이 현자님의 따님은 이곳에서…….”
림레이는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 딸아이는 진리학파 소속으로서 이곳 카사르 분지에 왔지. 하지만 당시 카사르 분지는 지금처럼 어떤 것을 조심해야 하고 주의해야 할지 많이 알려지지 않았어.”
“그렇다는 건 따님은 신비 현상에…….”
“자연재해였다. 3일 동안 모든 일을 순조롭게 끝내고 돌아가는 길에 벌어진 일이었지. 과도한 마나 집중으로 인한 마력의 폭풍. 그것이 카사르 분지를 빠져나가려던 행렬의 중간을 덮쳤다.”
당시 림레이는 해당 신비의 밤에 참여하지 않았었다.
그 또한 자신이 전해 들은 이야기를 담담히 할 뿐이었다.
“마력의 폭풍은 위험하지. 멀리 떨어져 있어도 피부를 아릿하게 만들거든. 괜히 재해라는 말이 붙은 것이 아니야.”
마법사들은 패닉에 빠졌고, 이렇다 할 대응을 하지 못했다.
그때 나선 것이 림레이의 딸이었다.
“내 딸은 힘을 합쳐서 마력의 폭풍을 막아 내자고 했지. 밀어내거나 피하지는 못해도 최소한 시간은 벌 수 있으리란 판단이었어. 마력 재해는 영구적이지 않아. 오히려 그 지속 시간이 매우 짧지. 조금만 버티면 가라앉으리란 게 판단의 요지였다.”
그 판단은 실제로 맞아들었다.
수백 명이 넘는 마법사들이 일제히 마법을 펼치며 마력의 폭풍에 저항했다.
폭풍은 멈췄고, 그대로 조금만 더 버티면 가라앉을지도 몰랐다.
그녀가 간과한 것이 있었다면.
그것은 인간의 이기심이었으리라.
“일부 겁쟁이들은 마력의 폭풍이 두려워 그 틈을 타서 바깥으로 빠져 나갔다. 거대한 벽에 균열이 이는 것처럼, 다른 마법사들도 거기에 영향을 받았지.”
이 정도면 괜찮겠지.
나 하나면 되겠지.
그 생각으로 마법사들이 도망을 선택했고.
붕괴.
가까스로 균형을 이루던 힘의 대치는 마법사들의 이탈로 인해 무너지고 말았다.
“152명. 당시 최후까지 마력의 폭풍을 막아 내기 위해 자신의 마력을 불사른 사람들의 숫자였다.”
그리고 사망자의 숫자이기도 했다.
차분하게 읊조리는 림레이의 말에 누구도 위로를 표하지 못했다.
그의 목소리 깊은 곳에 은은하게 배어 있는 허무함과 분노는 섣부르게 공감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면 림레이 현자님이 이곳에 찾아오시는 이유가…….”
“미련이지. 어쩌면, 신비 현상에 휩쓸린 딸아이가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아비로서의 미련.”
마법사인 그는 딸의 죽음을 인정했지만, 아버지인 그는 아직 인정하지 않았다.
그래서 림레이는 신비의 밤이 열리는 카사르 분지에 찾아왔다.
어쩌면 딸아이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은 채로.
매년.
수십 년 동안이나.
“……그렇다면 저기 있는 진리학파 마법사들은 그날의 생존자들이겠군요.”
“비열한 겁쟁이들이지.”
림레이가 이를 뿌득 갈았다.
“그러면서도 뻔뻔하게 자신들이 더 중요한 사람들이니 오래 살아야 한다고 떠들지. 수십 년 전에도 그랬는데, 지금은 나이를 헛먹었는지 더 심해졌어.”
림레이는 그렇게 중얼거리다 루드거를 보며 피식 웃었다.
“그래도 네놈 덕분에 속은 좀 시원해졌다.”
“제가 말입니까?”
“조금 전의 일을 잊은 게냐? 저 노망난 것들을 향해 시원하게 저질러 주지 않았냐. 다른 놈들은 대체 저치들이 뭐가 무섭다고 쩔쩔매기만 해서 영 고까웠는데, 오랜만에 속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딱히 좋으라고 한 행동은 아니었는데 말이지.
단지 루드거 또한 진리학파의 행태에 화가 났을 뿐이다.
어떻게든 저택을 벗어나야 하는 상황에서도 저런 이기적인 행동이라니.
심지어 나중에 서재에 찾아온 주제에 이쪽에게 나가라는 그 뻔뻔한 행동까지.
이곳에 보는 사람이 없었더라면, 혹은 지금이 긴급 상황이 아니었더라면 무력을 동원했을지도 몰랐다.
“이야기가 길어졌구나. 여기서 떠들지 말고, 열심히 도움이 될 만한 책이나 찾자꾸나.”
림레이는 그렇게 말하며 먼저 자리를 벗어났다.
다른 일행도 림레이의 말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루드거도 다른 책장을 뒤진다는 명목으로 아르파를 데리고 자리를 빠져나왔다.
“리더.”
주위에 듣는 귀가 없다는 걸 깨달은 아르파가 루드거에게 물었다.
