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UA - 390화 잔해 속에서 피어오르는 것 (1)

 390화 잔해 속에서 피어오르는 것 (1)




저택의 흔들림은 마치 저택 자체가 안쪽에 머무는 사람들에게 경고하는 것 같았다.




곧 무언가 벌어질 테니, 어서 도망치라고.




“리더! 이게 어찌 된 일일까요?”




“나도 모르겠구나.”




아르파의 부축을 받은 루드거는 로이나와 셈파스가 있는 곳에 도달했다.




거대한 진동 때문인지 두 사람도 때마침 정신을 차린 와중이었다.




“무, 무슨 일이죠?”




당황하는 로이나에게 루드거는 방금 전에 있었던 일을 간략하게 설명해 주었다.




림레이의 배신. 그리고 둘의 싸움 이후로 이렇게 된 저택의 상황까지.




셈파스가 침음성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영감님은?”




“물러났다.”




“대단하군.”




루드거에게 한 말이었는데, 비꼬는 것이 아니라 진심 어린 감탄이 담긴 말이었다.




림레이는 6위계 마법사다.




루드거가 상대한다고 해서 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셈파스는 당연히 마법사의 실전 싸움에 위계가 전부라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위계라는 것은 힘의 총량이고, 가장 큰 역할을 차지하는 것도 맞았다.




하물며 림레이는 골방에만 틀어박혀 연구만 매진하는 마법사가 아닌, 세계를 떠돌며 마법을 탐구하는 실전파다.




그런 림레이를 상대로 버티는 것만 해도 기적인데, 오히려 림레이가 물러났다니.




아마 대등하게 싸워서 쫓아냈다는 걸 들었다면 더욱 놀랐으리라.




물론, 루드거는 자세한 싸움의 과정까지는 설명해 주지 않았다.




그저 그가 이 저택의 상황과 맞물려 도망쳤다고만 했을 뿐.




로이나는 배신의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이럴 수가. 림레이 현자님이 대체 왜 그런 짓을…….”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저기 바깥을 봐라.”




셈파스가 창밖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그 행동에 모두의 시선이 창문을 향했다.




그리고 다들 놀랄 수밖에 없었다.




신비 현상에 의해 뿌연 안개가 끼어 있어야 할 창밖 너머의 풍경이 깨끗했다.




지금껏 보인 적 없던 저택 바깥의 모습이 훤히 비칠 정도로.




일행들은 그제야 이 저택에 생긴 변화를 알아차렸다.




“신비 현상이…… 옅어지고 있어요.”




로이나가 중얼거린 말에 루드거는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깨닫게 됐다.




‘설마 나와 영감님의 싸움 여파로 이렇게 된 건가.’




충분히 가능성 있었다.




생각해 보면 본래 저택은 무슨 일이 벌어져도 그 상흔이 빠르게 복구됐다.




어지간한 위력의 마법조차 견딜 정도로 튼튼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조금 전 림레이와 루드거의 일전은 저택에 수용할 수 있는 한계를 아득히 벗어났다.




무려 6위계 마법의 충돌이다.




두 사람의 마법은 저택을 감도는 고밀도의 마력을 밀어내고 충돌하며 폭발시켰다.




그로 인한 충격은 아무리 신비 현상에 의해 보호를 받는 저택이라 하더라도 영향이 갈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가장 큰 이유는, 루드거와 림레이가 싸운 장소였다.




‘그림자 기사를 소환하는 소환진. 그곳은 저택의 핵심 방어 시스템의 핵이었어.’




핵의 위치는 저택 아래에 흐르는 지맥에서 에너지를 끌어 올리는 통로이기도 했다.




그 위에서 싸움을 벌였다.




사실상 화약고에서 불꽃놀이를 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땅속에 흐르는 지맥을 끌어 올려 쓰는 통로가 박살이 났으니, 저택은 지맥으로부터 더 이상 마력을 공급받지 못하게 됐다.




하지만 그것이 흐름을 막는다는 걸 의미하지 않았다.




그 이상으로 뒤틀린 지맥의 흐름이, 역으로 저택에 영향을 주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을 증명하듯 저택 전체가 크게 떨리며 벽에 미약하지만 금이 갔다.




“이, 이러다 무너지겠어요!”




로이나의 외침에 루드거는 동감했다.




당연히 탈출해야 했다.




그 순간 루드거는 아직 미처 확인하지 못한 걸 떠올렸다.




‘서고!’




서고 안쪽에 숨겨진 비밀의 방.




그곳에 있던 책을 미처 살피지 못했다.




루드거의 미약한 변화를 잡아낸 것일까.




아르파가 루드거를 향해 말했다.




“리더. 다녀오세요.”




설마 아르파에게 이런 배려를 받을 줄 몰랐던 루드거는 일순 놀랐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마.”




루드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사이 체력은 꽤 회복했다.




고갈된 마력도 약을 먹은 덕분에 다시 차오르는 중이었다.




머리는 지끈거리지만 견딜 만했다.




“저는 잠시 들렀다가 올 곳이 있습니다. 나머지 분들은 먼저 탈출하십시오. 지금이라면, 저택 바깥으로 나갈 수 있을 테니까요.”




루드거는 그렇게 말하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복도를 내달렸다.




뒤에서 로이나가 뭐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지만 무시했다.




‘최대한 빨리 찾아야 한다.’




진동은 더욱 커졌다.




벽에 균열이 생기고, 천장에서 먼지가 부스스 떨어져 내렸다.




지맥에 의해 보호를 받던 저택은 이제 역으로 지맥의 힘에 의해 붕괴되는 중이었다.




루드거는 흔들리는 복도를 달리다가 발걸음을 멈췄다.




저 앞에, 문이 열리며 일련의 무리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다들 어서 움직여! 챙길 거 다 챙기라고!”




“저택을 지키는 신비는 사라졌다! 가지고 나갈 수 있어!”




“가장 중요한 책들은 제대로 간수해라!”




진리학파 마법사들이었다.




그들은 한 아름이나 되는 책들을 바리바리 싸 들고 있었다.




그중 시선을 잡아끄는 사람이 있었다.




루드거와 기 싸움을 벌였던, 진리학파의 대표 토르테이였다.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그는 손에 단 한 권의 책만 쥐고 있었다.




루드거는 그 책이 무엇인지 단숨에 알아봤다.




‘무속성 마력에 관한 책!’




루드거가 애타게 찾던 물건.




그것을 지금 토르테이가 지니고 있었다.




루드거가 진리학파를 발견했듯, 진리학파 마법사들 또한 루드거를 발견했다.




“뭐냐. 용케 죽지 않았구나.”




토르테이는 루드거를 알아보고는 이죽거렸다.




일련의 사태가 벌어지는 동안 서고 안에만 숨어 있던 그들이다.




하지만 바깥에서 무언가 벌어졌다는 걸 모르지는 않았다.




루드거는 굳이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의 시선은 말없이 토르테이가 쥐고 있는 책을 향했다.




“하.”




토르테이는 바보가 아니었다.




그는 루드거가 자신이 지닌 물건을 탐낸다는 걸 깨닫고 한껏 비웃음을 머금었다.




“왜. 이게 탐나나?”




“…….”




“반응을 보아하니 이게 중요한 물건이라는 걸 알고 있군. 그 숨겨진 방을, 우리보다 먼저 찾았던 거겠지?”




토르테이는 운이 좋았다.




저택이 흔들릴 때 서고도 그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때 일부 책장이 무너져 내렸는데, 거기서 숨겨진 공간을 발견한 것은 천운이었다.




지식을 향한 끝없는 탐욕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토르테이는 안쪽에 있는 물건들을 모조리 쓸어 왔다.




그중 가장 중요해 보이는 것은 자신이 직접 챙겼다.