“왜 일행들에게 숨겨진 공간을 비밀로 하시려는 건가요?”
아르파는 조금 전부터 그것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반응이었다.
“모두에게 알리면 좋은 일 아닌가요?”
“믿을 수 없으니까.”
“누구를요?”
“전부.”
루드거는 책장에 있는 책을 한 권 꺼내며 페이지를 차라락 넘겼다.
아르파는 아직도 루드거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는지 고개를 옆으로 갸우뚱거렸다.
“아르파. 이곳에서 살인 사건이 벌어졌다. 알고 있지?”
탁.
루드거가 책을 덮었다.
“네? 네. 그야 봤으니까요.”
“살인자는 숫자는 열 명가량. 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저택에 아직 살인자가 있으며, 그들이 검은 여명회 소속이라는 거지.”
“네. 그래서 리더의 말씀대로 수상해 보이는 사람들을 유심히 살펴봤어요.”
“그래. 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내게 접촉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내가 이곳에 온 것을 모르지 않을 텐데도 말이야.”
아르파는 책을 다시 책장에 꽂는 루드거를 향해 물었다.
“하지만 주위에 보는 눈이 너무 많아서 그런 것이 아닐까요?”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신호 정도는 충분히 보낼 수 있었다. 그럼에도 누구도 내게 신호를 보내지 않았지. 우리가 서재까지 돌아오는 길에도, 미행이 붙는 일도 없었다.”
새로운 책을 뽑아 든 루드거가 종이를 넘기며 아르파에게 물었다.
“어째서일까.”
“그건…….”
아르파는 모른다고 대답을 하려다가 다시 생각을 고쳐먹었다.
루드거가 이렇게 물어봤다는 것은, 충분히 단서를 주었다는 뜻이었으니까.
루드거는 믿을 수 없다고 했다.
그게 누구냐고 콕 짚지 않고 전부라고 했지만, 지금 상황에서 비밀을 엄수한다는 것은 다른 이유가 명확했다.
“더 있다는 건가요?”
아르파의 질문에 루드거가 눈을 빛냈다.
루드거가 확인차 물었다.
“무엇이?”
“리더가 말씀하신 검은 여명회요. 리더는 일단 명목상 그들의 간부잖아요. 그런데도 접촉이나 신호가 없다는 것은, 그들이 리더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거로 받아들인 거고요.”
제 말이 맞죠?
그렇게 묻는 아르파의 눈동자를 마주한 루드거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정답이다.”
루드거는 책장에 책을 다시 돌려놓았다.
“저들이 내게 접근하지 않는 것. 그것은 이 상황 때문에 여의치 않은 것이 아니야.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거지.”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은……?”
“가령, 이미 나에 대해서 소식을 주고받을 수 있는 사람이 있다거나 말이야.”
“네? 하지만 우리 일행은…….”
“아르파. 사람을 믿는 것은 좋지만, 지나치게 믿는 것은 때로는 독이 된다. 살면서 의심은 반드시 필요해.”
루드거의 단호한 말에 아르파의 얼굴이 시무룩해졌다.
“그래도, 뭔가 아닌 것 같아요. 다들 좋은 사람 같은데, 이 중에 저희를 속이는 사람이 있다니. 어째서일까요. 꼭 그래야 할 필요가 있는 걸까요?”
“모두에게 저마다의 이유가 있겠지. 그것이 대의를 위해서든, 혹은 정말 별 볼 일 없는 사소한 것이든 말이야.”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하실 거예요?”
“우선은 지켜봐야지. 상대가 어떻게 나오는지 확인하고 대처해도 늦지 않으니까. 무엇보다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저택을 벗어나는 방법이다.”
“안쪽의 방에 단서가 있었나요?”
루드거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택 내부의 비밀은 알아냈다. 여러 신비 현상과 마법 함정, 그리고 이 저택을 다루는 기관까지도.”
“그러면 이제 나갈 수 있는 거죠?”
“당장은 아니다. 저택의 문을 걸어 잠근 것은 기관 장치와 관련된 건데, 문제는 기관 장치의 위치를 아직은 모른다는 거야.”
“그걸 찾아서 움직여야겠네요. 그런데 다른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설명하죠?”
“그것도 새로운 문제 중 하나지.”
무조건 5명이 붙어서 움직여야 하는 제약이 보통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어디를 가도 함께 이동해야 하니까.
“그리고 마냥 일행만 의심하는 것은 아니다. 이 서재에 있는 다른 진리학파 마법사도 용의선상에 올라와 있어.”
그들이 서재에 찾아오지 않았더라면 별생각 없었겠지만, 하필 이 타이밍에 서재에 들어온 것도 마음에 걸렸다.
“검은 여명회는 대체 여기서 뭘 하려는 생각일까요?”
“확실하지는 않지만, 저 안쪽에 적힌 책의 내용에 그런 것이 있었다.”
“뭐죠?”