“그렇게 반응하니 더욱 확실하군. 억울해서 어쩌느냐. 이런 세기의 발견을 코앞에서 놓쳤으니 말이야.”




루드거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 굳은 얼굴로 토르테이를 응시할 뿐이었다.




토르테이는 그 반응이 괜히 보기 좋아서 더 무어라 말하려 했다가, 뒤늦게 무언가를 깨달았다.




‘저놈. 나를 보는 게 아니잖아?’




루드거가 보는 것은 토르테이가 아닌 그 뒤.




어깨너머의 무언가를 보는 것이었다.




“대체 뭐가…….”




토르테이가 무어라 말하며 뒤를 돌아보는 순간, 거대한 폭발이 그를 덮쳤다.




계속 진동하는 저택이 재차 크게 흔들렸고, 폭발의 충격에 휩쓸린 토르테이가 바닥에 넘어졌다.




급하게 방어 마법을 펼치지 않았더라면, 그 자리에서 산산조각이 났을 만한 폭발이었다.




실제로 거기에 휩쓸린 몇몇 진리학파 마법사들이 큰 상처와 함께 쓰러져 있었다.




“이, 이 무슨……!”




토르테이는 이게 무슨 일이냐고 말하려다가 손이 허전하다는 걸 깨달았다.




그가 쥐고 있던 책이 저 앞까지 튕겨 나가 있었다.




그것도 루드거의 발치에.




“자, 잠깐!”




루드거는 고개를 숙여 바닥에 떨어진 책을 주워들었다.




그는 손으로 책 위에 내려앉은 먼지를 가볍게 툭툭 털어 냈다.




“이……! 뭐 하는 거냐! 어서 내놔! 그건 내 거야!”




토르테이는 발끈하며 외쳤다.




분노로 일그러진 그의 주름 가득한 얼굴은 탐욕으로 가득했다.




“이제 제 손에 들어왔는데, 그걸 제가 왜 넘깁니까.”




“이놈이 지금 나와 말장난을 하자는 것이냐!”




“말장난이 아닙니다. 그리고 지금 잊으신 모양인데, 당신 방금 기습당한 겁니다.”




그랬다.




루드거의 충고에 뒤늦게 사태를 깨달은 토르테이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뒤를 돌아봤다.




대체 어떤 놈이 감히 진리학파 마법사인 자신을 공격했냐고.




단단히 분노한 토르테이의 얼굴이 당혹감으로 뒤덮였다.




“상황파악 못 하고 냅다 화부터 내는 버릇은 여전하구나. 토르테이.”




“……림레이.”




그곳에는 자신의 옛 동료가 있었다.




“이게 대체 무슨 짓이지?”




토르테이는 림레이가 자신을 공격한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다.




“우리가 그렇게 큰 원수를 졌던가? 아니야. 우린 함께 진리를 탐구하던 사이였지 않은가!”




“네 딴에는 그렇게 생각했겠지.”




림레이는 토르테이의 말에 코웃음을 쳤다.




토르테이의 말이 얼마나 같잖은 것인지, 그의 냉소적인 태도만으로 충분히 유추할 수 있었다.




“토르테이. 네놈은 항상 그래. 자신이 한 모든 행동이 선의에서 비롯된 일이라고 말하지.”




“뭐? 당연한 소릴! 나는 오로지 지식을 탐구하기 위해서만 움직인다! 그게 선의가 아니면 뭔가!”




“그래. 그래서 문제야. 지식을 가장 잘 이해하는 것이 자신이라고 철석같이 믿지. 다른 사람이 백 명 천 명이 죽어도, 자신만 살면 된다고 생각해.”




“뭐라고?”




“너는 사람이 죽어도 신경조차 쓰지 않아. 그걸 안타까워하지도, 슬퍼하지도 않지. 진지하게 하나 물어보자. 정말로 슬퍼하긴 했나?”




“슬퍼하다니 무얼…….”




“내 딸아이 말일세.”




“…….”




그 순간 무언가를 느낀 것인지 토르테이가 입을 다물었다.




“……그건 사고였어. 왜 내 책임인 것처럼 말하지?”




“충분히 방지할 수 있는 사고였으니까.”




림레이는 싸늘한 조소와 함께 석장을 들어 올려 토르테이를 겨누었다.




“자네가 그 자리에서 자신의 직속 제자들을 이끌고 도망치지만 않았다면 누구도 죽지 않았어.”




“…….”




“내가 모를 줄 알았나?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입을 싹 다물고, 관련된 사람들은 죽었으니 상관없다고 생각했어? 천만에.”




림레이는 그렇게 말하며 허리춤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것은 종 모양의 아티팩트였다.




딸랑.




림레이가 그것을 흔들자, 저택 곳곳에서 희끗희끗한 영혼들이 나타나 그의 주위에 맴돌았다.




“토르테이. 그거 아나? 이 저택에는 죽은 자들의 영혼이 가득해. 이 카사르 분지 전체가 마찬가지네. 이곳에서 눈을 감은 자들은 평생 이곳에 갇혀서 지내야 하지.”




당황하는 토르테이에게 림레이는 끌끌거리며 낮게 웃었다.




“이곳은 마치 거대한 새장과도 같아. 사람들의 영혼이 영면에 들지 못하게 만드는, 끔찍한 새장.”




“그게, 무슨…….”




“내 딸아이는 이곳에서 죽었지. 안식조차 없는 이곳에서. 이 영혼들도 마찬가지야. 계속 이 감옥 어딘가를 떠돌고만 있지.”




딸랑. 딸랑.




림레이는 종을 계속 흔들었다.




“그들이 대체 무엇을 잘못했을까. 대체 왜 이런 곳에서 고통을 받아야 할까.”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냔 말이다!”




“왜 상관이 없겠는가. 자네가 이곳에 와서 몰래 뒤처리로 죽인 사람들의 영혼과, 자네의 지나친 욕심과 무리한 행동으로 거기에 휩쓸려 죽은 자의 영혼도 여기에 있는데.”




“…….”




진리학파 마법사들이 움찔했다.




그것은 의외의 사실에 놀라서가 아닌, 숨기고 싶었던 진실이 드러난 것에 대한 반응에 가까웠다.




진리학파 또한, 자신의 목적과 욕망을 위해서라면 사람들을 죽이는 걸 꺼리지 않은 자들이었던 것이다.




그 사실이 세간에 알려지지만 않았을 뿐, 만약에 드러나게 된다면 그들은 흑마법사 취급을 받아도 할 말이 없었다.




토르테이는 차가운 시선으로 림레이를 노려보았다.




“그래. 그놈들이 그렇게 떠들던가? 자기 원수를 갚아 주라고? 저택 사람들을 다 죽여 가면서?”




“내가 뭘 하겠냐고 물었지?”




림레이는 그렇게 물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토르테이에게 한 말이 아니었다.




그 너머, 루드거에게 한 말이었지.




“나는 구원을 바라네. 다른 사람들까진 어떻게 되는지 내 알 바 아니야. 하지만 내 딸은 다르지. 그 아이의 영혼이, 아직도 이곳에 갇혀 있으니까. 그러니 풀어 줘야지 않겠나. 안식을 찾도록.”




그 안식이 비록 비루한 것일지라도.




이런 곳에서 갇혀 있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까.




그것은 정말 이기적인 이유였다.




하지만 루드거는 림레이에게 그걸 따지지 못했다.




누구보다도 림레이 본인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저택을 이렇게 만든 것도 전부 노렸던 겁니까.”




림레이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쪽이 알아서 판단하라는 듯.




“곧 저택은 붕괴될 거다. 지맥의 흐름을 꼬았으니, 오히려 지맥의 힘을 버티지 못하겠지. 폭주하는 마력이 무슨 일을 일으킬지 나도 장담할 수 없다. 그러니 탈출하려면 지금 해야 할 거다.”