“이 카사르 분지는 땅을 타고 흐르는 거대한 에너지, 즉 지맥이 한곳에 모여서 만들어진 땅이지. 굳이 비유하자면 막대한 물을 담은 천연 댐이라고 볼 수 있다. 이 댐이 무너지게 된다면 어떻게 되겠느냐?”
“그야, 엄청난 피해가 일어나겠죠? 물이 한꺼번에 방류되면서 인근 일대는 모두 물에 잠길 거고…….”
아르파는 말하다 말고 눈을 크게 떴다.
“설마…….”
“바로 그거다. 놈들은 이 카사르 분지에 존재하는 지맥의 흐름을 무너뜨리려 하고 있어.”
지맥의 붕괴라니.
그것이 가능한 일이란 말인가.
이런 쪽으로는 지식을 접하지 못한 아르파는 그 계획이 실현 가능한지부터 의문이었다.
“아마 가능할 거다. 놈들이 모종의 방법을 알아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으니까.”
“지맥을 대체 어떻게 파괴할 생각인 거죠?”
“카사르 분지는 총 5개의 거대한 지맥이 뭉쳐져 있다. 그 흐름을 중간에 꼬아 버리면, 균형을 이루는 힘은 서로 뒤엉키고 충돌하게 될 거다. 크게 어렵지 않은 방법이지.”
충돌로 인한 반발은 일대에 무시무시한 재앙을 초래할 것이다.
레슬리가 말했던, 모든 마법사를 일거에 쓸어버리는 방법이 바로 이것이었다.
지금까지 그 방법을 몰랐지만, 숨겨진 방에 적힌 내용을 해석했기에 가능한 방법이 분명했다.
“그 중요한 지맥 중 하나가, 바로 이 비밀의 저택이 자리한 곳이다. 놈들이 저택에 들어온 것은 그런 이유겠지.”
“그렇다면 어서 막아야겠네요.”
“그래. 문제는 일행을 어떻게 설득해서 움직이냐는 건데.”
적당히 얼버무리며 넘길까 고민하던 그 순간이었다.
저택의 내부가 드드드 소리와 함께 잘게 떨리기 시작했다.
“리더! 저택이……!”
“알고 있다.”
루드거는 아르파를 데리고 서재의 중심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지금 일어나는 진동 때문에 모인 사람들로 가득했다.
루드거를 발견한 로이나가 외쳤다.
“루드거 씨!”
“다들 괜찮습니까?”
“네. 그보다 이 진동은 대체…….”
“아무래도 무언가 일이 벌어지려는 것 같습니다.”
검은 여명회가 손을 쓴 것이 분명했다.
지맥을 건드린 것인지, 혹은 저택의 기관을 건드린 것인지는 모른다.
둘 중 무엇이든 평범한 일은 절대 아닐 테니까.
계속 일어나던 진동은 이윽고 잠잠해졌다.
하지만 자리의 누구도 그 사실에 기뻐하지 않았다.
모두가 본능적으로, 이 고요함은 폭풍전야와 흡사하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진리학파 마법사들은 저들끼리 의견이 분분했다.
“이거, 저희도 나가야 하는 거 아닙니까?”
“별거 아닌 일일 수도 있다. 서재는 안전하니 여기서 사태를 관망하는 것도 나쁘지 않아.”
“지금 문이 열려 있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자정이 되기까지 시간은 많이 남아 있어. 아직은 괜찮아.”
토르테이가 나서서 상황을 정리했다.
“일단 지켜본다. 여기서 경거망동하게 움직였다가는 오히려 휩쓸릴 수가 있으니까.”
토르테이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림레이를 슬쩍 쳐다봤다.
그쪽은 어떻게 할 거냐는 시선이었다.
림레이는 그런 토르테이를 한 번 쏘아보고는 루드거에게 말했다.
“나가세. 여기 있어 봤자 좋지는 않을 거 같으니까. 아니면 여기에 남아 있을 건가?”
“저도 나가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던 차였습니다.”
루드거는 일행들을 이끌고 서재를 빠져나왔다.
그런 루드거의 등에 대고 진리학파 마법사들이 혀를 쯧 하고 찼지만 가볍게 무시했다.
복도에 나온 루드거 일행은 한층 더 고요해진 저택의 공기에 긴장했다.
“다들 조심하십시오. 이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까.”
모두가 알겠다고 대답하려는 순간, 복도 너머에서 비명이 울려 퍼졌다.
“으아아악!”
지금까지의 신비 현상에 의한 환청과는 다른, 살아 있는 사람이 직접 내지르는 비명.
곧이어 복도 너머에 사색이 된 마법사 한 명이 이쪽을 향해 도망치듯 달려오고 있었다.
“살려 줘! 괴물! 괴물이!”
괴물이라고? 그보다 저 사람은 왜 혼자지? 일행은?
모두가 그 모습에 의아했다.
그 순간 저 먼 복도의 어둠 너머에서 무언가 꿈틀거렸다.
가장 먼저 알아본 아르파가 놀라서 물었다.
“저건 대체 뭐죠?”
도망치는 마법사의 등 뒤로, 이형의 괴물들이 쫓아오고 있었다.
Komentar
Posting Komenta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