조금 전까지 죽을힘을 다해 싸우던 사람이, 이제는 목숨을 부지하라고 충고해 준다.




어떤 것이 진짜 그의 모습일까.




아니.




어쩌면 전부 다 진짜일 것이다.




사람에게는 한 가지 면모만 있는 것이 아니니까.




졸지에 루드거와 림레이 사이에 끼게 된 토르테이가 분노를 터뜨렸다.




그는 루드거와 림레이 사이에 오가는 대화를 알아듣지 못할 정도로 멍청하지 않았다.




“림레이! 미쳐도 단단히 미쳤군! 이 모든 걸 네가 저질렀다고? 이곳이 얼마나 중요한 곳인데!”




“그래. 난 미쳤네. 하지만 내가 보기엔 미친 건 자네도 마찬가지야.”




“뭐?”




“그뿐일까. 자네 주위에 있는 늙다리들도 마찬가지지. 우리 모두가 미쳤어. 지식에 미치고, 욕망에 미치고, 복수에 미쳤지. 세상에 존재해선 안 될 놈들이야.”




마치 자조하듯 중얼거리던 림레이가 눈을 날카롭게 떴다.




“그러니 미친놈들끼리, 이 세상을 위해 사라져 줘야 하지 않겠나.”




“이, 이……!”




토르테이는 무어라 외치려다 급하게 술식을 구현했다.




림레이가 기습적으로 날린 공격이 방벽 위로 흩어졌다.




“안 그래도 시간이 얼마 없는데, 시시콜콜한 잡담은 그만하자고. 내가 원하는 것은 고작 이런 것이 아니니까.”




“……그래. 정 그렇게 나온다면 나도 봐주지 않겠네.”




토르테이가 그렇게 말하자 주위의 진리학파 마법사들이 각자 지팡이를 꺼내 쥐었다.




그들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무시무시한 마력이 일제히 림레이를 압박했다.




하지만 림레이는 그 마력의 격류 속에서도 균형을 유지했다.




그 이상으로 여유롭게 입을 열었다.




“자. 외부인은 이만 꺼지도록.”




말은 그렇게 했지만, 루드거는 안다.




림레이는 지금, 만전의 상태가 아니었다.




자신과 싸우면서 생긴 상처는 급하게 치료했겠지만, 흘린 피는 주워 담을 수 없다.




포션을 마셨다고 해도 소모한 마력을 모두 회복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이 붕괴하는 저택에 남았다.




루드거는 다시금 환상을 보았다.




림레이는 이번에도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서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에겐 함께 떠날 사람들이 이 자리에 모두 모여 있었으니까.




그의 심상 속에 존재하던 지옥은 이것을 위한 것이었을까.




“어딜 가려고! 네놈도 못 간다!”




토르테이가 분노로 핏발이 선 눈동자로 루드거를 노려보았다.




진실을 엿듣고, 심지어 자신이 눈독 들인 서적까지 챙겨갔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토르테이. 지금 남을 신경 쓸 처지가 아닐 텐데.”




그런 토르테이의 고집은, 림레이에 의해서 접힐 수밖에 없었다.




림레이는 자신에게만 집중하라며 기세를 일으켰다.




토르테이는 어쩔 수 없이 림레이에게 집중해야 했다.




“이만 썩 꺼져라.”




“…….”




루드거는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림레이를 보았다.




림레이도 루드거를 보고 있었기에, 두 사람의 서로를 볼 수 있었다.




자신이 이렇게 될 걸 알았을까. 신비 현상으로 본 액자 속 초상화가 자신인 걸 눈치챘을까.




루드거는 그걸 묻지 않았다.




림레이가 자신을 보며 피식 웃었기 때문이다.




그 미소는 아르파에게만 보였던, 인자한 할아버지의 미소였다.




‘그런가.’




그는 다 알고 있었던 것이다.




루드거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등을 돌려 자리에서 벗어났다.




‘잘 가라. 이놈아.’




떠나가는 루드거의 등 뒤로, 림레이의 그런 목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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